공평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인간적인 시각이 아닌 하나님의 시각에서 모든 인간들에게 공평하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난 행실들을 덮으시고 믿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데,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우리의 인간의 시각을 넘어 영생(永生)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장자(莊子)의 철학 속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1. 장자(莊子)의 조삼모사(朝三暮四)
조삼모사(朝三暮四)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장자의 우화(寓話)에 나오는 이 사자성어는 우리 인간의 편견과 어리석음을 비웃고 진정한 진리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글귀이다. 우화의 내용은 이렇다. 하루는 원숭이를 기르는 사육사가 원숭이에게 먹이를 주면서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의 밤톨을 먹이로 준다고 하니까 원숭이들은 분노한다. 그때 사육사는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준다고 설득하자 원숭이들은 모두 환호하며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조삼모사(朝三暮四)든 조사모삼(朝四暮三)이든 하루에 모두 7개의 먹이를 준다는 총량은 달라진 것은 없지만 원숭이들은 그 말에 따라 기쁨과 분노를 표현하였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조삼모사(朝三暮四)는 부정적인 뜻으로 자주 사용되곤 한다. 똑똑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말이나 논리로 속인다는 뜻으로 잘못 사용되는 이 고사(故事)가 원래는 장자의 철학을 잘 나타내는 중요한 논리이다. ‘세상의 모든 합은 같다’는 것이 장자의 ‘양행철학(兩行哲學)’의 핵심 논리이다. 그 논리 전개는 이렇다. 조삼모사(朝三暮四)나 조사모삼(朝四暮三)이나 결국 그 합은 7개로 같다. 장자는 이것을 대동(大同)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조삼(朝三)이냐 조사(朝四)냐를 따지며 기쁨과 분노를 교차하고 있을 뿐이다. 장자는 이 고사 뒤에 이렇게 말한다. “조삼(朝三)이든 조사(朝四)든 명실이 바뀐 것은 없다.(名實未虧) 다만 받아들이는 사람의 감정의 차이 즉 희노(喜怒)만 달리 사용할 뿐이다.(以喜怒爲用) 이것은 또한 인간들이 자신의 관점에서 옳다는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亦因是也)” 정말 명쾌한 논리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정에 의해 그 좋고 싫음이 결정되는 것이지 본질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 구절에서 장자의 세속적 시비(是非)와 선악(善惡)을 넘어서는 화합의 철학을 느낄 수 있다. “세상의 모든 합은 같다!” 이것이 장자가 말하는 하늘 천(天)자에 고를 균(均)자, 천균(天均) 즉 하늘의 밸런스이다. 이 고사를 생각하면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결국 어떤 인생이라도 그 인생의 합은 같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부귀와 성공을 추구하든, 건강과 가정을 추구하든 어떤 것이 좋고 나쁜 인생이 아니라 결국 그 합은 같으며, 단지 편견에 의해 받아들이는 감정의 차이점만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장자는 이것을 양행(兩行)의 도(道)라고 하고 있다. 세상은 한가지의 가치가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치가 존재하는데 그 합은 언제나 같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가치와 삶의 방식이 있다. 장자의 양행철학에 의하면 한쪽을 기준으로 보려고 하지 말고, 주변 사람의 입장에서, 배우자의 입장에서 다양한 각도로 문제를 바라보고 이해한다면 이미 양행(兩行)의 도(道)를 깨우치고 천균(天均)의 질서를 체득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일명 장자가 꿈꾸는 진인(眞人)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세상은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다. 일찍 성공한 분이 있으면 늦게 성공한 분도 있다. 결국 합은 똑같은데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부러워한다. 조삼모사(朝三暮四)든 조사모삼(朝四暮三), 그 합이 결국 같다.
2. 하나님의 공평하심
대부분 하나님이 불공평한 분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 분노의 감정을 비춘 적은 없는가? 하나님은 나만 힘들게 하셔! 나는 돌아보시지 않는 것 같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이런 상처와 아픔을 주시는 걸까?” 이런 생각들 말이다.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서운할 때는 언제인가? 꼬여 있는 자신의 상황과 비교할 때 다른 사람들이 잘나가고 있을 때이다.
당신이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한 다음 절망감에 휩싸여 화를 낼 경우, 그 화살의 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보라. 궁극적으로 전능자(全能者)를 향하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감히 하나님께 분(憤)을 내는 모습을 드러냈다가는 큰일 날 것 같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그저 속으로 그런 생각을 억누르고 감추려 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공평성을 판단하는 인간의 뿌리 깊은 오해는 성경에서 여러 번 다루어진다. 가인이 아벨을 질투하게 된 배경에는 하나님이 아벨에게 더 관심이 있으시다는 생각이 있었으니 이것은 오해이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주인에게 말한다. “당신은 굳은(엄한) 사람이라…”(마태복음 25장 24절). 그는 주인을 오해했다. 그는 주인을 엄하고 혹독한 사람으로 보았고 그래서 두려워했다. 그가 그런 오해를 한 배경에는 자신이 다른 종들에 비해 인정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있었으리라.
주인이 자신과 다른 종을 차별한다고 잘못 보았기 때문에 그는 주인의 일에 열심을 내지 않았고 받은 달란트로 이문(利文)을 남기는 일도 남의 일처럼 한 것이리라. 만일 그가 받은 것으로 장사하여 이문을 남기려고 애썼다면 주인은 그에게 더 많은 것을 맡겼을 것이다.
성경에는 포도원 주인과 품꾼들의 비유가 나온다(마태복음 20장 1-16절).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을 불러서 일을 시키는데 오전에 온 사람이나, 오후에 온 사람이나, 일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온 사람이나 다 같은 품삯을 주었다.
그러자 먼저 와서 일한 일꾼들이 불평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받은 몫은 정당하지만, 다른 사람이 받은 몫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교에서 나온 불평이었다. 자신의 의(義)로 포도원 주인의 은혜를 판단하고 불평한 것이다. 그러나 은혜의 마음을 품은 주인의 시각에서는 정당하고 공평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시각을 넘어 영생(永生)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공평한 것이다. 다만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에 미치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들어가면 그 때에는 모든 것을 환하게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과의 비교를 통해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잘못된 버릇을 버려야 한다. 남과 비교하지 말자. 세상의 모든 일에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이 동시에 내재한다. 지신의 지혜가 짧다는 것을 명심하고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공평하심을 믿음으로 밝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가자.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어질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장 12절).
2024.11.16. 素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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