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정직(正直)을 회복하자
정직(正直)이란 마음에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바르고 곧은 것으로, 천명(天命)으로 품수(稟受) 받은 인간의 덕성(悳性)이며, 지극히 공정(公正)하고, 사사롭고 굽어진 욕심 없는(無私曲) 마음이라고 하겠다. 세상만사에 정직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면 일시적인 조화와 화평은 이룰 수도 있겠으나, 근본적이고 변함없는 조화와 화평을 도모한다면 반드시 정직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정직은 만 가지 덕(德)의 근본이 되는 것이며 모든 종류의 사랑의 뿌리가 된다.
그러므로 공자는 말하기를 “인간의 삶은 정직함이니, 정직하지 않으면서 사는 것은 죽음을 요행히 면한 것일 뿐이다.[子曰 人之生也直, 罔之生也幸而免.](논어)”라고 한 것이리라.
‘인간다운 인간’이 되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할 것인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된 존재이니 하나님의 특질을 지녀야 참된 인간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인간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의 모든 말씀이 진리이며 거짓말은 하실 줄을 모른다. 하나님은 항상 진실하시며 그가 창조하신 자연의 법칙이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의 원죄로 죄악에 물든 인간들은 너무나도 거짓말을 잘한다. 바로 이 거짓말이 수많은 악행과 불행을 불러오게 되는데도 그칠 줄을 모른다.
정직한 사람은 당장은 손해를 볼 때도 있지만 결국에는 본인은 물론 만인의 행복을 불러온다.
이런 맥락에서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학문하는 요체는 사사로움과 굽어짐이 없게 하는 것으로서, 성인(聖人)이 만사에 응하는 것과, 천지가 만물을 낳는 이치는 모두 직(直) 하나일 따름이다.(주자대전)”라고 하였고, 구봉 송익필 선생은 말하기를 “직(直)하지 아니하면 도(道)가 드러나지 않는다.··· 직(直)으로 살고 직(直)으로 죽는다.(구봉집)”라고 하였다.
정직은 마치 집을 세우는 것과 같다. 집을 세울 때 약삭빠르게 요령껏 쌓아 올리는 것을 현명하고 효율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튼튼하고 안전한 집을 세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직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그렇게 쌓아 올린 집만이 오랜 가치를 가질 수 있다. 의인(義人)의 삶도 이와 같으니 이사야 26장 7절에 “의인(義人)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하나님께서 의인의 첩경(捷徑)을 평탄케 하시도다.”라고 하였다.
정직한 품성과 정도(正道)를 벗어나지 않는 생각과 행동만이 참된 지혜가 되며, 참으로 복된 삶을 여는 길이 된다. 세르반테스는 “하늘은 정직한 사람을 도울 수밖에 없다. 정직한 사람은 신(神)이 만든 것들 중에 최선의 작품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정직은 가장 확실한 최고의 자본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한국인이 정직하지 못한 것을 망국의 주요 요인으로 지적하였는데, 오늘날도 우리 한국인들에 대한 세계인들의 평가를 들어보면 정직하지 못하다는 말이 크게 부각되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국민들은 이제는 반드시 정직을 회복해야만 한다. 하여 여기서 우리 선조들 중에 정직한 인품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고 귀감(龜鑑)으로 삼고자 한다.
서하 이민서 선생은 당대의 문형 대제학 등을 지내며 나라의 중요한 글들이 대부분 그에게서 나올 만큼 두루 신망이 높았고 조선 역사에서 가장 강직하게 임금에게 바른말로 상소한 분 중 한분으로 생각된다. 생전에는 정직하고 강직한 말로 손해를 보았지만, 돌아가신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먼저 ‘국조인물고’에 실린 서하 선생에 대한 기록을 보자.
공은 타고난 성품이 굳세고 방정했으며 덕과 기국이 의젓하고 중후하였다. 체격은 중간 사람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바라다보면 정직한 군자임을 알 수가 있었다. 평소에는 조용히 생각하며 말수가 간묵(簡默)하다가도 성의(誠意)를 미루어 사람을 접할 적에는 온화한 기운이 감돌았고, 의리(義理)로써 일을 결단할 때는 용감하게 나아가고 되돌리지 않았다. 남의 악함을 미워하였고 너그러운 용서로 구제하였으며 몸을 다스리는 데는 매우 엄하게 하였고 남과의 견해를 다르게 하는 것을 일삼지 않았다. 마음이 넓고 쉬우며 평온하고 정직하여 겉과 속이 한결 같았다. 의리(義理)상 옳지 않은 것에는 비록 임금이라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 있었고 의리가 있는 곳에는 비록 빈천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몸을 굽히고 따랐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공의 공평함에 굴복하였고 또한 감히 사사롭게 구하지를 못하였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에는 서하 선생의 정직한 인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숙종 14년(1688년) 2월2일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이민서(李敏敍)가 졸(卒)하였는데, 나이 56세였다. 이민서는 고(故)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의 아들인데, 〈성품이〉 강명(剛明) 방정(方正)하고, 간묵(簡默) 정직(正直)하였으며, 조정(朝廷)에 있은 지 30 년에 여러 번 사변(事變)을 겪었으나 지조(志操)가 한결같았고, 직위(職位)가 총재(冢宰)에 이르렀으나 문정(門庭)은 쓸쓸하기가 한사(寒士)와 같았으며, 한결같이 청백(淸白)한 절개는 처음에서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문장(文章) 또한 고상하고 건아(健雅)하여 온 세상의 추앙(推仰)을 받는 바가 되어, 국가(國家)의 전책(典冊)도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다. 매양 매복(枚卜, 정승 될 사람을 점침) 할 때를 당하면 그 당시에 의논하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아무개를 두고 그 누가 되랴?’ 하였다. 허나 임금이 그의 강직(剛直)하고 방정(方正)한 것을 꺼려하여 그다지 우악(優渥)하게 총애(寵愛)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들어와 정승이 되지 못하였다. 이에 이르러 시대의 일에 근심이 많은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는 근심과 번민이 병이 되어 졸하였다. 조야(朝野)에서 슬퍼하고 애석해 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며, 비록 평일에 서로 좋아하지 않았던 자라도 정직(正直)한 사람이 죽었다고 말하였다. 그 뒤에 문간(文簡)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2024.11.19. 素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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