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분낙도

더 이상 동서로 다니는 짓 하지 않으리

jookwanlee 2024. 11. 12. 01:05

서하 이민서 선생 간찰

더 이상 동서로 다니는 짓 하지 않으리

 

나이 육십 오세가 넘어 은퇴를 할 나이가 지나면 우리는 젊은 시절 세상의 온갖 욕망들에 빠져 동분서주하던 일들을 접고 하나하나 긴요하지 않은 것들을 버리고 내 인생의 정수(精髓)가 무엇인지를 찾아서 여기에 몰입하여 차분하게 한평생을 정리하고 이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일찍이 서하 이민서 선생은 당대의 문형(文衡)으로 나라의 주요 문서들이 대부분 그의 손을 거쳐 나오는 등 세상에 높은 이름을 드날렸으나 노년에 접어들어서는 이런 삶의 이치를 깨닫고 부친이신 백강 이경여 선생의 묘소를 찾아 더 이상 세상의 일들에 연연하지 않고 자연과 함께하며 인생의 마지막을 삶의 본질로 돌아가는 삶을 살 것을 다짐하였다.

 

포천의 묘 아래에서 우연히 읊다 2수〔抱川墓下偶吟 二首〕

··············································································· 서하 이민서 선생

일찍이 맑은 강가에 말을 타고 / 早駕淸江上

동쪽으로 가는 길 분명했었지 / 東行路不迷

들꽃은 곳곳에 피어 있고 / 野花隨處發

산새는 사람 향해 울어 댔지 / 山鳥向人啼

지는 햇살 속에 어둑한 길 헤치고 / 落日披幽逕

찬 샘물 흐르는 옛 거처 찾아오니 / 寒泉訪舊棲

이제부터 사방의 뜻을 품고 / 從今四方志

더 이상 동서로 다니는 짓 하지 않으리 / 不復更東西

2

잣나무 심어 새 열매 맛보고 / 種柏嘗新實

복숭아나무 심어 늙은 가지를 보노라 / 栽桃見老枝

벼슬 쉴 때마다 매번 들렀으니 / 休官每一過

사물에 감동하여 몇 번이나 슬퍼했던가 / 感物幾回悲

고고하여 참으로 어울리기 어려우니 / 落落果難合

분주히 어디로 가랴 / 棲棲何所之

옛 현인도 오히려 묘에 맹세했거늘 / 昔賢猶誓墓

하물며 완전히 쇠약해진 나이임에랴 / 況我已全衰

[출처 : 서하집(西河集) 제3권 / 오언율시(五言律詩)]

[주-1] 이제부터 … 않으리 : 더 이상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겠다는 뜻이다. 사방의 뜻은 사방을 경륜하려는 포부를 말한다. 《예기(禮記)》에 “국군(國君)의 세자(世子)가 나면, 사인(射人)이 뽕나무 활에 쑥대 살[桑弧蓬矢] 여섯 개로써 천지 사방을 쏜다.” 하였는데, 그 주에 “천지 사방은 남자가 일할 곳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주-2] 옛 현인도 … 맹세했거늘 :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가 말년에 관직을 버리고 선영(先塋)에 나아가서 서묘문(誓墓文)을 짓고 은거하며 더 이상 출세(出世)하지 않았다. 왕희지가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왕술(王述)이 고관(高官)이 되어 그가 회계 군수(會稽郡守)로 재직할 당시 행한 정사들을 검찰하면서 잘잘못을 일부러 까다롭게 따지자, 이를 치욕스럽게 여겨 관직을 그만두고 부모의 무덤 앞에 가서, 앞으로 만일 뜻을 바꾸어 또 벼슬살이를 한다면 당신들의 자식이 아니노라고 맹세하였다.《晉書 卷80 王羲之列傳》.

 

서하 이민서 선생이 이렇게 고결한 자태를 잃지 않고 한결같은 지조(志操)로 평생을 살아간 덕분으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그의 졸기(卒記)는 매우 드물게 아름답고 가히 흠모할만하니, 나 또한 그런 삶을 살고자 동경하는 마음이 절로 이는 것이다.

 

숙종 14년 1688년 2월 2일, 지돈녕부사 이민서의 졸기 (知敦寧府事李敏叙卒記)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이민서(李敏敍)가 졸(卒)하였는데, 나이 56세였다.

이민서는 고(故)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의 아들인데, 〈성품이〉 강명(剛明) 방정(方正)하고, 간묵(簡默) 정직(正直)하였으며, 조정(朝廷)에 있은 지 30 년에 여러번 사변(事變)을 겪었으나 지조(志操)가 한결같았고, 직위(職位)가 총재(冢宰)에 이르렀으나 문정(門庭)은 쓸쓸하기가 한사(寒士)와 같았으며, 한결같이 청백(淸白)한 절개는 처음에서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문장(文章) 또한 고상하고 건아(健雅)하여 온 세상의 추앙(推仰)을 받는 바가 되어, 국가(國家)의 전책(典冊)도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다. 매양 매복(枚卜)할 때를 당하면 그 당시에 의논하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아무를 두고 그 누가 되랴?’ 하였다. 임금이 그의 강직(剛直)하고 방정(方正)한 것을 꺼려하여 그다지 우악(優渥)하게 총애(寵愛)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들어와 정승이 되지 못하였다.

이에 이르러 시대의 일에 근심이 많은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는 근심과 번민이 병이 되어 졸하였다. 조야(朝野)에서 슬퍼하고 애석해 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며, 비록 평일에 서로 좋아하지 않았던 자라도 정직(正直)한 사람이 죽었다고 말하였다. 그 뒤에 문간(文簡)이란 시호(諡號)를 내리고 영의정에 추증하였다.

[주-3] 매복(枚卜) : 정승 될 사람을 점침.

 

사람이 한평생을 사는 일이 누구에게나 쉽지 않고 우여곡절(迂餘曲折)이 많은 험난한 길일 것인데, 그 영화(榮華) 역시 부침(浮沈)이 심하다. 하지만 사람에게 일생에 가장 중요한 일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로부터 인정받는 삶을 사는 것이리라. 우리가 그런 고결한 소망을 품고서 한평생을 살아간다면 나의 마음과 영혼에는 언제나 평안과 즐거움이 있을 것이고 내세에는 천국에 들어갈 것이니 과연 복 받은 인생이 아닐 수 없다.

 

2024.11.12. 素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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