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메신저
세례 요한은 오실 예수를 미리 세상에 알리는 메신저였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자신이 맡은 일을 해냈습니다.
세상에 떠밀리지 않고 세상에 맞서가면서 이 일을 수행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등극'의 유혹에 빠져들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참으로 겸손한 메신저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풍경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세례 요한을 만나지 못합니다.
세례 요한을 찾지 못합니다. 세례 요한이 없습니다.
우리가 마주하고 것들은가짜 세례 요한들,
사이비 세례 요한들이 웅성거릴 따름입니다.
예수님을 간절하게 기다리기보다는
은근히 그가 오지 않기를 바라는
'반(反) 세례 요한'의 무리가 떵떵거립니다.
세례 요한은 스스로 엄격한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낙타털로 만든 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 꿀을 먹'으면서 자기 절제의 삶을 살았습니다.
삶의 방식이 그렇게 비범하다고 해서
그 자신 우쭐해하며 자신을 높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를 내세워 자기중심의 어떤 집단을 만들고자 하지 않았고
어떤 지배력을 행사코자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오직, 오실 예수를 미리 알리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고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는 결코 자기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지식을 뽐내거나 자신의 명석함을 과시하지 않았고,
자기의 신앙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조그만 치도 젠 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겸손하기만 했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그 일을 위해 이 땅에 온 사람이라는
자기 주체를 확고히 지키고 있었기에,
그는 안팎의 어떤 유혹도 뿌리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이해했습니다.
아니, 종이 되기에도 부족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의 신발 끈을 풀기에도 부족하다'고 자신을 규정했습니다.
오늘날의 풍경은 어떠합니까?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봐도 우리는 세례 요한을 만나지 못합니다.
이곳저곳에서 부딪히는 자들은 한결같이 화려한 옷차림에
요란스런 가운을 걸친 목회자들이고,
이곳저곳에서 치이는 것들은 하나같이 우람한 교회 건물들이고
화려한 강단들입니다. 세례 요한은 없습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호화스런 몸치장을 하고
거대한 교당을 들랑거리는 말만의 메신저,
행함이란 한 조각도 찾을 수 없는 사이비 세례 요한들,
알맹이 없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며
수선을 피우는 가짜 세례 요한들입니다.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고' '나보다 더 강하신 분'이
메시아로 오심을 미리 알려주기 보다는,
마치 자기 능력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더 강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식으로 거드름을 피워대는,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비속한 자들이
한국 교회에서 판을 치고 있습니다.
삼가는 마음가짐이란 전혀 찾을 수 없는
방자한 사람들만이 이 세상에 들끓고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세례 요한은 없습니다.
사이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빙자하여
자기중심의 주장을 선포하고 자기중심의 생각을 강요합니다.
자기주장과 자기 생각의 틀 속에 갇혀
자기 식으로 세상을 보고 판단하고
자기 식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일방으로 가르치려 합니다.
이들의 언행에 대해서는 어떤 질문도 용납되지 않고
당연히 어떤 이견이나 반론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자기의 한계를 전제하고 인정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기에,
이들에게 겸손이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자기 독선과 아집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이비들입니다.
독선과 아집은 겸손이 없는 곳에 번식하고 무성합니다.
겸손은 자기 생각 그 너머의 것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줍니다.
겸손은 자기의 테두리 너머 더욱 크고 높은 세계가 있고
자기보다 더욱 능력 있고 강한 차원이 있다는 것을
가리켜주는, 무한한 가능성입니다.
겸손은 그 어떤 것이든 기존하는 것을 절대화하여
거기에 고착하지 않습니다.
겸손은 그 어떤 것이든 그것이 인간의 것이고
인간에게서 비롯된 것이기에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부정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모름지기 그것이 인간의 것인 한 모두 변화되고
개혁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지평도 열어줍니다.
회개도 그러합니다. 거기에는 그 어떤 것도 절대화될 수 없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회개는 겸손의 표징입니다.
세상의 기준에 따라 약삭빠르게 살아가는 길밖에
다른 어떤 것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는
아집과 독선과 타성에 사로잡힌 귀먹은 자들에게,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아집과 독선과 타성에 묶여 한 걸음도 앞으로 내딛지 못하는
절름발이 된 자들에게, 기존 질서와 그 가치에 들붙어
전진의 삶을 포기해버린 이 절름발이 된 시대를 향하여,
세례 요한은 그 아집과 독선과 타성에서 벗어나라고 외칩니다.
엄청난 사명을 타고 났지만 그는 참으로 겸손한 선포자였습니다.
교회 강단에 올라섰다고 모든 사람에게 호령하고,
독선을 부리는 그 권위주의 덩어리의 가당찮은 독선의 설교자들,
그들이 도대체 세례 요한의 겸손을 흉내라도 낼 수 있겠습니까?
겸허란 한 움큼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가 펴실 하늘나라를 미리 알려줄 수 있겠습니까?
메시아의 오심을 먼저 알려준 요한의 가르침과 삶에서
우리는 무한한 부끄러움을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실망스럽게도 강단에서 발아래 교중을 향하여 고함지르고,
손짓발짓하며 별별 농담으로 웃기려하고,
뻔뻔스럽게도 별것 아닌 자기 지식을 과대하여 늘어놓고,
끔찍스럽게도 자기의 설교를
가장 바른, 절대의 것인 양 우겨대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쇠붙이처럼 바늘 하나도 들어갈 수 없게 견고한
그 오만과 독선의 뭉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이 모든 것을 겸손하게 내려놓습니다.
메시아의 오심을 선포한 요한의 겸손을 닮아,
그 모든 것을 겸손하게 내려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독선과 아집이 날뛰는 곳에서는,
성경에서 말하는 표현으로 '회개'가 없는 곳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리할 수 없습니다.
메시아는 겸손한 데로 임하십니다.
그의 오심을 준비하는 사람
이사야 35: 3-7/마가복음 1: 1-8
예람교회 박영신목사 설교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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