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無知)
··· 그대는 어떻게 죽으려 하십니까? <마틴 로이드 존스( Martin Lloyd Jones)>
그대는 어떻게 죽으려 하십니까? 어떻게 살아가려 하십니까? 어떤 모양으로 영원한 삶을 살려 합니까?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 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 (이사야 1장 2-3절)
복음(Gospel)의 필요성
사람들은 복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는 복음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복음의 필요성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 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이 첫 부분, 즉 회개에 대한 요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왜 당신은 복음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까?" 라고... "왜 당신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만을 제시하지 않습니까?" 라고...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저의 유일한 답은 사람들이 복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복음을 참되게 들으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저는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까요? 그들의 답은 이렇습니다. "예수가 누군대? 그 사람이 뭘 주길래?" 관심이 없습니다. "상관않겠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요즘 세상에서는 끝장났고, 없어졌고, 삶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왜 우리가 예수께 가야합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그 이유를 알게 해 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의 전반적인 문제입니다. 그들은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점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에서 이사야는 그 필요성, 즉 회개에 대한 촉구에서부터 말씀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의 원인
1) 우리가 살펴본 대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일종의 기현상이고 괴물이라는 점.
2) 인류는 현재의 난국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점.
3)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이 난국은 전적으로 인간들의 죄로 인한 것이라는 점.
죄란 무엇입니까?
죄는 하나님에 대한 거역이며 반역입니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우리는 또한 죄는 본질적으로 행동이나 행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죄에 대해 정말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나쁜 태도를 뜻한다는 점입니다.
죄의 역할
1. 무지(無知)하게 만듦.
죄는 우리의 마음을 닫아서 무지하게 만들며 생각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이 이사야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들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이는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입니다. 죄가 어떤 일을 합니까? 죄는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멈추게 합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이 무식하며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들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멈추고서 생각하고 고민해 보라는 요청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정반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논리적인 사람이요, 똑똑한 사람들이기에 교회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교회에서 들려지는 그런 감상적인 소리에 관심이 없고, 마취제나 아편 같은 그런 소리에 현혹되지 않을 만큼 지성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생각들이 바로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소위 문제의 청소년기가 되었을 때 주일학교 다니기를 중단하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이제 성인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다 자라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종교를 가진 것을 항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해되지 않아도 무작정 받아들였는데, 이제는 장성했기 때문에 그런 일은 던져 버릴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사실은 그와 정반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그들이 진실로 생각하지 않고 사고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에를 들면 사도 바울 그는 기독교를 싫어했으며 욕했던 사람입니다. 기독교를 박멸하려고 노력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눈이 열리고 나서 회고하면서 쓴 글을 보십시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디모데전서 1장 12-13절).
그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기독교를, 기독교회를 박멸하려고 하고 있을 때 나는 무지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에베소서 4장 17-19절).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믿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2. 어리석게 만듦
죄의 두 번째 결과는 죄가 사람들을 왜곡시키고 바보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반역에 빠져 있으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바보로 만들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시편 14편 1절)고 말합니다. 여기서 ‘어리석은 자’는 무지한 사람을 뜻할 뿐 아니라 자신의 위치를 깨닫지 못하고 그 위치를 한사코 생각지도 않으려는 사람들 뜻합니다.
바보는 아주 불안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나는 아주 잘하고 있어. 모든 일이 다 잘되고 있어”라고 말합니다. 바보들은 멈춰서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듣는 일은 철저히 거부합니다. 여러분은 “그 사람은 단지 바보일 뿐입니다.”라고 말할 겁니다. 바보는 자신을 속이고 있으며 남들이 자기에게 말하는 것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사야의 말을 들으십시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 하셨도다.” 이사야가 왜 소와 나귀를 골랐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 답은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 중에 이 짐승들이 가장 고집이 세며 다루기가 힘이 듭니다. 그러나 소와 나귀조차 그 주인을 알고 주인의 구유를 압니다. 그놈들이 우둔하고 어리석다 하더라도 타고난 본성 때문에 그 주인을 알아봅니다.
이놈들은 우둔하고 어리석어 보이고 말을 잘 안 듣는 것 같고 어떤 식으로든 일을 시킬 때는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지만, 음식이나 먹을 것에 대한 문제가 생길 때는 즉시 자신들의 존재의 법칙을 따라 먹을 것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소나 나귀보다 더 못난 바보입니다.
실제로 이것은 왜곡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정상이 아닙니다. 소와 나귀는 아주 정상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졌지만 왜곡되고 비정상적으로 행동합니다. 자신들의 존재의 법칙을 부정합니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신 다는 사실과 이생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본능적인 의식이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사람들 모두는 영원에 대한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소나 나귀처럼 이 본능을 따르기보다는 일부러 이 본능을 거슬려서 행동합니다. 그 본능을 떨쳐 버리려 하고 반박하며 자신들이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본능을 반대하기 위해 논증하며 따집니다. 본능이란 늘 존재하며 사람들은 그것을 지워 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원한 갈등 속에 살아갑니다. 그 점이 사람들이 짐승보다 더 우매하며 소나 나귀보다 더 어리석은 이유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제공된 모든 교훈과 모든 빛을 거절합니다. 그러나 소나 나귀는 우둔하고 어리석지만 주인이 양동이를 들고 먹을 것을 주러 오면 달려 나오지만 사람들은 빛이 어둠 속에 있는 그들에게 비췰 때 어떻게 합니까? 버려진 상태에 있고, 멸망의 상태에 놓인 그들에게 구원이 제공될 때 사람들은 무얼 합니까? 사람들은 그것을 거슬려서 행동합니다. 거절합니다. 도리어 반대하고 대항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정죄(定罪)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은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한복음 3장 19절). 필요한 모든 것이 그들 앞에 놓여 있지만 사람들은 그분을 반박하고 저항하며 싸우고 그에게 돌을 던지며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을 깨닫지 못하는도다”. 죄는 인간을 왜곡시키고 바보로 만들어 버립니다.
사람들은 무엇에 대하여 무지합니까?
죄는 우리가 과학과 외계(外界), 원자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것을 아는 데는 전혀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런 지식을 좋아하라고 부추길 겁니다. 철학, 음악, 예술... 마귀는 우리가 이런 것들을 공부하고 많은 지식과 이해력을 갖고 그런 것들을 깊이 생각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서 알아내는 일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이런 것들을 격려하고 부추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죄가 결코 원하지 않는 일이 있는데 이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인류가 가장 무지한 부분입니다. 그 무지한 면은 바로 하나님이며 사람들 자신입니다. 영혼입니다. 어떻게 살고 어떤 상태로 죽어야 하는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영원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죄와 마귀의 현명함이 개입되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원하는 만큼 많은 일에 대해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만 생명과 안녕과 영혼의 양식의 문제에 이르면 무지가 개입됩니다.
이것이 현 시점의 세계와 인류에 대한 완벽한 설명입니다.
1. 사람 자신에 대한 무지
인류는 하나님을 향해 그 등을 돌리고 있기 때문에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사람은 어떤 존재로 지음 받았는지, 또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양육하였거늘” 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대하게 만들며 존귀한 신분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갖도록 동료가 되고 친구가 되도록 계획되었던 존재입니다. 그리고 만물의 영장이 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쾌락에 빠져 있으라고 창조된 것이 아니건만, 사람들은 마치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이 세상의 비극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즉 자신들이 어떻게 살도록 창조되었는지를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양육하셨고 존귀와 통치권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하였습니다.
2. 사람은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음을 알지 못함.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주신 양식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압니다’ 소와 나귀는 자신들이 무엇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압니다. 그 녀석들은 주인이 먹을 것을 가지고 오지 않는다면 굶게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본능 때문에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똑똑하지만 자신들의 생명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점에라도 우리 중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없애 버리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일식(一息)의 호흡일 뿐이며 안개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섭리적인 돌보심을 거두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양식을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옷을 구할 수도 없으며 건강도 잃어버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식간에 그런 것을 빼앗아 가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
3.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대한 양식을 알지 못함.
우둔한 소와 어리석은 나귀를 보십시오. 아둔하고 꼼짝 않으려 하는 소도 양동이와 먹을 것을 보면 달려듭니다. 그들은 아무리 우둔해도 양식의 필요를 압니다. 양식이 없이는 살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압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제공하시는 것이 귀중함을 깨닫지 못하며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주에서 그 귀중함을 깨닫지 못하는 유일한 피조물입니다. 그렇게 된 것은 죄가 사람들을 왜곡시키고 비정상이 되게 하며 짐승들 보다 못하며 하늘과 땅보다도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경의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구원입니다. 오늘날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과 모두는 가련한 상태에서 가장 긴급하게 요청되는 것은 구원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풍성함을 가질 필요가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가련하고 가난한 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우리의 꼴과 필요를 채울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오직 우리의 주, 창조주 하나님께로 부터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소와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지만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구유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성경을 알지 못합니다. 세상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의 도리입니다.
구원의 도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화해함으로써 우리가 처한 곤경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다는 뉴스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사는 우리와 모든 이들에게 가장 긴요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유일한 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장 16절). 우리는 그 양식을 구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입니다. 완전하고 충만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새 생명, 새로운 출발,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으로 풍성히 채우실 분은 오직 그분 외에는 없습니다.
인생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장 큰 비극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주인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주인을 모릅니다. 그리고 그들이 누구를 의존하여 사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미물도 주인을 알지만은 인생은 도무지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인생의 비극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것들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따져보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죽으려 하십니까? 어떻게 살아가려 하십니까? 어떤 모양으로 영원한 삶을 살려 합니까? 영원한 복락가운데 살려합니까? 아니면 영원한 형벌과 고통가운데 살려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의지하여 그분의 꼴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깊이 생각하십시다.
[마틴 로이드 존스(Dr. Martin Lloyd Jo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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