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영혼이 두 몸에 살다
공자는 “마을에 인(仁)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잘 선택하여 그런 사람과 친구하여 살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로운 자라 하겠는가.[이인위미(里仁爲美) 택불처인(擇不處仁) 언득지(焉得知).]”라고 말한 바 있다.
이렇게 친구가 된다는 것은 단지 같이 어울려 다니는 그런 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됨의 본질 즉 희망, 기쁨, 실망, 좌절 같은 생각의 뿌리에서 상호간에 공감대를 찾아내어 이를 서로 나누는 관계를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증자(曾子)는 「논어」 ‘안연편’ 에서 친구를 사귀는 방도에 대하여 ‘서로 생각을 담은 글을 나눔으로 할 것(以文會友)’을 권유하였다.
순경(順境)은 친구를 만들지만 역경(逆境)은 우정을 시험한다. 키케로(Marcus Cicero)는 말하기를 “고난(苦難)을 만나야 우리는 진정한 친구를 알아볼 수 있다.”고 하였다. 고난을 만났을 때 곁을 떠나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진정한 친구가 아니며 벌써 떠나보냈어야 했을 사람들인 것이다. 맹자의 말처럼 친구는 상대의 덕(德)을 보고 사귀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열두 제자를 향해 온 세상을 다니며 이웃을 제자 삼으라고 하였는데 우리가 이웃을 제자 삼으려면 먼저 그 이웃들과의 공감대를 찾아서 친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먼저 이런 친구가 되지 않고는 인간의 영혼을 나누고 가장 깊숙한 인간의 본질을 다루는 하나님의 도(道)를 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유념할 바는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영혼과 정신과 인격을 나누는 참된 우정은 반드시 ‘상호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朋友有信)’는 점이다. 그래야만 서로 간에 영혼을 일깨우는 하나님의 도를 나눌 수가 있는 것이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말하기를 “친구란 무엇일까? 하나의 영혼이 두 몸에 사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참된 우정(友情)의 궁극적인 기준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이치를 터득하였던 당나라 문장가 왕발(王勃)은 그의 시「친구와의 이별」에서 “이 세상 어딘가에 나를 알아주는 그대만 있다면, 저 하늘 어느 아래 있어도 그대는 나의 영원한 친구 아니겠나.[해내존지기(海內存知己) 천애약비린(天涯若比隣)]”하는 명구(名句)를 남겼다.
그런데 우리를 진리와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이 우리의 친구라고 말한 것은 참으로 우리 삶의 큰 활력소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한복음 15장 14-15절). 그런즉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친구로 삼아 대화하며 살아가자. 아울러 동서고금의 불멸의 성현들과도 가까이 대화하며 왜곡되지 않은 진리의 길을 가도록 그들을 도우미로 삼을 필요가 있다.
2024.10.26. 素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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