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이 없는 학문과 믿음
“아무리 선(善)을 좋아한다고 해도 그 선을 실천한 뒤에라야 그 선이 선이다. 가령 부끄러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해도 실제로 부끄럽게 여기고 싫어한 그것을 스스로 버리지 못했다면, 속에서 생겨난 그 부끄러워하고 싫어하는 마음만으로 옳게 실현된 것이 아니다.” 이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말씀으로, 실제적인 실천을 떠나서는 별다른 공부나 학문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각이다.
“공자가 말씀하였다 ‘학문에 대해서라면 아마도 내가 남보다 못하지 않겠지만, 군자의 도리를 몸소 실천하는 것은 내가 아직 이루지 못했다.’[子曰 文莫吾猶人也 躬行君子則 吾未之有得(자왈 문막오유인야 궁행군자즉 오미지유득)]”<논어 (論語) 述而(술이) 32장>.
글을 배우고 쓰는 것은 자신도 남과 같이 할 수는 있으나 군자의 도(道)를 몸소 행하는 것은 아직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공자의 이 말은 그의 마음이 지향하는 것은 글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군자의 도(道)를 실천하는데 있음을 의미한다. 어찌 공자 같은 성인(聖人)이 군자의 도를 실천함이 없으랴. 공자의 이 말은 사람됨이 먼저요 글 배우는 것은 그 다음 남은 힘이 있거든 하라고 한 그의 말을 직접 자신에게 적용한 것이다. 글 배우는 것을 경시(輕視)하는 의미가 아니며, 비록 내가 글은 남과 같이 할 수는 있으나 군자의 도(道)를 실천함이 모자라니 안타깝다는 뜻으로 도(道)의 실천을 널리 권면하는 깊은 뜻이 숨어있다.
천권의 책을 외운다 할지라도 뜻을 알지 못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랴. 차라리 한 구절만을 알아 그 도(道)를 실천하는 것만 못하다. 영리한 앵무새는 사람의 소리를 흉내 내는 재주가 있다. 하지만 아무리 앵무새가 그럴듯하게 사람 소리를 흉내 낸다 할지라도 뜻을 알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실천이 따르지 않는 지식은 뜻도 모르고 사람의 소리를 흉내 내는 앵무새와 다를 바 없다. 지식의 가치는 실천할 때 비로소 드러난다.
시편 106편 3절에서는 “공의(公義)를 지키는 이들과 언제나 정의(正義)를 실천하는 이들은 복(福)이 있다” 하였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한걸음 더 나가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장 16절)”고 가르쳤다.
괴테는 ‘행동이 따르지 않는 생각은 오히려 질병이다’라고 하였는데, 우리는 깊고 넓게 탐구하되 그로부터 얻은 진리는 반드시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져야만 그 가치가 살아난다. “해마다 좋은 말을 구하는 것이 한 가지 일을 실행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는 1657년 효종8년 5월5일 백강 이경여 선생이 효종대왕에게 하신 말씀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구원 받는 복음(福音)을 강조하다가 소홀하게 된 것이 있으니 즉 말씀을 실천하는 생활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그 후의 삶에서 실천이 없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야고보서에서는 그런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야고보서 2장 14~ 26절).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가 무너져 내리는 심각한 위기 앞에 그저 침묵만하는 교회와 교인들은 배운 바를 실천하지 않는 교회요 교인이다. 진리는 실천함으로 완성되는 것이니, 실천이 없다면 그것은 진리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자사(子思)가 쓴 <중용(中庸)>에 몰입과 관련된 다섯 가지의 원칙이 있다. 그 중에 마지막이 ‘독행(篤行)’이다. 그 의미는 실천이 없는 학문과 믿음은 죽은 것이며, 실천하되 독실하게 실천하라는 것이다. 배움과 물음, 생각과 판단 뒤에는 반드시 실천 단계에 들어가야 하며, 그 실천은 독실하고 신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자사의 생각이다.
5가지 몰입의 원칙을 말하고 난후 <중용>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다른 사람이 한 번에 그 일을 해내면 나는 백 번이라도 해낼 것이며(人一能之, 己百之), 다른 사람이 열 번을 해 그 일을 해내면 나는 천 번이라도 해낼 것이다(人十能之, 己千之).
2024. 9.16. 素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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