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분낙도

충성과 효도

jookwanlee 2025. 4. 29. 00:05

충성(忠誠)과 효도(孝道)

 

《후한서(後漢書)》<위표전(韋彪傳)〉에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어버이를 효도(孝道)로 섬기기 때문에 충성(忠誠)을 임금에게 옮길 수 있나니, 그러므로 충신(忠臣)은 반드시 효자(孝子)의 가문에서 구하는 것이다.[孔子曰; 事親孝, 故忠可移於君, 是以求忠臣, 必於孝子之門.]”라고 하였다.

 

이 말의 취지를 따라서 한포재 이건명 선생은 그의 ‘면천군수김공묘지명(沔川郡守金公墓誌銘)’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옛사람이 충신을 구하려면 / 古人求忠

반드시 효자 집안에서 찾으니 / 必於孝子

임금을 섬기고 어버이를 섬김은 / 事君事親

본래 두 이치가 아니기 때문이지 / 本無二致

 

생각건대 충성과 효도는 인륜도의(人倫道義)를 지탱하는 두 기둥인데 이것은 반드시 사람의 지킬 바를 충실히 지킴으로 반드시 사람답게 살아가겠다는 굳은 결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종대왕께서는 “가전충효(家傳忠孝) 세수인경(世守仁敬)”이라는 가훈(家訓)을 남기셨으니 그 뜻은 “대대로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할 것이며 세대에 뛰어넘어 언제나 어질고 공경하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나라에 충성함에 있어 반드시 유념할 말씀이 있으니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不義)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누가복음 16장 10절)”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라에 충성하는 일을 우리 주변의 비근(卑近)한 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평소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세워진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전체주의·공산주의를 신봉하는 것 같은 언행(言行)은 삼가야 할 것이다.

 

효도에 대해서는 일찍이 기원전 13세기에 모세는 그의 십계명에서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도록 살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기원전 2세기에 벤 시라크는 “아비를 잘 섬긴 공(功)은 잊혀지지 않으리니 네 죄는 용서받고 새 삶을 이룰 것이다. 네가 역경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너의 효도를 기억하시겠고 네 죄(罪)는 얼음이 햇볕에 녹듯이 스러질 것이다. 자기 아비를 저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요, 어미를 노엽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부르는 것이다.”(집회서 3장 14-16절)라고 하였다. 이후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기를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誹謗)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마태복음 15장 4절)”라고 하였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니 당연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동포를 사랑하고 하나님이 세워주신 나라에 충성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이 세워주신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은 그 영혼과 마음이 올바른 사람이니 당연히 그 반듯한 영혼과 마음으로 인하여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다. 충성과 효도는 다 같은 하나님의 가르침이요 우리가 마음의 평안과 즐거움과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길이다.

 

2025. 4.29. 素澹

 

면천 군수 김공 묘지명 병서〔沔川郡守金公墓誌銘 幷序〕

··································································· 한포재 이건명 선생

공의 휘는 수빈(壽賓)이고, 자는 정수(廷叟)이니, 선원(仙源) 문충공(文忠公) 휘 상용(尙容)의 손자이고, 이조 참판을 지낸 휘 광현(光炫)의 막내아들이다. 김씨의 계보는 문충공의 아우인 청음(淸陰) 문정공(文正公) 휘 상헌(尙憲)이 지은 문충공 묘비에 상세히 실려 있다. 문충공과 문정공은 이미 충절(忠節)로 이름이 드러났고 자손 중에는 또 효(孝)로 알려진 사람이 많으니, 세상 사람들이 충효가 공의 한 가문에 모였다고 하였다.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진사 심율(沈慄)의 딸로, 천계(天啓) 병인년(1626, 인조4)에 공을 낳았다.

신묘년(1651, 효종2)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기해년(1659)에 처음 벼슬하여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과 금정 찰방(金井察訪), 사재감 직장(司宰監直長), 장흥고 주부(長興庫主簿), 예산 현감(禮山縣監), 통례원인의 겸 한성부 참군(通禮院引儀兼漢城府參軍),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사도시 주부(司䆃寺主簿), 공조 좌랑(工曹佐郞), 영덕(盈德)과 무주 현감(茂朱縣監), 선혜청 낭청(宣惠廳郞廳), 면천 군수(沔川郡守)를 거쳤는데, 혹은 나아가기도 하고 혹은 나아가지 않기도 하였다. 병진년(1676, 숙종2)에 별세하니, 향년이 겨우 51세이다.

참판공이 일찍이 병들어 위독해지자 공이 손가락을 베어 피를 약에 타서 드렸고, 상을 당해서는 수염과 머리털이 모두 세어 버렸다. 중씨(仲氏)인 현감공 휘 수민(壽民)도 모친이 돌아가시는 날에 손가락을 베었고, 백씨(伯氏)의 장남 성우(盛遇)는 효성으로 멸성(滅性)에 이르렀으니 공의 가정에서의 전수가 이와 같다.

공은 용의(容儀)가 크고 준수하며 타고난 성품이 준엄하고 단정하였다. 일찍이 강개한 뜻이 있었고, 마음속의 회포가 담박하여 말을 하면 온 좌중을 승복시켰다. 평소 수석(水石)의 경관을 좋아하여 서울 집과 고향 거처를 모두 그윽하고 넓은 곳에 자리 잡아 꽃과 대나무를 반드시 빙 둘러 심었다. 책상은 반드시 정결하게 하여 먼지가 앉지 않게 하고는 종일토록 조용하게 지냈다. 시의 품격이 맑고 고상하여 천박하거나 방종한 단어가 없고, 필법은 힘이 있고 분방하였는데 전서(篆書)와 예서(隷書)에 더욱 뛰어났다. 평소 서화(書畫)를 사랑하여 궤짝에 많이 쌓아 두었지만 세속에서 즐기고 좋아하는 일에는 모두 무심하였다.

재물과 이익에는 소홀하고 가족을 돌보고 화목하게 함에는 독실하여, 공의 두 형이 일찍 별세하자 고아가 된 여러 조카들을 잘 길러 성취하게 했으며 토지를 나누어 궁핍을 벗어날 바탕으로 삼게 하였다. 조상을 받드는 예법에 더욱 삼가서 묘를 수호할 토지와 노비를 별도로 두어 영구히 지킬 계획으로 삼았는데 자손들이 지금까지 따르고 있다.

전취(前娶)인 온양 정씨(溫陽鄭氏)는 승지를 지낸 정인경(鄭麟卿)의 딸로 후사가 없다. 계실(繼室)인 숙인(淑人)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군수를 지낸 이선기(李善基)의 딸이며 청강(淸江) 이제신(李濟臣)의 증손녀로, 정숙하고 슬기로우며 기량이 있었다. 과부가 된 후에는 집안일을 도맡아 처리하고 자녀를 훈육하여 가업(家業)을 실추시키지 않았으며, 종족 가운데 형편이 어려운 자를 보살피는 데 매우 부지런히 하였다. 본가의 종사(宗祀)가 쇠락해지자 이미 분깃(分衿 분산(分産))한 재산을 돌려보내고, 시댁의 외가에서 사들인 사전(祀田)을 덜어 주고 따지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여기에서 집안에 모범이 된 공의 교화가 별세한 뒤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더욱 잘 알게 되었다. 공이 돌아가시고 38년 뒤에 별세하였으니 연세가 72세였다. 공의 묘 왼쪽에 부장(祔葬)하였으니, 홍주(洪州) 내갈산(內葛山)의 임좌(壬坐) 언덕이다.

슬하에 1남 5녀를 두었으니, 아들 성익(盛益)은 부솔(副率)이고, 맏딸은 부사(府使) 이유수(李有壽)에게 시집갔으며, 그 아래는 참봉 유하기(兪夏基)에게, 그 아래는 판서(判書) 이건명(李健命)에게, 그 아래는 참의(參議) 이집(李㙫)에게, 그 아래는 별검(別檢) 권응(權譍)에게 시집갔다. 측실 소생인 아들 성절(盛節)은 첨사이고, 딸은 이만영(李萬榮)에게 시집갔다.

부솔 성익은 6남을 두었는데 참봉 시발(時發), 진사 시철(時哲), 시술(時述), 시길(時吉), 시일(時逸), 시눌(時訥)이고, 세 딸은 이현지(李顯之), 이수(李綬), 신야(申埜)에게 시집갔다. 이유수는 양자인 도순(道淳)이 요절하고 딸은 최상원(崔尙遠)에게 시집갔다. 유하기는 아들 유언종(兪彦宗)을 두었고 딸은 정복하(鄭復河)에게 시집갔다. 이건명은 아들 이면지(李勉之)와 요절한 이성지(李性之), 이술지(李述之)를 두었고 딸은 김희경(金喜慶)과 홍경보(洪鏡輔)에게 시집갔다. 이집(李㙫)은 생원인 아들 이주진(李周鎭)을 두었고, 딸은 서종옥(徐宗玉)과 임상두(林象斗)에게 시집갔다. 권응(權譍)은 아들 권탁(權擢), 권확(權擴), 권섭(權攝)을 두었고 딸은 윤상손(尹尙遜)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첨사 성절은 아들 시율(時律)을 두었고 딸은 이복명(李復明)에게 시집갔다.

나는 공이 돌아가시고 10년 뒤에 공의 집안에 장가들었으므로 공을 뵙지는 못하였으나, 공의 집안에서의 행실이 매우 잘 갖추어졌다는 말을 익히 들어 향년과 지위가 걸맞지 않음을 안타까워하였고, 숙인(淑人)의 보살펴 주는 은혜를 듬뿍 받았기에 매번 만년에 의당 큰 복을 누리실 것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또 부솔 성익과 교유하면서 구가(舊家)의 풍모를 저버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계사년(1713, 숙종39) 봄에 내 아내를 저세상으로 보냈는데 그 겨울에 숙인께서 돌아가시고, 을미년(1715) 여름에는 부솔 성익이 또 상중에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별세하여 수명이 공과 같은 나이에 그쳤으니, 슬프도다. 그러나 지금 부솔의 여섯 아들이 모두 학문에 뜻을 두었으니 공이 누리지 못한 복이 이들에게 있으리라. 참봉 시발이 공의 묘지명을 부탁하기에 의리상 감히 사양하지 못해 마침내 명(銘)을 쓰노라. 명은 다음과 같다.

옛사람이 충신을 구하려면 / 古人求忠

반드시 효자 집안에서 찾으니 / 必於孝子

임금을 섬기고 어버이를 섬김은 / 事君事親

본래 두 이치가 아니기 때문이지 / 本無二致

아, 공의 집안은 / 猗歟公門

충과 효가 모두 모였고 / 忠孝竝萃

집안의 행실이 갖추어졌으니 / 內行斯備

시문과 서화는 여사였지 / 翰墨餘事

어찌 하늘이 보우하지 않아 / 胡天不佑

수명과 지위가 이리도 인색한가 / 嗇年與位

집안에 덕화 이루어졌건만 / 德化于家

복이 후사에 이어지지 않았네 / 祿不延嗣

공의 여러 손자들이 / 公之諸孫

가르침 지켜 실추시키지 않았으니 / 守訓不墜

후손에게 보답이 내려지는 것을 보려면 / 責後之報

이 묘지명을 살펴보라 / 尙考此誌

[주-1] 김씨의 …… 있다 :

김상헌의 《청음집(淸陰集)》 권26에 실려 있는 〈백씨인 의정부 우의정 선원 선생의 신도비명[伯氏議政府右議政仙源先生神道碑銘]〉을 가리킨다.

[주-2] 멸성(滅性) :

친상(親喪)을 당하여 슬픔이 지나친 나머지 목숨을 잃는 것을 말한다. 《예기》〈상복사제(喪服四制)〉에 “상중(喪中)에 슬픔으로 몸을 손상할지라도 목숨을 잃는 데에는 이르지 않도록 하니, 이는 죽은 사람 때문에 산 사람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이다.[毁不滅性, 不以死傷生也.]”라고 하였다.

[주-3] 계사년 …… 보냈는데 :

이건명의 재취인 안동 김씨는 둘째 아들인 이성지(李性之)가 죽자, 이로 인해 병이 들어 1713년(숙종39) 봄에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寒圃齋集 卷10 祭亡室文 韓國文集叢刊 177집》 《兼山集 卷14 左議政寒圃李公行狀 韓國文集叢刊 續74輯》

[주-D004] 옛사람이 …… 찾으니 :

《후한서(後漢書)》 권56 〈위표전(韋彪傳)〉에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어버이를 효도로 섬기기 때문에 충성을 임금에게 옮길 수 있나니, 그러므로 충신은 반드시 효자의 가문에서 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孔子曰; “事親孝, 故忠可移於君, 是以求忠臣, 必於孝子之門.]”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출처 : 한포재집(寒圃齋集) 9권(卷9) 묘지명(墓誌銘)>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전형윤 채현경 이주형 유영봉 (공역) |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