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천과 겸손의 덕
“가난은 나에게는 일상이니 어찌 싫어하겠는가. 게다가 나는 이에 대해 느끼는 점이 있다네. 이른바 부(富)와 귀(貴)는 남들이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귀신도 매우 시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옛날부터 지금까지 부유하면서 잘 보전하고 귀하면서 거꾸러지지 않는 사람은 있지 않았으니, 이것이 상자평(尙子平)이《주역》의 손괘(巽卦)와 익괘(益卦)를 보다가 탄식을 내뱉은 이유라네1). ··· 아, 부귀(富貴)는 이미 그러하거니와, 또한 보지 않았는가. 세상에서 아등바등 온갖 일을 하면서 생각을 고달프게 하는 자가 아주 대단한 부귀를 바라는 것이 아닌데도, 조금이나마 만족스런 생각이 있고 자만하는 뜻이 있으면 재앙이 뒤따라 이르는 것이 마치 계약문서를 가지고 빚 독촉을 하듯이 얻으면 문득 잃음이 있게 되니 이것이 무슨 까닭인가. 가득 찬 것을 싫어하고 겸손(謙巽)한 것을 좋아하며, 이룬 것을 싫어하고 무너진 것을 좋아하는 것은 또한 천도(天道)가 그렇다네2).”<한포재 이건명 선생, “빈객(賓客)의 질문에 답하다(答賓問)”에서>.
생각건대, 부귀(富貴)는 사람을 안일과 쾌락을 추구하고 교만하게 만들며 세상의 돌아가는 숨은 이치를 제대로 알 수 없게 만드는 치명적인 병폐가 있다. 자고로 어릴 때부터 부귀 속에 자란 사람치고 세상에 본이 될 만한 인물은 극히 드문 것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바인데, 오히려 부귀 속에 자란 자식이 집안이나 나라를 망치는 일은 흔하다.
특별히 하나님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반드시 먼저 훈련시킨 후에 하나님의 일을 맡기는 데 그 훈련은 대개 고난과 빈천(貧賤)을 동반하는 훈련이다. 하나님은 이런 고난과 빈천의 훈련을 통해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인격을 먼저 성숙케 한 연후에 비로소 그에게 가치있는 과업을 맡기고 축복하는 데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고 운용하는 섭리이다. 이런 하나님의 훈련을 받은 사람은 결코 교만하지 않으며 반드시 겸손한 인격을 지니게 되는데, 이는 고난과 빈천의 훈련이 그의 사고와 정신의 깊이를 일깨우기 때문이다.
지혜의 대명사로 불리는 솔로몬도 그의 잠언 16장 18-19절에 이르기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말하였으니, 우리는 스스로 각성하고 주어진 훈련을 통하여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사치하는 이는 부자라도 부족할 것이거늘, 어찌 검소한 사람이 가난하면서도 여유가 있음만 같으리오. 능란한 사람은 수고로우면서도 원망을 불러들이거늘, 어찌 서툰 듯 겸손해 하는 사람이 한가로우면서도 진실함을 보전하는 것만 같으리오.[사자부이부족(奢者富而不足) 하여검자빈이유여(何如儉者貧而有餘) 능자노이부원(能者勞而府怨) 하여졸자일이전진(何如拙者逸而全眞).]”<채근담(菜根譚)>.
빈천의 훈련을 통해 몸에 익힌 검소(儉素)는 천지자연의 이치에 따른 본성으로 검소한 생활을 할 때 마음에 평안이 깃들고 진리로 향한 자리에 나가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한 것이다. 차원 높은 인격의 소유자는 검소한 생활을 즐기며, 비록 악인이라도 검소한 생활을 즐기는 사람을 공격할 빌미를 찾기 어렵다. 이에 백강 이경여 선생이 경계하기를“사치함과 호화로운 것은 여러 가지 악(惡)의 근본이요, 모든 값진 장식품도 역시 좋은 뜻을 손상시키며 백가지 구경을 좋아하는 것 역시 뜻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재물을 보게 되면 그것이 정당한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라”라고 하였다.
교회역사상 가장 큰 인물 중 한분인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이 제자와 나눈 대화 가운데에 겸손에 대한 대화가 있다. 성 어거스틴의 제자 중의 한명이 스승에게 물었다. “스승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서원하는 사람으로 가장 중요한 덕목(德目)이 무엇입니까?” 스승인 어거스틴이 답하기를 “"겸손이니라”하였다. 또 묻기를 “겸손의 반대가 무엇입니까?” 답히기를 “교만이니라”하였다. 또 묻기를 “그러면 교만은 무엇입니까?” 답하기를 “나는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니라”하였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더욱 극명하게 이를 밝혀 말하기를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부터 모든 것을 창조하신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때까지는 하나님은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라고 하였다.
[주 1] 후한(後漢) 때의 고사(高士) 상장(尙長, 尙子平)은 《주역》 읽기를 좋아하였는데 손괘(損卦)와 익괘(益卦)를 보다가 “나는 부유함이 가난한 것만 못하고, 귀함이 천한 것만 못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단지 죽음과 삶이 어떠한 관계인지 모를 뿐이다.[吾已知富不如貧, 貴不如賤, 但未知死何如生耳.]”라고 하였다. 《後漢書 卷113 逸民列傳 向長》
[주 2]《주역》〈겸괘(謙卦) 단(彖)〉에 “천도(天道)는 가득 찬 것을 이지러지게 하고 겸손한 것을 더해 주며, 땅의 도는 가득 찬 것을 변하게 하고 겸손한 데로 흐르며, 귀신은 가득 찬 것을 해치고 겸손한 것에 복을 주고, 사람의 도는 가득 찬 것을 싫어하고 겸손한 것을 좋아한다.[天道, 虧盈而益謙; 地道, 變盈而流謙; 鬼神, 害盈而福謙; 人道, 惡盈而好謙.]”라고 하였다.
2024.12.18. 素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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