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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어디에, 대장부(大丈夫)답게 대인(大人)답게 살아가려면

jookwanlee 2024. 4. 12. 00:36

진리는 어디에, 대장부(大丈夫)답게 대인(大人)답게 살아가려면

 

맹자(孟子)는 우리가 비록 세상의 험난한 풍파 속에서 살아갈지라도 우리에게 대장부(大丈夫)답게 대인(大人)답게 살아갈 것을 권면하였다.

 

“대장부(大丈夫)는 천하라는 넓은 공간에 머물면서, 천하의 바른 자리에서 당당히 서며, 천하의 대도(大道)를 행한다. 대장부(大丈夫)는 자신의 뜻을 얻게 되면 백성들과 함께 하고, 뜻을 얻지 못하였을 때에는 홀로 도(道)를 실천한다. 부귀도, 빈천도 그를 움직일 수 없고 권력과 힘에도 굴복하지 않는 사람이 대장부(大丈夫)이다. 대인(大人)이란 ‘순진무구(純眞無垢)한 어린아이의 마음( 赤子之心)’을 잃지 않은 자이다.”<맹자(孟子)>.

 

우리가 대장부(大丈夫)답게 대인(大人)답게 살아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과연 그 기준이요 표준이 되는 진리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첫째, 우리는 진리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만물의 생성과 운용과 소멸의 모든 이치로 부터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한 행동으로 진리를 가로막는 사람의 온갖 불경건함과 불의함을 겨냥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난다.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다.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다.”(로마서 1장 18-20절).

둘째, 우리는 진리를 인간의 양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율법 없는 이방인들이 본능적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실천하면 그들에게 율법이 없어도 그들 자신이 자기에게 율법이 된다. 그들의 행동은 율법이 요구하는 일이 그들의 마음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며 그들의 양심도 이것이 사실임을 증거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각이 서로 고발하며 변명하기 때문이다.”(로마서 2장 14-15절).

셋째, 우리는 진리를 사려 깊은 숙고를 통해서 찾을 수가 있으니 역사상 불멸의 성현들의 말씀이 우리가 숙고하는데 중요한 길잡이요 표준이 될 수 있다.

“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잠언 4장 26-27절).

마지막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진리를 찾을 수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 하나님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 하나님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한복음 14장 6-7절).

우리는 한 시대를 청백한 절개로 대장부답게 대인답게 살았던 서하 이민서(李敏敍) 선생이 그 시대의 일에 근심이 많은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는 근심과 번민이 병이 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는 그의 졸기(卒記)에서 배울 바가 있는 것이다. 지나치게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나아가자.

 

숙종 14년 (1688년) 2월2일 지돈녕부사 이민서의 졸기 (知敦寧府事李敏叙卒記)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이민서(李敏敍)가 졸(卒)하였는데, 나이 56세였다.

이민서는 고(故)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의 아들인데, 〈성품이〉 강명(剛明) 방정(方正)하고, 간묵(簡默) 정직(正直)하였으며, 조정(朝廷)에 있은 지 30 년에 여러번 사변(事變)을 겪었으나 지조(志操)가 한결같았고, 직위(職位)가 총재(冢宰)에 이르렀으나 문정(門庭)은 쓸쓸하기가 한사(寒士)와 같았으며, 한결같이 청백(淸白)한 절개는 처음에서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문장(文章) 또한 고상하고 건아(健雅)하여 온 세상의 추앙(推仰)을 받는 바가 되어, 국가(國家)의 전책(典冊)도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다. 매양 매복(枚卜, 정승 될 사람을 점침)할 때를 당하면 그 당시에 의논하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아무를 두고 그 누가 되랴?’ 하였다. 임금이 그의 강직(剛直)하고 방정(方正)한 것을 꺼려하여 그다지 우악(優渥)하게 총애(寵愛)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들어와 정승이 되지 못하였다. 이에 이르러 시대의 일에 근심이 많은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는 근심과 번민이 병이 되어 졸하였다. 조야(朝野)에서 슬퍼하고 애석해 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며, 비록 평일에 서로 좋아하지 않았던 자라도 정직(正直)한 사람이 죽었다고 말하였다. 그 뒤에 문간(文簡)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知敦寧府事李敏叙卒, 年五十六。 敏叙, 故相敬輿子也。 剛方簡直, 立朝三十年, 屢經事變而志操如一, 位至冡宰而門庭冷落如寒士, 淸白一節, 終始不渝, 文章亦高健, 爲一世所推, 國家典冊, 多出其手, 每當枚卜之時, 時議皆曰: ‘舍某其誰?’ 而上憚其剛正, 不甚優寵, 故終不得入相。 至是, 目見時事多虞, 憂懣成疾而卒, 朝野莫不痛惜。 雖平日不相好者, 亦曰: ‘正人亡矣。’ 後謚文簡。

【원전】 조선왕조실록 39집 121면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권재흥 (역) 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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