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사랑의 실천
우리는 대개 한 남성과 한 여인의 사랑의 결과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리고 이 사랑의 배후에 우리는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이 있었음을 알고 있다. 인생은 이처럼 사랑 속에 태어나서 사랑의 실천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라고 본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가장 큰 계명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목표는 결국 이 두 가지 초점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하고 교회도 이 두 가지 목표를 벗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사랑은 행동이다. 실천 없는 사랑은 사랑으로 보기 어렵다. 사도 바울(St. Paul)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 주셨다면 우리도 후회 없이 사랑을 하고 가야 한다. 우리가 살다간 자리, 거기에 남기고 가야 할 가장 위대한 흔적은 사랑이다. 성 프란치스코(Francesco d'Assisi)가 사모한 ‘사랑의 스티그마(stigma)’ 즉 사랑함으로 인해 얻게 되는 오명(汚名)내지는 상처, 그 사랑의 아픈 흔적을 우리도 각기 자신의 삶 속에서 끌어안고 살아가야 한다. 사랑은 운명적으로 상처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이동원 목사).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을 감고 운명할 때 그 의식의 잔영(殘影)에 마지막으로 그려지는 것은 사랑의 실천을 다하지 못한 가족이나 이웃들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의 실천은 과연 무엇일까?
생각건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의 실천 중 하나는 종교의 자유, 신앙의 자유를 말살하는 공산주의, 전체주의로부터 나라를 구해내는 일이라고 본다.
자유민주주의는 성경의 말씀에 근거하여 태동(胎動)하였고 세상의 그 어느 제도보다 인간이 하나님과 이웃들을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기본적인 인권과 종교의 자유,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제도이니, 이를 지켜내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의 실천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일을 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사랑의 스티그마를 우리는 사모하여 끌어안고 아니 오히려 즐거워하며 살아가야할 것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들을 축복할 것이다.
따라서 나라의 자유민주주의가 크게 위태로운 위기상황에서도 이런 구국(救國)의 노력을 하지 않는 교인이나 교회는 정상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런 교인이나 교회는 오히려 그 나라의 건전한 신앙풍토에 악영향을 준다. 그들은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서도 위선적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 때나 필요하면 종교는 정치와 분리되어야만 한다는 궤변을 늘어놓곤 한다. 우리들 일상이 넓은 의미에서 정치가 아닌 것이 없으며 우리는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한 어떤 형태로든 정치활동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는 존재이다. 이웃에게 도덕적인 권유를 하는 것도 넒은 의미의 정치활동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이런 구국의 활동은 정치활동이전에 신앙의 자유, 종교의 자유, 인간다운 삶의 확보를 위한 피나는 신앙의 활동이다. 토마스 제퍼슨이 말한 ‘정교분리원칙(政敎分離原則)’의 본래의 뜻은 정치권력이 함부로 종교에 간섭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세속적인 정치권력이 종교에 개입하면 인간의 순전한 영혼이 흔들리고 나아가 공동체의 인간다운 삶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2023. 8.11. 素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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