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님

다툼 없으면 항상 스스로 기쁘나니 (無競恒自悅)

jookwanlee 2022. 8. 24. 16:14

다툼 없으면 항상 스스로 기쁘나니 (無競恒自悅)

--------------------------------------------- 병산 이관명 선생

 

숨어 살다가 우연히 진나라와 당나라 사람들이 한적(閑適)함을 읊은 시 네 수를 얻어 자리의 오른쪽에 내걸고, 뒤이어 차운하여 스스로의 근심을 풀어보다 (幽居中偶得晉唐人閑適詩四首 揭諸座右 仍次其韻 聊以自遣).

 

일찍이 나는 먼 유람에 뜻을 두어 (夙余志遠遊)

말에게 꼴 먹이고 마구를 정리해서 (秣馬整韅鞅)

속세의 허물에서 벗어나 (脫略塵世累)

호탕하게 운해에서 노닐 생각이었지 (浩蕩雲海想)

현포와 창주 (玄圃與滄洲)

길 있다면 가기를 꺼려하지 않겠지만 (有路非憚往)

선경(仙境)은 끝내 어렴풋할 뿐 (仙區竟怳惚)

만고(萬古)토록 가시덤불만 자랐구려 (萬古荊棘長)

형문(衡門) 아래로 돌아오니 (歸來衡門下)

오묘(五畝)나마 편안하고 넓어서 (五畝安且廣)

이 집이면 그런대로 삶을 마칠 수 있으리니 (持此聊卒歲)

초야가 괴롭다고 탄식일랑 말아야지 (莫歎困草莽)

<이상은 도연명의 시를 차운하였다>

 

집 지으며 사치하지 않고자 하였기에 (架屋不願侈)

나무와 돌이면 쉽게 지을 수 있었나니 (木石易經營)

자그마한 집이 텃밭에 임했는데 (小堂臨圃塲)

깨끗해서 그윽한 정에 딱 맞도다 (蕭灑愜幽情)

아름다운 꽃들은 여러 식물들에 섞여있고 (佳卉雜凡植)

푸른 나무들이 정원에 가득 자라는데 (蔥籠滿園生)

궁벽한 마을이라 들르는 사람 없으니 (窮巷無人過)

빈 뜰에 매미만 모여 우누나 (空庭集蟬鳴)

사립 닫고 도가서(道家書)를 읽다가 (閉戶看道書)

지팡이 짚고 때로 홀로 거닐며 (杖策時獨行)

세상 생각 끊은 지 벌써 오래되었으니 (世念絶已久)

누가 영욕을 분별하려하는가 (誰辨辱與榮)

<이상은 위응물의 시를 차운하였다>

 

구하려 들면 늘 부족하고 (有求恒不足)

다툼 없으면 항상 스스로 기쁘나니 (無競恒自悅)

육신은 원래 흙과 나무에 섞였으니 (形骸元土木)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살다 죽는다오 (天地有生滅)

아 백 살밖에 못사는 사람들이 (嗟哉百歲人)

기쁨과 근심 번갈아 느끼고 드러내며 (憂樂交感發)

이 삶을 아등바등 애쓰면서 (營營勞此生)

갈수록 쉴 줄을 모르누나 (去去不知歇)

나는 북창(北窓)의 바람 사랑하고 (吾愛北窓風)

또 남헌(南軒)의 달님 아끼면서 (且愛南軒月)

경관(景觀) 만나면 마음이 흥겨우니 (遇境卽陶然)

어찌 굳이 아름다운 절기를 물을 손가(何必問佳節)

<이상은 맹호연의 시를 차운하였다.>

 

울타리는 동과 서로 나뉘고 (籬落分東西)

벼와 기장은 밭두둑에 연이었는데 (禾黍連隴阡)

곳곳마다 농가(農歌)가 들려오니 (處處聞村謳)

서로 논에서 김을 매려하는구나 (相將耘水田)

호미 메고 별을 보며 돌아오는데 (荷鉏帶星廻)

귀로에 저녁 소리개 모여드나니 (歸路集暮鳶)

올 여름은 때맞춘 비 풍족하기에 (今夏時雨足)

또 풍년 들길 바란다오 (庶幾且有年)

뽕잎 벌써 드물어졌으니 (桑柘葉已稀)

발에 가득 누에들 잠들었구나 (滿箔蠶就眠)

노력하며 한해의 수확 기대하나니 (努力望歲功)

힘쓰며 고달파도 서글픔은 없다오 (勤苦無戚然)

<이상은 유자후의 시를 차운하였다.>

 

1) 형문(衡門) : 처사(處士)가 은거하는 나지막한 집을 말하는데, 문을 통나무로 가로질러 허술하게 만들었다. 《시경》 〈형문〉에 “형문 아래여 깃들 만하도다. 샘물이 졸졸 흐름이여 주림을 잊겠도다.”라고 하였다.

2) 오묘(五畝) : 오묘지택(五畝之宅)의 줄임말로, 농가(農家)의 한 단위를 뜻한다.《孟子 梁惠王上》

3) 도연명(陶淵明) : 연명(淵明)은 진(晉)나라 도잠(陶潛)의 자(字)이다. 그는 진나라 말엽에 집이 가난하여 친구들의 권고로 팽택 영(彭澤令)이 된 지 80여 일 만에 벼슬을 버린 뒤,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짓고서 전원(田園)으로 돌아갔다.

4) 위응물(韋應物) : 당(唐)나라 시인으로 대표적인 자연파 시인이다. 강주(江州)와 소주(蘇州)의 자사(刺史)를 역임했으므로, 위 강주(韋江州) 또는 위 소주(韋蘇州)라고도 부른다.

5) 맹호연(孟浩然) : 성당(盛唐) 때의 시인이다. 그는 젊어서부터 절의(節義)를 숭상하여 일찍이 녹문산(鹿門山)에 은거하다가, 40세가 넘어서야 장구령(張九齡)의 부름을 받고 잠시 형주 종사(荊州從事)가 되었다가 죽었다.

6) 유자후(柳子厚) : 자후(子厚)는 당나라 유종원(柳宗元)의 자(字)이다. 문장에 뛰어나 한유(韓愈)와 같이 한유(韓柳)라고 일컬어지며,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한다.

 

출처 : 병산집(屛山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