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직계가 추진했던 ‘북벌(北伐)’ -동아일보 어문학사 소식
2008. 12. 30. 10:38
조선사 중심에 자리 잡은 집안 이야기
'전주 이(李)씨' 가운데 0.4%에 불과한 세종대왕의 5남 밀성군의 후손이 500년간 조선 정치사상 문화의 핵심적 역할을 해왔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밀성군의 19대 손이자 언론인인 이상주 씨는 최근 출간된 책 '세종대왕 가문의 500년 야망과 교육'에서 밀성군의 후손들이 대대로 서인과 노론의 사상가로 정국을 주도하면서 연산군과 광해군 등의 혼란기에는 타락한 왕을 비판하고 효종 때에는 청나라와의 일전을 준비했다고 주장했다.
이 씨의 주장에 따르면 효종 전후에 추진된 '북벌(北伐)사업'의 핵심에도 밀성군의 후손들이 있었다.
● 북벌추진 3대, 이경여 집안
그 대표적 인물은 백강 이경여(1585-1657)다. 그는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남한산성에 모셨다가 훗날 배청파로 몰려 선양에 끌려가 억류되기도 한 인물이다. 그는 국가를 보위하기 위한 절대병력 차원에서 10만 정예병 양병설을 주장했다.
북벌 주장 2세대격인 이조판서 이민서(1633~1688)는 정신교육의 필요성을 느껴 민족영웅 발굴작업을 통한 국민역량 집결에 힘을 쏟았다. 이순신 김천일 김덕령 이종인 박광옥 등 임진왜란 때 활약한 영웅들의 일생을 재조명하면서 민족사관 정립에 앞장섰다. 이 같은 역사관은 일제시대를 거쳐 현대에 까지 이어졌다.
북벌 주장 3세대격인 병조판서 이사명(1647~1689)과 좌의정 이이명(1658~1722) 대에는 실학에 바탕을 둔 구체적인 북벌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사명은 숙종에게 12만 화포병 육성안을 올렸다. 그는 조선에 전투가 가능한 병력은 불과 3만~4만 명에 불과하다면서 "기존 병졸 4만에 빠르고 용맹스러운 자 8만 명을 더 뽑아 단련시키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세종의 후예들의 적극적 후원에도 북벌은 성공하지 못했다. 북벌의 중심인 효종이 41세에 급서한 게 큰 이유이지만 백강 이경여 가문이 기사환국(1689년)과 신임사화(1722년)로 타격을 입은 것도 결정적 원인이 됐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 같은 '강병론'은 밀성군파 집안 내력으로 이어졌다.
이이명은 사행사로 간 청나라에서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작전 끝에 만주와 북경일대를 그린 북방지도, 요계관방지도(遼¤關防地圖)를 완성했다. 또 철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헌구는 평안감사 시절에 의주 등 서북의 국방의 요소에 산성을 전면적으로 개축하고 특별 무과시험을 실시하는 등 국방력 강화는 물론 무예숭상 사상을 고취시켰다. 역시 청나라와의 한판 전쟁에 대비한 준비였다.
● 교육에 투자한 밀성군파
밀성군파는 세종대왕과 신빈김씨 사이의 소생으로 명문가인 광산 김씨, 안동 김씨 등과 통혼을 했고 6정승 8판서 3대 대제학 및 50여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할 정도로 조선 최고의 명문을 형성했다. 과거에 급제한 전주 이씨 873명 중 밀성군파는 5.7%. 인구비율(0.4%)로 따지면 전주 이씨 평균에 비해 합격률이 14배에 이른다.
특히 책 읽는 습관은 세종에게 배운 그대로 일종의 운명이었다고 한다. 이건명 이기지 등은 정쟁에 패해 죽음을 맞는 자리에서도 자녀 훈으로 독서를 강조했다. 글 읽는 문화는 규방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이명의 아내, 며느리, 손자며느리 등 여인 3대는 귀양을 가서도 책읽기와 글쓰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런 결과는 이민적(1625~1673) 3대의 장원급제 등 50여명의 문과 급제자 배출로 이어졌다.
이 집안의 또 하나의 특징은 실학적 사고다.
변화하는 현실에 유연성을 보였던 이이명은 몇 번의 북행사절(北行使節)을 통해 접한 서양의 발달된 문물의 수입을 위해 천주교·역산(曆算)·천문·지리에 관한 책을 국내에 반입했고, 만주와 화북 지방이 포함된 지도를 제작하는 등 실증적인 지리·전산(田算)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아들 이기지는 좀 더 유연한 사고로 깊은 천문지식을 바탕으로 북경의 서양인 선교사들과 대담을 통해 앞선 문물을 조선에 도입하고자 노력했다. 이기지는 역대 조선인중 북경의 선교사와 가장 많이 접촉한 인물이다. 그는 서양인 선교사로부터 카스텔라를 대접받은 감흥을 연행록에 남기기도 했다.
이이명과 이기지의 활동시대는 북학파 보다 한 세대를 앞서고 있다. 이기지의 아들인 이영유도 음악을 통한 백성교화, 즉 음악을 통한 통치를 주장하기도 했다.
정호재 기자demian@donga.com
[출처] 세종 직계가 추진했던 ‘북벌(北伐)’ -동아일보|작성자 도서출판 어문학사
2008. 12. 30. 10:38
조선사 중심에 자리 잡은 집안 이야기
'전주 이(李)씨' 가운데 0.4%에 불과한 세종대왕의 5남 밀성군의 후손이 500년간 조선 정치사상 문화의 핵심적 역할을 해왔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밀성군의 19대 손이자 언론인인 이상주 씨는 최근 출간된 책 '세종대왕 가문의 500년 야망과 교육'에서 밀성군의 후손들이 대대로 서인과 노론의 사상가로 정국을 주도하면서 연산군과 광해군 등의 혼란기에는 타락한 왕을 비판하고 효종 때에는 청나라와의 일전을 준비했다고 주장했다.
이 씨의 주장에 따르면 효종 전후에 추진된 '북벌(北伐)사업'의 핵심에도 밀성군의 후손들이 있었다.
● 북벌추진 3대, 이경여 집안
그 대표적 인물은 백강 이경여(1585-1657)다. 그는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남한산성에 모셨다가 훗날 배청파로 몰려 선양에 끌려가 억류되기도 한 인물이다. 그는 국가를 보위하기 위한 절대병력 차원에서 10만 정예병 양병설을 주장했다.
북벌 주장 2세대격인 이조판서 이민서(1633~1688)는 정신교육의 필요성을 느껴 민족영웅 발굴작업을 통한 국민역량 집결에 힘을 쏟았다. 이순신 김천일 김덕령 이종인 박광옥 등 임진왜란 때 활약한 영웅들의 일생을 재조명하면서 민족사관 정립에 앞장섰다. 이 같은 역사관은 일제시대를 거쳐 현대에 까지 이어졌다.
북벌 주장 3세대격인 병조판서 이사명(1647~1689)과 좌의정 이이명(1658~1722) 대에는 실학에 바탕을 둔 구체적인 북벌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사명은 숙종에게 12만 화포병 육성안을 올렸다. 그는 조선에 전투가 가능한 병력은 불과 3만~4만 명에 불과하다면서 "기존 병졸 4만에 빠르고 용맹스러운 자 8만 명을 더 뽑아 단련시키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세종의 후예들의 적극적 후원에도 북벌은 성공하지 못했다. 북벌의 중심인 효종이 41세에 급서한 게 큰 이유이지만 백강 이경여 가문이 기사환국(1689년)과 신임사화(1722년)로 타격을 입은 것도 결정적 원인이 됐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 같은 '강병론'은 밀성군파 집안 내력으로 이어졌다.
이이명은 사행사로 간 청나라에서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작전 끝에 만주와 북경일대를 그린 북방지도, 요계관방지도(遼¤關防地圖)를 완성했다. 또 철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헌구는 평안감사 시절에 의주 등 서북의 국방의 요소에 산성을 전면적으로 개축하고 특별 무과시험을 실시하는 등 국방력 강화는 물론 무예숭상 사상을 고취시켰다. 역시 청나라와의 한판 전쟁에 대비한 준비였다.
● 교육에 투자한 밀성군파
밀성군파는 세종대왕과 신빈김씨 사이의 소생으로 명문가인 광산 김씨, 안동 김씨 등과 통혼을 했고 6정승 8판서 3대 대제학 및 50여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할 정도로 조선 최고의 명문을 형성했다. 과거에 급제한 전주 이씨 873명 중 밀성군파는 5.7%. 인구비율(0.4%)로 따지면 전주 이씨 평균에 비해 합격률이 14배에 이른다.
특히 책 읽는 습관은 세종에게 배운 그대로 일종의 운명이었다고 한다. 이건명 이기지 등은 정쟁에 패해 죽음을 맞는 자리에서도 자녀 훈으로 독서를 강조했다. 글 읽는 문화는 규방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이명의 아내, 며느리, 손자며느리 등 여인 3대는 귀양을 가서도 책읽기와 글쓰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런 결과는 이민적(1625~1673) 3대의 장원급제 등 50여명의 문과 급제자 배출로 이어졌다.
이 집안의 또 하나의 특징은 실학적 사고다.
변화하는 현실에 유연성을 보였던 이이명은 몇 번의 북행사절(北行使節)을 통해 접한 서양의 발달된 문물의 수입을 위해 천주교·역산(曆算)·천문·지리에 관한 책을 국내에 반입했고, 만주와 화북 지방이 포함된 지도를 제작하는 등 실증적인 지리·전산(田算)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아들 이기지는 좀 더 유연한 사고로 깊은 천문지식을 바탕으로 북경의 서양인 선교사들과 대담을 통해 앞선 문물을 조선에 도입하고자 노력했다. 이기지는 역대 조선인중 북경의 선교사와 가장 많이 접촉한 인물이다. 그는 서양인 선교사로부터 카스텔라를 대접받은 감흥을 연행록에 남기기도 했다.
이이명과 이기지의 활동시대는 북학파 보다 한 세대를 앞서고 있다. 이기지의 아들인 이영유도 음악을 통한 백성교화, 즉 음악을 통한 통치를 주장하기도 했다.
정호재 기자demian@donga.com
[출처] 세종 직계가 추진했던 ‘북벌(北伐)’ -동아일보|작성자 도서출판 어문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