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세우는 기본 질문
자연은 우리의 삶의 많은 부분에서 좋은 스승이다.
그러나 자연에는 영혼(靈魂)은 없으며, 그 누구인가 자연을 창조한 실체적 존재는 있을 것이다. 진화론(進化論)을 따른다 하여도 처음 자연의 존재를 우주 공간에 나타나게 한 동인(動因)은 있을 것이다.
우리들이 자연에서 느끼고 글로 표현하는 것들의 상당부분은 아직 글로는 표현되지 않은 본체인 자연에 이미 스스로 기록되어져 있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자연에는 없으며 또 보고 유추(類推)할 것도 없는 우리들의 영혼의 본체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이것이 우리들의 삶을 인간답게 세우는 기본 질문이며, 그 본질일 것이다. 인간은 다른 만물과 달리 유일하게 영혼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1. 자연 : 문자로 표현되지 않은 문장
글의 정신과 의취가 이 세상 어디를 막론하고 만물에 두루 퍼져 있으니, 이 세상의 만물은 글자로 쓰거나 글로 짓기 이전 상태의 문장인 것이다.
其神精意態, 佈羅六合, 散在萬物, 是特不字不書之文耳.
기신정의태 포라육합 산재만물 시특불자불서지문이
-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연암집(燕岩集》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이치를 담고 있다. 그 이치를 내포한 온 세상의 만물은 아직 글자로 쓰거나 글로 짓지만 않았을 뿐 저마다 훌륭한 문장이라 할 수 있다. 책을 읽는 것만이 독서가 아니라 세상에 담겨져 있는 이치를 깨달아 아는 것이라면 모두 독서라고 보는 사고인 것이다. 타성에 젖어, 책은 책대로 나는 나대로 아무런 감흥도 없이 하는 독서는 차라리 대자연과 벗하며 노는 것만도 못하지 않을까.
옛날 상고시대에 복희씨가 천하를 다스릴 때에 하늘의 형상과 땅의 이치를 관찰하고 새와 짐승의 문양을 잘 살펴 팔괘(八卦)를 만들었다. 이것이 주역의 시초이다. 복희씨의 자연에 대한 독법을 현대적으로 말하면 대상을 기호화하고 추상화한 것이라고나 할까. 또 공자는 만년에 주역을 좋아하여 죽간을 묶은 가죽 끈이 3번이나 끊어졌다는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는 고사를 남긴 분이다. 아마도 주역의 원리를 사색하며 독서하였을 법하다.
글을 좀 써 본 사람들, 특히 시인들은 연암의 이 글을 읽지 않아도 이런 이치를 대개 자득하는 경우가 많다. 시에서 구현하는 언어들이 아무래도 자연의 어휘들이 많은 까닭에 그 자연이 하나의 시이고 거룩한 스승으로 보이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의 구절을 읽지 말고 그 구절 이면에 있는 시인의 마음을, 시인의 마음보다 시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글로 짓기 이전 상태의 문장, 즉 자연의 소리를 듣고 그 빛깔을 보아야 하는 것이 자명한 이치가 아닐까.
나아가 이 글을 단순히 문학으로 한정해서 읽는 사람은 독서를 깊이 하는 사람이라 보기 어렵다. 세상의 어떤 분야라도 일정한 경지에 도달하면 자연과 세상에서 홀로 자득하며 신천지를 개척해 나가야 하는 때가 온다. 거문고의 명인 백아(伯牙)가 태산과 바다에서 영감을 얻고 쿵푸의 여러 권법이 동물들의 격투 자세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며, 현대의 건축가가 까치집이나 벌집에서 공학적인 깨달음을 얻는 것이 다 그렇다. 또 스위스의 드 메스트랄(George de Mestral)이라는 사람이 사냥하다 자신의 옷에 붙은 도꼬마리에서 섬유부착포(찍찍이)를 고안해 성공한 것이나 폴란드 출신의 과학자 만델브로(Benoit B. mandelbrot)가 해안선에서 프랙탈 이론(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와 비슷한 형태로 끝없이 되풀이 되는 것)을 발견해 낸 것 등, 좋은 예들이 많다. 요컨대 자연과 세상만큼 풍부하고 훌륭한 장서와 스승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자기 주변의 사물을 온통 스승과 책으로 만든 뒤에야 한 방면의 일가를 이루게 되지 않을까. 그 삶의 현재가 얼마나 황홀할까?
<글쓴이 : 김종태 (한국고전번역원) 2012. 1. 5. 고전포럼>
이처럼 자연은 우리의 좋은 스승이 되나, 우리의 영혼을 찾아주고 우리 영혼이 영원히 나갈 길을 밝히지는 못한다.
2. 우리 영혼의 실체와 영생(永生)
기독(예수)교는 인간의 영혼을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특별한 사랑으로 자기의 형상을 따라 부여하신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화롭게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요, 살아갈 길이며, 그렇게 살아가면 육신이 죽은 후에도 영생을 얻어 하나님과 더불어 복락(福樂)속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복락의 영생을 바라볼 때에 이세상의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으로 알고 기쁨가운데 대처하게 되는 것이며, 결코 죽지 않는 놀라운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간명한 말인데, 예수 그리스도가 설파한 이후 이천여년을 내려오며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믿고 따르며 그들이 삶을 통하여 이 말이 살아 움직여 내려와 스스로 진리임을 입증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 이와 달리 인간영혼의 창조자와 그 앞날을 극명하게 찾아 설명하는 바를 아직 보지 못하였다.
문정공 백강 이경여 선생은 조정에서 “하늘을 섬기는 도리“를 자주 강조하셨는데, 나는 이를 위와 같은 맥락(脈絡)에서 해석하게 된다. 하늘의 깊은 뜻을 찾아 이를 따라 실천하며 나라의 정치를 바로 잡고 민생을 개선하여가고자 하신 백강상공의 뜻은 사실상 오늘날 만물의 창조주인 하나님을 찾아 따르는 것이나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다. 다만 당시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전한 영생의 개념은 알려지지 아니하여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2012. 1.26. 이 주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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