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말하는 자를 높이라
“대체로 벌(罰)이 그 죄(罪)에 맞지 않으면 무슨 일인들 잘못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신하가 지극히 원통한 마음을 품는 것이 바른 말을 했다가 죄를 얻는 것보다 심한 것이 없고, 하늘이 임금에게 노(怒)하는 것도 바르게 간(諫)하는 신하를 죄주는 것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효종 즉위년 1649년 7월 19일 청음 김상헌 선생 상차문(上箚文)에서>.
누구든지 바른말하는 사람을 높이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충직한 사람의 간언(諫言)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겸허하게 수용하여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른바 납간<納諫, 간언(諫言)을 따름>이란 뜻을 겸손히 한다는 말인데, 이윤(伊尹)은 ‘뜻에 맞는 말은 도리(道理)에 어그러지는지를 살피라.’하였고, 장손흘(臧孫紇)은 ‘계손(季孫)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질진(疾疢 겉보기와 맛은 좋으나 해가 되는 것)이다.’하였습니다. 임금이 옳다 하는 것을 따라서 옳다 하고 임금이 그르다 하는 것을 따라서 그르다 한다면, 내 말을 어기지 않는 것은 기쁘더라도 일에 해롭지 않겠습니까. 약을 먹고 어지러운 것은 병에 이롭고 귀에 거슬리는 말은 일에 이로우니, 이것이 주사(周舍)가 입바른 말을 하던 일을 조앙(趙鞅)이 사모한 까닭입니다.”<효종 4년 1653년 7월 2일 백강 이경여(李敬輿) 선생 상차문(上箚文)에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남이 하는 말이 충직한 바른 말인지 아니면 나쁜 의도를 지닌 사악한 말인지를 분간(分揀)할 수가 있는가? 이웃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섭리와 천지자연의 이치와 나의 양심과 성현(聖賢)들의 불멸의 말씀에 부합한다면 그것은 충직한 바른 말인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사사로운 흑심(黑心)이 개입한 간사한 말로 보아야 한다.
《주역》<함괘(咸卦) 상사(象辭)>에 이르기를, “산 위에 못이 있는 것이 함괘(咸卦)이다. 군자는 이것을 본받아 자신을 비워 남을 받아들인다.”하였다. 이에 대해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군자는 산과 못의 기운이 통하는 형상을 보고서 그 마음을 비워 남을 받아들인다. 마음을 비운다(虛中)는 것은 나의 사사로움이 없는 것이다. 마음에 사사로운 주장이 없다면 무엇에서나 느껴서 통하지 않음이 없다.”하였다.
“말하는 것이 네 마음에 거슬리면 반드시 도(道)에서 찾아보고, 말하는 것이 네 뜻에 공손하면 반드시 도(道)가 아닌 것에서 찾아야 한다.” 이는《서경》〈상서(商書) 태갑(大甲)〉에 기록된 이윤(伊尹)의 말이다.
부열(傅說)이 고종(高宗)에게 말하기를, “나무를 자를 때는 먹줄을 따르면 바르게 되고, 임금이 간언(諫言)을 좇으면 성군(聖君)이 되는 것입니다. 임금이 지극히 성스러우면 신하들은 명령하지 않아도 그 뜻을 받들 것이니, 누가 감히 왕의 아름다운 명령을 좇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잘못을 바로잡는 말<법어(法語)>을 좇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잘못을 고치는 것이 소중하다. 완곡하게 일러 주는 말<손언(巽言)>을 즐거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뜻의 실마리를 찾아보는 것이 소중하다. 즐겨 하면서 실마리를 찾지 아니하고, 좇는 체하면서 고치지 않는다면 나도 어찌할 수 없을 따름이다<논어(論語)>.”하였다.
이에 대해 주자(朱子)가 설명하기를, “법어(法語)라고 한 것은 바로잡는 말이고, 손언(巽言)이라고 한 것은 완곡하게 지도하는 말이다. 바로잡는 말은 사람이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좇는다. 그러나 행동을 고치지 않는다면 겉으로만 좇는 척할 뿐이다. 완곡하게 일러 주는 말은 귀에 거슬리는 것이 없으므로 반드시 즐겨한다. 그러나 그 말뜻의 실마리를 찾지 않는다면 또 그 은미(隱微)한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 없을 것이다.”하였다. <율곡 이이 선생, ‘성학집요(聖學輯要)’에서>.
한편 지혜의 대명사 솔로몬은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명철(明哲)이니라.”(잠언 9장 10절). 우리가 바른말 하는 사람을 높이고 그의 간언을 받아들이는 것은 먼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하는 마음을 품는 데로부터 시작되고 이루어진다.
2025. 5. 2. 素澹
효종 1권, 즉위년(1649 기축 / 청 순치(順治) 6년) 7월 19일(병자)
유배지에 있는 원로 대신(백강 이경여 선생)을 가까운 곳으로 옮겨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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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돈녕부사 김상헌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이달 16일에 태백성이 해밑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일찍이 들으니, 태백은 서방의 기운인데 그것이 나와서 병(兵)과 상(喪)을 주장한다고 합니다. 별의 일은 사람마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감히 말할 수 있는 바도 아닙니다. 다만 지난 역사에서 징험한 바로 미루어 보면 실로 두렵습니다. 대행 대왕께서 보위(寶位)에 계실 때에도 해마다 이 변이 있었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금년에 이르러 갑자기 국상을 만나 온 나라가 상복을 입고 곡성이 조야(朝野)에 진동하였습니다. 하늘이 경계를 보이는 데는 분명한 징험이 있는 것인데 요즘 다시 무슨 잘못이 있어서 하늘의 상(像)을 보임이 이에 이르렀는지 모르겠습니다.
늙은 신이 죽지 않고 다행히 신화(新化)를 입게 되었는데, 덕음(德音)을 들을 때마다 감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워하며 덕화(德化)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자 하여 한 가지 일이나 한 마디 말이 혹시라도 인정에 어긋나서 출진(出震)의 밝음135) 에 흠이 되게 하지나 않을까 마음속으로 항상 염려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하늘도 굽어 살피고 있는 바입니다. 신이 듣건대, 음양의 두 덕이 정(政)과 형(刑)에 붙어 있으며 각각 같은 유(類)로써 호응하는 것이므로 성신(星辰)에 변이 있을 경우 닦는 도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니, 이번 성변(星變)이 일어난 것도 진실로 이에서 나온 것인 듯합니다.
대체로 벌이 그 죄에 맞지 않으면 무슨 일인들 잘못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신하가 지극히 원통한 마음을 품는 것이 바른 말을 했다가 죄를 얻는 것보다 심한 것이 없고, 하늘이 임금에게 노하는 것도 바르게 간하는 신하를 죄주는 것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이렇게 한 임금이 이루 다 손꼽을 수 없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우리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는 하늘을 공경하는 데 부지런히 하시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 밝게 살피시어 구언(求言)하시는 데는 오히려 널리 하지 못할까 염려하고 허물을 고치는 데는 오히려 인색하지나 않을까 염려하셨으며, 노해야 할 자에게 온화하신 얼굴로 대해 주시고 귀에 거슬리는 말을 겸손한 마음으로 들으셨습니다. 이에 20년 동안 어지신 명예와 은혜로운 정사가 간책(簡策)에 넘쳐 흐르니, 어느 누가 공경하며 우러러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마침 언관(言官)의 직책에 있는 이응시(李應蓍)라는 자가 미천한 몸으로 세상에 드문 지우(知遇)를 입은 것도 헤아리지 않고 한번 봉장(封章)을 올리어 거듭 천노(天怒)를 돋우다가 2천 리 밖으로 귀양갔는데, 된서리가 내리고 눈이 쌓이는 추운 땅에서 곧 죽게 되었다 하므로 원근의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서 가련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대행 대왕께서도 뉘우치는 마음이 계셨을 것이나 다만 성명(成命)을 내리지 않으셨을 뿐입니다. 지성으로 임금을 사랑한 이경여나 일을 만나 거리낌없이 말한 홍무적과 심노에 있어서도 그들의 말을 죄줄 수 없을 뿐만이 아닙니다. 그 마음이 나라를 위한 생각 이외에는 다른 뜻이 없었다는 것을 온 세상에 말하지 않는 이가 없고 또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대체로 왕자(王者)의 정사는 반드시 인심을 순응(順應)하는 것으로 우선을 삼아야 하니 인심이 어떠한가를 보아서 하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이 듣건대, 근일 상서한 자가 이 몇 사람을 가리켜 말했다 하니 인심의 향배를 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양암(諒闇)이 시작되고 만기(萬機)가 몰리는 이때를 당하여 이런 말을 올리는 것이 슬픔 속에 계시는 성상께 더욱 심기를 어지럽혀 드리는 것이 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신이 삼가 보건대 하늘의 마음이 기뻐하지 않아 견고(譴告)가 끊이지 않으니, 실로 하늘이 노여움을 품은 바가 과연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극한 우려를 견딜 수 없어 망령되이 의견을 진달하오니, 바라건대 성명께서 살펴주소서.”하니,
답하기를,
“내가 즉위한 뒤로 한 달이 넘도록 장마가 계속되었는데 또 성변(星變)이 생겼으니, 하늘이 나를 사랑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하늘의 마음에 맞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두려워 떨리고 불안함이 엷은 얼음을 밟고 깊은 물에 임한 것 같을 뿐이 아니어서 처신할 바를 몰랐는데 경의 경계하는 가르침이 이처럼 곡진하고 간절하니 원로 대신의 계책을 따르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는가. 내가 감히 그들을 완전 석방(釋放)할 수는 없으나 모두 양이(量移)하겠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5책 381면
[註 135]밝음 : 선왕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이가 조심해 몸을 닦고 반성해서 종묘 사직을 잘 지키는 것. 《주역(周易)》 진괘(震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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