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님

격에 맞게 대우하라

jookwanlee 2025. 3. 15. 23:13

서하 이민서 선생 간찰

격(格)에 맞게 대우하라

 

남에게 유익한 충고를 할 때에는 반드시 상태방의 격(格)과 수준을 알아보고 이에 걸맞게 알맞은 때에 알맞은 방법으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충고하는 나에게 반감을 가지고 나를 해칠 수도 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태복음 7장 6절).

 

“지피지기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란 말이 손자병법에 나오는데, 그 의미는 “상대방을 알고 나를 알아야 그와 백번을 다투어도 그로인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약도 병에 맞지 않으면 오히려 해롭다. 아무리 좋은 옷도 자기 몸에 맞지 않으면 불편하고 어색하며, 넓은 집도 내게 필요 이상의 공간은 거추장스럽고 부담스럽다. 매사는 자신의 분수(分數)와 추구하는 바와 이상(理想)에 맞아야 한다.

모든 사물이나 사람에 대응할 때는 상대방의 격(格)과 수준을 먼저 파악하고 그에 알맞게 대응해야 비로소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 올 수가 있다.

 

이조판서, 문형 대제학 등을 역임한 서하 이민서 선생의 졸기(卒記)에 이르기를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이민서(李敏敍)가 졸(卒)하였는데, 그는 성품이 강명(剛明) 방정(方正)하고, 간묵(簡默) 정직(正直)하였으며, 조정(朝廷)에 있은 지 30 년에 여러 번 사변(事變)을 겪었으나 지조(志操)가 한결같았고, 직위(職位)가 총재(冢宰)에 이르렀으나 문정(門庭)은 쓸쓸하기가 한사(寒士)와 같았으며, 한결같이 청백(淸白)한 절개는 처음에서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라는 대목이 있다.

 

그는 이조판서와 문형 대제학이란 권한 있고 영예로운 자리에 있었으나 그 자리의 격(格)을 잘 알고 권력을 남용하지 않도록 부정부패가 일어나지 않도록 사욕(私慾)을 버리고 바르게 처신하며 지냈기에 이런 영광스런 졸기를 조선왕조실록에 남길 수가 있었다.

 

2025. 3.16. 素澹

 

서하 이민서(李敏敍) 선생 졸기(卒記)

숙종 14년(1688년) 2월 2일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이민서(李敏敍)가 졸(卒)하였는데, 나이 56세였다.

이민서는 고(故)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의 아들인데, 〈성품이〉 강명(剛明) 방정(方正)하고, 간묵(簡默) 정직(正直)하였으며, 조정(朝廷)에 있은 지 30 년에 여러번 사변(事變)을 겪었으나 지조(志操)가 한결같았고, 직위(職位)가 총재(冢宰)에 이르렀으나 문정(門庭)은 쓸쓸하기가 한사(寒士)와 같았으며, 한결같이 청백(淸白)한 절개는 처음에서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문장(文章) 또한 고상하고 건아(健雅)하여 온 세상의 추앙(推仰)을 받는 바가 되어, 국가(國家)의 전책(典冊)도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다. 매양 매복(枚卜)6134) 할 때를 당하면 그 당시에 의논하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아무를 두고 그 누가 되랴?’ 하였다.

임금이 그의 강직(剛直)하고 방정(方正)한 것을 꺼려하여 그다지 우악(優渥)하게 총애(寵愛)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들어와 정승이 되지 못하였다. 이에 이르러 시대의 일에 근심이 많은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는 근심과 번민이 병이 되어 졸하였다. 조야(朝野)에서 슬퍼하고 애석해 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며, 비록 평일에 서로 좋아하지 않았던 자라도 정직(正直)한 사람이 죽었다고 말하였다. 그 뒤에 문간(文簡)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영인본】 39책 121면【분류】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