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여 깨어나라
“천하의 일이란 모두 은미(隱微)한 데를 따라 나타나고 작은 것이 모여 큰 것을 이루게 되는 것인 만큼 은미할 적에 막고 조짐이 있을 때 끊어야 하니, 반드시 그 시초(始初)를 삼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싫어하지 않으면서도 엄하게 하고 신중히 하여 작은 잘못도 흘려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위는 1650년 효종 1년 7월 3일 백강 이경여 선생이 효종대왕에게 올린 상차문(上箚文)의 일부이다.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전체주의·공산주의 세력의 침투로 인하여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롭게 된 근저에는 지난 날 자유우파의 집권시절에 마음이 해이해지고 사욕에 빠져서 사악한 무리들의 움직임을 그 시초에 막는 일을 소홀히 하면서 지내다가 이 악의 무리들의 외국의 악의 무리들과 합세하여 나라의 주요기관들을 거의 다 장악하게 된 데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도우심으로 우리나라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나오게 되고 미국에서는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 집권하게 됨으로 사악한 무리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다시 정상화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령을 발포한 것을 내란죄 운운하며 윤석열 대통령을 탄핵하는 심판을 하면서 이 비상계엄령 발포의 가장 주된 원인인 부정선거에 관한 증인이나 증거의 채택을 모조리 기각하면서, 헌법재판소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는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이 중대한 기로에서, 이제는 온 국민이 나서서 이런 불의한 헌법재판소를 향하여 큰소리로 그들을 탄핵하고 제정신이 나도록 세차게 나무라야만 한다. 헌법재판관들이 국민이 두려워서 악의 길에서 선의 길, 정의의 길로 돌아오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두 동강이 나고 유례가 없는 국가적인 혼란의 상태에 빠져 침몰하게 될 것이니, 이제는 모든 국민이 반드시 깨어나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지금은 하나님이 우리 국민에게 행동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때(KAIROS)’이다. 우리가 이때를 놓치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잊지 말자.
2025. 2. 8. 素澹
“천명(天命)은 믿기 어려운 것이며 인심(人心)은 떠나기 쉬운 것입니다. 하늘은 높이 위에 있으나 매우 분명하게 관찰하고 있으며 백성은 아래에 있으나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령스러운 존재입니다. 임금의 한 마음은 그 기미(幾微)가 매우 은미하지만 선악(善惡)의 효력은 그림자와 메아리보다도 빠르며, 일상 행동이 지극히 비근한 것이라 하더라도 추기(樞機)의 발동은 천지(天地)를 감동시키기까지 하니, 감응(感應)의 이치는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기분 좋게 하는 말이 있거든 비도(非道)가 아닌지 돌아보고 감정이 상하는 말이 있거든 도(道)가 아닌지 살펴보라.’는 말이야말로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제일의 묘방(妙方)이고, ‘임금된 것이 즐거운 게 아니라,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즐겁다.’고 한 것이야말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라를 망친 변함없는 길입니다. 따라서 이런 병통을 다스리려고 한다면 다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역상(易象)의 ‘분함을 경계하라.’고 한 말과 정자(程子)의 ‘노여운 일을 당했을 때에 노여움을 잊고 시비(是非)를 관찰하여 다스리라.’는 교훈이야말로 유부(兪跗)와 편작(扁鵲)의 절묘한 비결입니다.」
“용렬한 임금은 물론이고 명철한 임금이라고 불리어지는 자들도 옛 성인(聖人)의 글을 배우고 터득하여 이치로써 자기 욕심을 이기지 못하면 나라가 망하고 자신도 죽는 화를 면하는 경우가 드물어 용렬한 임금과 똑같이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천하의 일이란 모두 은미한 데를 따라 나타나고 작은 것이 모여 큰 것을 이루게 되는 것인 만큼 은미할 적에 막고 조짐이 있을 때 끊어야 하니, 반드시 그 시초를 삼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싫어하지 않으면서도 엄하게 하고 신중히 하여 작은 잘못도 흘려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나타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그 감정이 나타나되 모두 절도(節度)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고 하였고, ‘중화(中和)에 이르면 천지가 제 자리를 잡고 만물이 발육된다.’고 하였습니다. 항상 경외(敬畏)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남모르는 깊고 은미한 곳에서의 행동을 두렵게 여기고 경계하여 천리(天理)를 확충하고 덕성(德性)을 함양해 가는 이것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중[未發之中]이요, 안도 없고 바깥도 없으며 보내는 것도 없고 맞아들이는 것도 없이 확연대공(廓然大公)하여 사물(事物)이 닥쳐오면 순리대로 응하는 이것이 이미 나타난 화[已發之和]입니다.”
효종실록 > 효종 1년(1650년) > 효종 1년 7월 > 효종 1년 7월 3일
효종 4권, 1년(1650 경인 / 청 순치(順治) 7년) 7월 3일(갑인) 2번째기사
영의정 이경여가 신하의 간쟁·당파의 폐해·유생의 친유에 대해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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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 이경여(李敬輿)가 상차하기를,
“하늘의 재이(災異)와 사물에 나타나는 변고가 어느 것인들 재변이 아니겠습니까마는, 가뭄으로 곡식 싹이 말라죽고 황충이 뿌리를 갉아먹고 있으므로 백성의 양식이 떨어져 생민(生民)이 남김없이 죽고 말 형편이 되었으니, 오늘날처럼 절박하게 피부에 와 닿는 때가 어찌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성상께서 왕업을 이으신 기원(紀元)의 해에 명(命)을 바루고 길하게 하고 밝게 할 때를 당하여 의(義)를 행함에 잘못이 없고 덕택(德澤)이 더해 가고 있는데도 천심(天心)이 기쁘게 여기지 않고 거듭 재해(災害)만 내리니, 마치 말세의 어지러운 나라가 망해가는 때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온 나라 사람의 의혹이 더욱 심해지고 있으니 우러러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론을 들어 보건대 다들 ‘전하께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돌보며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비에게 예우하며 간언을 받아들이고 직언을 용납하는 정성이 보위에 오르시던 처음보다 점점 못하니, 어쩌면 위란(危亂)의 지경에 이르지나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아, 하늘을 공경하되 혹시라도 상제(上帝)를 대하듯이 하는 마음에 틈이 있게 되면 덕이 순수하게 되지 못하고 백성을 보살피되 혹시라도 다친 사람 보듯이 하는 마음에 부족함이 있으면 인(仁)이 확충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비를 예우하되 처음처럼 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利害)에 마음이 흔들리고 세속의 의론에 본심을 빼앗겨서 그런 것이고,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고 직언을 용납하되 시원스럽게 수용해야 하는 도리에 부끄러운 점이 있는 것은 성상의 도량이 확충되지 않고 사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아, 천명(天命)은 믿기 어려운 것이며 인심(人心)은 떠나기 쉬운 것입니다. 하늘은 높이 위에 있으나 매우 분명하게 관찰하고 있으며 백성은 아래에 있으나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령스러운 존재입니다. 임금의 한 마음은 그 기미(幾微)가 매우 은미하지만 선악(善惡)의 효력은 그림자와 메아리보다도 빠르며, 일상 행동이 지극히 비근한 것이라 하더라도 추기(樞機)의 발동은 천지(天地)를 감동시키기까지 하니, 감응(感應)의 이치는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근래의 일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서쪽 이웃에서 힐난하는 말을 하자 온 나라가 어쩔 줄 몰라 했으나 성덕(聖德)은 이지러지지 않았고 뭇 신하들은 화목하였으며, 입대(入對)하고 영준(英俊)을 연방(延訪)함에 한 집안 식구처럼 뜻이 합치되어 나랏일을 의논할 때 형세가 같은 배를 탄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벽력과 같은 임금의 위엄이 한번 진동하자 기상(氣象)이 갑자기 변하여 말씨는 화평(和平)을 잃고 일은 상리(常理)에 어긋나 귀양 보내는 형벌이 갑자기 잠깐 사이에서 나오고 말았습니다.
임금은 날이 갈수록 억세어지기만 하고 신하의 도는 이루어지지 못한 결과 상하가 통하지 않게 되어 비색(否塞)한 형상이 이미 드러났습니다. 그리하여 말을 하고 조치하는 것들이 혹 인심(人心)에 어긋나고 항간의 논의를 비등하게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영합하여 구차하게 용납되려는 무리들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진출할 기회를 노리고, 염치와 절의를 지키며 스스로 아끼는 선비는 자취를 거두어 물러날 것을 생각하고 있으니, 장차 정직과 진실은 용납되지 않고 아첨하고 약삭빠른 자가 득세하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마음에 반성해 보시고 물정(物情)을 굽어 살펴보시면, 사기(士氣)가 꺾이고 상하여 입 다물고 말하지 않고 있는 진상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부터 저절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 이전(二典)·삼모(三謨)의 훈계가 어느 것인들 귀감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기분 좋게 하는 말이 있거든 비도(非道)가 아닌지 돌아보고 감정이 상하는 말이 있거든 도(道)가 아닌지 살펴보라.’는 말이야말로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제일의 묘방(妙方)이고, ‘임금된 것이 즐거운 게 아니라,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즐겁다.’고 한 것이야말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라를 망친 변함없는 길입니다. 따라서 이런 병통을 다스리려고 한다면 다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역상(易象)의 ‘분함을 경계하라.’고 한 말과 정자(程子)의 ‘노여운 일을 당했을 때에 노여움을 잊고 시비(是非)를 관찰하여 다스리라.’는 교훈이야말로 유부(兪跗)와 편작(扁鵲)의 절묘한 비결인데, 어찌하여 고황(膏肓)의 병에 시험해 보지 않으십니까.
옛날 용렬했던 임금이라 하더라도 모두 조종(祖宗)의 부탁을 받고 억조(億兆)의 군사(君師)가 되었는데, 누군들 제 몸을 손상하고 나라를 망하게 하여 천하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신세가 되고 싶어 했겠습니까. 다만 자기 한 몸의 사심을 참아내지 못하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군상(君上)으로서 어떻게 신하에게 굴할 수 있겠는가.’ 한 나머지 뇌정(雷霆)과 같은 임금의 위엄을 가지고 사람에게 포학을 부려 신하들이 감히 대들지 못하게 하면서 한 때의 쾌감을 맛보았을 뿐 후환(後患)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용렬한 임금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명철한 임금이라고 불리어지는 자들도 옛 성인의 글을 배우고 터득하여 이치로써 자기 욕심을 이기지 못하면 이런 화를 면하는 경우가 드물어 똑같이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화(重華)292) 가 자기의 사욕을 버리고 남의 선을 취하고, 대우(大禹)가 훌륭한 말에 절을 하고, 성탕(成湯)이 간언(諫言)을 어기지 않은 것을 가지고 후세에서 법으로 삼고 백왕(百王)의 준칙(準則)으로 삼는 이유인 것입니다. 전하께서 지난 일을 점검하고 스스로 반성해 보실 때, 과연 제대로 치(治)와 도(道)를 똑같이 해서 세 성인(聖人)에게 부끄러움이 없다고 여기십니까. 남들이 아는 곳은 혹 말해 줄 수도 있겠지만 남이 모르는 곳에 있어서는 더욱 깊이 살피셔야 마땅합니다.
아, 왕자(王者)는 임금 자리에 나아가서 하늘의 섭리를 본받아 도를 행하는 것입니다. 북신(北辰)293) 이 제 자리를 잡으면 뭇 별들이 옹위(擁衛)하면서 각각 자신의 별자리를 지켜 안팎이 뚜렷이 구별되는데, 임금의 도에 있어서도 이와 아주 흡사합니다. 난의 계제(階梯)를 막으려면 반드시 궁금(宮禁)을 엄중히 해야 하고 공도(公道)를 넓히려면 반드시 개인적으로 통하는 길을 막아야 합니다. 임금은 구중궁궐 깊은 곳에 거처하여 아득히 홀로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싶어 하고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똑같은 사람의 심정이니, 어찌 귀하고 천함에 따라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정치를 잘 해보려는 임금은 반드시 복심으로서의 역할을 공경(公卿)에게 부탁하고 이목(耳目)의 기여를 대각(臺閣)에게 책임 지우는 것이니, 이 때문에 임금의 눈이 밝게 되고 귀가 통달하게 되어 겉과 속을 환하게 알게 됨으로써 조금이라도 사사(私邪)로운 누(累)가 그 사이를 교란할 수 없게 되는 동시에 궁(宮)과 부(府)가 일체(一體)가 되어 나라가 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난을 부르는 임금은 반드시 이와는 정반대의 방법을 취하며 다른 사사로운 길에 맡겨버리고 맙니다. 그럴 경우 그들은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와 중요하지도 않은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가지고 먼저 임금의 마음을 시험하여 동태를 관찰한 다음, 얕은 데에서 깊은 곳으로 점점 들어가 일단 으슥하고 음침한 소굴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뒤에는 간사하고 편벽된 길을 잇따라 열어 흑백(黑白)을 가리지 못하게 혼란시킴으로써 임금의 귀를 현혹케 하는데, 이렇게 되면 시비(是非)와 형상(刑賞)을 암암리에 자신이 주장하는 바대로 하는 형세가 자연히 이루어지면서 나라도 이에 따라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도 역대(歷代)의 득실(得失)을 살펴보시면 반드시 이 두 가지에 대해 개연(慨然)한 느낌이 들면서 경계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천하의 일이란 모두 은미한 데를 따라 나타나고 작은 것이 모여 큰 것을 이루게 되는 것인 만큼 은미할 적에 막고 조짐이 있을 때 끊어야 하니, 반드시 그 시초를 삼가야 하는데, 싫어하지 않으면서도 엄하게 하고 신중히 하여 용서하지 말아야 합니다. 속으로 분류해 본다면 어찌 근습(近習)뿐이겠습니까. 정로(正路)를 말미암지 않는 것은 모두 곡경(曲徑)인데, 나라에 화를 끼치는 방법은 시대마다 각각 다릅니다. 전하께서 표준을 세우고 왕위를 바루시어 솔선수범하여 아랫사람들을 부리고 계시는데 궁액(宮掖)과 외사(外舍)가 동떨어진 상황에서 보잘것없는 신이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진정 지나친 염려일 수도 있습니다만, 온수(溫樹)294) 에 대한 말이 혹 외간에 전파되면 낙함(落函)의 폐단이 금내(禁內)에 깊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상의 마음이 일단 바루어지게 되면 바깥의 간사한 자가 진출을 구할 길이 없게 될 것이니 순수한 지치(至治)의 기반이 실로 여기에서 마련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이 못내 일에 앞서 누누이 말씀드리는 까닭은 생각이 혹 해이해져 문호(門戶)의 빗장이 열리게 될 경우 신과 같은 사람이 1백 명이 있어 아무리 힘을 다해 두루 방어하고자 하더라도 모든 물줄기가 바다를 쏟아져 들어가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되어 어찌할 수 없게 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아직 서리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얼음이 얼까 걱정하는 것이 망발인 듯도 싶습니다만, 한 번 더 내다보고 성찰을 하신다면 그래도 조금의 도움은 될 것입니다.
아, 옥백(玉帛)의 예의를 갖추어 어진 이를 부르는 것은 명철한 임금이 먼저 해야 할 바입니다. 그러므로 선묘조(宣廟朝) 때에는 제일 먼저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과 일사(逸士)인 성운(成運)·조식(曺植), 그리고 그밖에 이항(李恒)·민순(閔純) 등을 불러서 대관(大官)으로 높여 주기도 하고 대간에 배치하기도 했으니, 그들의 뜻을 끝까지 펴도록 해 주지는 못하였더라도 크게 하려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의 조정 풍채(風采)는 태평시대를 훌륭하게 이룰 여건이 조성되었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다가 우리 선왕조(先王朝)에 이르러서는 시사(時事)가 어지러워 온갖 일들에 겨를이 없었습니다만, 궁정(弓旌)295) 을 사방으로 내보내어 지성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하여 초야에서 덕을 기르던 선비인 김장생(金長生)·장현광(張顯光)과 같은 이들이 비록 늙은 관계로 서울에 오래도록 있을 수는 없었지만 융숭하신 은총과 특별한 예수(禮數)는 시종일관 변하지 않았는데, 그들의 언론과 궤범을 조야(朝野)가 법으로 취할 수 있었으니, 두 분 성왕(聖王)께서 유사(儒師)를 높이고 도학(道學)을 중히 여기신 뜻이야말로 어찌 후사(後嗣)로서 마땅히 본받을 바가 아니겠습니까.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겨우 등려(滕廬)296) 에서 나와 은명(殷命)을 두지는 못하고 계십니다만, 2, 3명의 석사(碩士)를 모두 좌우에 두고 정치의 방도를 묻고 고문(顧問)에 응하게 함으로써 선왕의 뜻을 따르고 계시므로 장차 전공(前功)이 많게 될 것이기에 온 조정이 매우 기뻐하는 등 세도에 희망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서쪽지방의 사정이 창황해져서 사기(事機)가 한번 변하자 어진 사람을 못 가도록 잡아둘 수가 없게 되어 조정이 쓸쓸해졌으니 말을 하자니 분하고 슬프기만 합니다.
아, 상서로운 기린과 봉황을 평지를 달리는 데 쓰면 마소에도 못 미칠지 모릅니다. 그러나 태산(泰山)과 교악(喬嶽)은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없어도 저절로 공리(功利)의 효과를 나타내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어진 사람을 쓰는 것이 효과의 면에서 어찌 보탬이 작다고 하겠습니까. 성상께서는 더욱 유념하시어 예우를 극진히 해서 불러 오시고 사욕을 극복하여 그들의 뜻에 따르소서. 그리고 경악(經幄)에 불러 두고서 그들에게 많은 말씀을 듣고 조론(朝論)을 참고하면서 전하의 잘못을 보완하소서. 그러면 성상의 덕이 반드시 증진되는 바가 있을 것이며, 조정의 정치에 반드시 유익한 바가 있을 것이며, 그리고 사림(士林)에도 모범을 삼을 바가 있을 것이며, 정신(廷臣)에게도 공경하고 꺼리는 바가 있게 될 것이니, 국가에 보탬이 되는 점이 결코 작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에 진출한 자는 조정에 한 사람도 있지 않으니, 《시경》 치의(緇衣)의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신을 시종 돈독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2, 3명의 신하는 모두 산번(山樊)에서 도(道)를 지키고 임하(林下)에서 경(經)을 궁구하면서 갈포옷을 입고 보옥(寶玉)을 간직한 채 깊이 숨겨두고 팔지 않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모유(謨猷)와 경제(經濟)에 대해서는 참으로 논할 겨를이 없습니다만, 그들의 표치(標致)를 말하더라도 충분히 탐오한 자들을 격동시켜 깨끗하게 만들고 풍속을 격려할 수 있을 것이니, 세간의 작록(爵祿)만을 중히 여기고 명의(名義)를 가볍게 여기는 속자(俗子)들과는 비교하여 의논할 차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일종의 의논들은 심지어 범승(范升)을 비난하고 장해(張楷)를 책망하듯297) 하는 자가 있기까지 하니, 풍속의 흐름과 세도의 무너짐이 또한 깊이 개탄할 만합니다. 이점은 성상께서 더욱더 생각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아, 붕당(朋黨)이 나라를 병들게 한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의 사대부로서 그 누군들 붕당이 증오스럽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마는, 모두 색목(色目)으로 돌아감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사람들 모두가 꼭 당론(黨論)을 숭상하여 스스로 편벽한 데에 빠져서가 아닙니다. 혹 부형(父兄) 때의 찌꺼기를 이어받거나 혹 벗들의 인정을 받다 보면 그렇게 되는 것인데, 한번 이렇게 구별이 되고 보면 그 구덩이에서 몸을 빼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드뭅니다. 그런데 남의 안색을 살펴보고 남에게 농락을 당하면서 진취(進取)를 꾀하는 자가 아니라면 시비(是非)를 구별하고 부끄럽게 느끼는 천심(天心)이 어찌 전혀 없겠습니까. 하지만 논의하는 사이에 한번 적치(赤幟)를 세우게 되면, 우뚝 서서 단독으로 행하는 선비가 아닌 이상, 바람에 쏠리듯 그림자가 따르듯이 하지 않는 자가 없이 피차간 모두들 그러합니다. 이는 대개 모두들 70년간 대대로 전해 온 여론(餘論)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인데, 따라서 옛날의 붕당처럼, 군자는 붕(朋)을 만들고 소인은 당(黨)을 만들던 것과는 틀립니다.
부형과 자손에 있어 어질고 어질지 못함이 똑같지 않은데도 전후로 다투는 것은 한결같이 전철(前轍)을 따르고 있는데, 이점이 바로 인물의 현우(賢愚)가 그 사이에 서로 뒤섞여 있으면서 잘못된 논의가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는 이유인 것입니다. 붕(朋)을 대립하게 한 뒤부터는 표방(標榜)한 바가 매우 많아 그것을 하자면 또한 추해서 다시 거론하고 싶지도 않은데, 그 사이에 사대부 중에도 명목(名目)이 다름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계해년에는 명신(名臣)과 석사(碩士)들이 각자 영수(領袖)를 두어 선조(先朝)의 지극한 덕을 우러러 본받아서 논의가 서로 통하고 매우 밀접하게 합치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재주나 한 가지 예능을 가지고 있어도 모두 수록(收錄)되었으므로 진신들이 서로 기뻐하며 오래도록 보존될 수 있다고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둘 사이에 진출만을 꾀하는 부박(浮薄)한 무리들이 있어서 한편으로 시배(時輩)들에게 아부한다고 하고 한편으로 자기의 주장을 버리고 저편의 주장을 위해 나간다고 하면서 말을 만들어 내고 비방을 하며 서로 선동을 하였습니다. 다행히 노숙하고 명철한 제공(諸公)들이 진정시키고 억제한 덕택으로 궤멸되는 정도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나, 그 뒤로는 언론(言論)이 옳을 때도 있고 그를 때도 있었으며 용사(用舍)가 공적일 때도 있고 사적일 때도 있는 등 들쭉날쭉하여 가지런하지 못한 채 상호간에 득과 실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을해년에 이르러서는 종사(從祀)에 대한 주청이 관학(館學)에서 나옴으로 인하여 2, 3인의 제멋대로 구는 인사들이 현인을 무함하는 논의를 고무하고 선동하면서 붕류(朋類)를 앞장서서 거느리고 드러내놓고 배척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서로 공격하며 원수처럼 여기게 되었으니, 그 불행이야말로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종사에 대한 시비를 다툰 것일 뿐으로서 사람마다 각자 소견이 있어서 계미년의 나머지 수법을 이은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소의 유생(儒生)들로서 듣고 아는 자가 백에 한둘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논의한 것에 대해서야 깊이 허물로 삼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유직의 경우는 또 이것과는 다릅니다. 선정(先正)의 깊은 학술의 조예와 강론한 이기(理氣)의 미지(微旨)와 출처(出處)의 시비(是非)에 대해서는 유직이 알 바가 아닌 만큼 그것은 우선 버려두고 논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두 신하가 명현(名賢)이며 대유(大儒)로서 회재(晦齋)와 퇴계(退溪) 뒤를 그들밖에 계승할 자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유직도 들었을 것입니다. 임금을 버려두고 어버이를 뒤로 미루는 것이야말로 인륜의 큰 악행인데, 유직은 시골의 후생으로서 인륜의 큰 악행을 거론하며 조금도 거리낌 없이 감히 명현 대유에게 덮어 씌웠습니다. 가령 이런 큰 악행을 유직과 같은 자에게 조금 가했다 하더라도 그의 종족(宗族)이나 향당(鄕黨)에서 그와 교류하는 자들이 오히려 분연히 일어나 불평하면서 변명할 말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다사(多士)들이 존경하고 있는 두 신하와 같은 이가 터무니없는 망극한 무함으로 더럽힘을 당한 경우이겠습니까. 성균관 유생들이 그들의 이름을 유적(儒籍)에서 깎아낸 것이 어찌 당연하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다사(多士)들이 모인 뒤에 두루 물어 보지 않고 갑자기 그 이름을 유적에서 지운 것은 근거없는 처사로서 사람들의 말이 있게 된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악을 미워하다가 지나치게 된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먼저 나간 유생들은 이미 유직을 비난하는 상소가 내려졌는데도 억지로 의견을 달리하여 서로 앞장 서서 돌아가면서 유직의 논의에 붙는 것처럼 하였으니, 또한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는 유생들이 헤아려 생각했거나 계교한 것이 아니라 다만 분위기와 기습(氣習)에 이끌리게 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나간 자가 이미 갔고 보면 뒤에 나가는 자가 편히 있을 수 없는 것은 이치와 형세상 당연한 것입니다. 이는 중도에 어긋난 망령된 행동입니다만, 유생이라고 자처한 나머지 과격하게 행동하다 나온 광망(狂妄)된 행동이었으니, 어찌 꼭 심각하게 책망할 것까지 있겠습니까.
다만 유직의 일은 사문(斯文)에 관계된 것인 만큼 감히 경솔하게 논의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밖의 제생들에게는 특별히 예관(禮官)을 보내어 성지(聖旨)로 돈유함으로써 유감의 뜻과 분한 마음을 풀고 속히 함장(函丈)의 자리로 나와 다같이 경사를 함께하는 과거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렇게 하면 유생도 신하인데 어찌 감히 미혹된 마음을 다시 돌리지 않고 강하게 성상의 분부를 어기며 처음 즉위하신 해에 직접 치루는 큰 과거에 스스로 생경한 짓을 하겠습니까. 이상진(李象震) 등 3, 4명의 경우는 괴상하고 망령된 행동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지만 상소 속에 유직처럼 욕한 것은 없으니, 의당 유생들에게 전유(傳諭)하여 세척해 주게 함으로써 스스로 새롭게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것도 한 방법이겠습니다.
대개 선비들의 논의가 정해지지 않고 지금까지 시끄러운 것은 또한 성상의 넓은 도량으로 모두 받아들여 용인해 준 나머지 시비를 분명하게 가리려 하지 않은 데에 연유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두 신하의 어짐을 아시고 전교에 드러내셨으니, 유직처럼 현인을 미워하고 투기하며 욕하는 사람에게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분명하게 보이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학교(學校)의 극벌(極罰)로 다스려 사방의 선비들에게 성상께서 어진이를 본받으시는 뜻을 환히 알게 하신다면, 어찌 오늘날과 같은 분란이 있겠습니까. 이미 그렇게도 하지 못한 채 도리어 유직을 공격하는 자를 잘못이라 하고 유직의 편이 되는 자를 옳다고 하면서 그를 엄폐하는 전교까지 내리셨습니다. 이것이 비록 더러움까지도 용납하시는 성대한 덕이라 하더라도 임금으로서의 과단성 있는 정치에는 결함이 있는 듯합니다.
옛날 적신(賊臣) 정인홍(鄭仁弘)이 선정신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을 추악하게 헐뜯었기 때문에 당시 성균관 유생들이 그의 이름을 유적(儒籍)에서 지우고 부황(付黃)하여 그 죄상을 선포했습니다. 인홍은 그 뒤 윤기(倫紀)에 죄를 얻어 마침내는 방형(邦刑)에 복주(伏誅)되었습니다만, 당시의 명성과 지위는 유직에게 비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류(士類)가 일제히 분개하여 이런 극벌(極罰)을 베풀자 온 세상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겼는데, 그것을 그르게 여긴 자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유직을 부황하여 그 죄를 선포한 것이 어찌 유독 성균관 유생들의 깊은 죄가 된단 말입니까. 다만 그때가 적당한 시기가 아니었고 당초에 작정하지 않은 채 갑자기 죄의 등급을 더한 것이 지나쳤을 뿐인데, 유적(儒籍)에서 깎아내는 이외에 오직 부황이 있었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좨주(祭酒)의 계사(啓辭)에 ‘벌을 더했다.’ 한 것은 엄폐하려는 뜻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닌 듯합니다.
신은 세로(世路)에 잘못 나와 역시 지목(指目)의 대상이 되는 것을 면치 못했으나 성격이 본래 무기력해서 조정에 선 지 40여 년 동안 일찍이 눈을 부릅뜨고 담기를 부리면서 힘써 당론(黨論)을 주장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날에 와서는 나이가 70에 가깝고 부귀가 극도에 다다랐으므로 국사의 망극함을 만나지 않으려고 다만 조바심을 내며 오직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려 하고 있을 뿐입니다. 어떻게 차마 새로 진출한 연소배들과 더불어 논의를 좌우하고 친한 자들과 편당을 지어 군부(君父)를 기만하면서 스스로 평소의 본 뜻을 저버리겠습니까. 다만 의덕(懿德)을 좋아하는 것은 타고난 성품에서 나온 것으로, 두 신하의 훌륭한 점에 대해서는 평소 우러러 사모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성균관 유생들의 일로 인하여 특별히 수의(收議)하라는 명(命)을 내리셨으므로, 신의 간절한 정성을 다 드러내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아울러 본말(本末)을 언급하다 보니 말이 지리해졌으므로 두려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신면(申冕)은 명가(名家)의 자제로서 이른 나이에 관계에 진출하여 평탄하게 벼슬길을 밟아 스스로 현관(顯官)의 반열에 올랐는데, 권신(權臣)을 의지할 일이 무엇이 있기에 권문에 드나들면서 자취를 더럽혀 염우(廉隅)를 손상하는 짓을 하였겠습니까. 저들이 은근히 정성을 보여오자 그것을 받는 입장에서 예의상 응답해 주기 위해 혹 왕래하였다고 하더라도 어찌 그것을 심각하게 따질 것까지야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류(士類)들 사이에서 너무 지나치게 책망하고 언어가 전달되면서 소문이 너무 과하게 떠돌게 되었습니다. 이는 산림(山林)에 몸을 깨끗이 하던 선비로서는 본디 비루하게 여겼던 점일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부름을 입고 융숭한 예우(禮遇)를 받게 되자 감격한 나머지 격탁양청(激濁揚淸)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던 것인데, 마침내는 백간(白簡)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너무 엄하여 끝없이 사건이 확대된 결과 끝내는 찬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지나쳤다고 한다면 모르지만, 구원(丘園)에 있는 선비로서 어찌 일찍이 신면 등에게 쌓인 원망과 깊은 노여움이 있기에 고의로 죄에 빠뜨릴 계획을 하였겠습니까. 신면이 이미 성은을 입어 다시 가까운 반열에 통하게 되었으니, 산인(山人)의 본정(本情)도 헤아려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면의 도리로서는 위로는 성상의 은혜에 감사하고 아래로는 오랜 정분을 생각해서 침착하고 공평한 마음으로 대도(大道)에 함께 나아갔어야 할 것인데, 사직 상소를 올림에 있어 분한 감정에 휘말려 말을 만들고 뜻을 붙인 것이 실로 평온함을 잃었으니, 이것은 신면의 잘못입니다. 그러나 일단 역경을 만나서 화평함을 잃지 않는 것은 옛사람들도 어렵게 여기던 것입니다. 따라서 신면의 잘못이 어찌 대간(臺諫)의 평론을 다시 일으켜 그 관직을 파면시키는 데 이르기까지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이상진의 논은 너무 엄하지 않습니까. 노성(老成)하고 충박(忠朴)한 신하가 평생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공평하고 치우치지 않게 스스로 힘써 왔는데, 백발이 된 오늘날에 와서 세상에 무엇을 구하려고 고의로 의지하고 아부하는 태도를 지어 신면에게 예쁘게 보이려 했겠습니까. 그 뜻은 오늘날 조정이 안정되지 못한 것을 민망하게 여겨 진정시킬 계책을 세우려고 한 데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정 밖의 말로 함부로 곧장 배척하였습니다. 대각(臺閣)이 일을 논함에 있어 머뭇거리지 않고 곧바로 결단하는 것을 숭상한다고 하더라도 짐작없이 하는 말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대간을 너그럽게 용납하는 것은 언로(言路)를 위한 것인 만큼 특명으로 외방에 보임(補任)하신 것은 뒤폐단이 있을 듯합니다.
이성항(李性恒)이 좌천된 이유는 더욱 명백하지 않으니, 성명(成命)을 거두기를 청한 대간의 논의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목겸선(睦兼善)의 저격(狙擊)과 이수함(李守諴)의 위동(危動)은 목적을 갖고 취한 행동으로서 인심을 현혹시키려는 것이라서 공의(公議)가 허여하지 않은 것인데, 어찌 전적으로 당론(黨論)이라 하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이들에 대해서 무엇을 취하셨기에 잘못으로 여기지 않으십니까. 그들을 체직시켰으나 애당초 성상의 뜻이 아니었고 좌천시킨 것도 양쪽 모두 책벌을 가해야 된다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대성인이 하시는 일을 참으로 소인의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기는 하나 대공지정(大公至正)한 도리가 아니라는 의혹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전에 정시성(鄭始成)이 김종일(金宗一)을 탄핵한 일은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것이었는데, 전혀 실상(實狀)이 없자 고의로 다른 일을 거론하여 사람을 큰 죄에 빠뜨렸으니 이는 심술(心術)과 관련된 것인 동시에 당론(黨論)과도 연결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정상을 살피지 못하시고 노하셔야 할 데에 노하지 않으시어 우물쭈물 스스로 물러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삼사(三司)가 논한 것이 사리에 어긋나거나 사심을 행한 것도 아닌데, 여러 번 준엄한 비답을 내려 노하지 않을 데에 노하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그 자리에 편히 있을 수 없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모두 집착하는 병으로 말미암아 이렇듯 전도된 행동이 있게 된 것입니다. 전하께서 고요히 생각하시어 시비를 참되게 가리시면 진실로 밝은 성상의 조감(照鑑)에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신이 붕당(朋黨)에 대한 이야기를 앞서 대략 말씀드렸으니, 붕당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을 다 드릴까 합니다. 붕당의 화(禍)에 대한 처방은 투기하는 아내가 있는 집안을 바르게 해 나가는 방법과 같습니다. 수신(修身)·제가(齊家)의 근본 원리를 극진히 실천해 나가면 관저(關雎)298) 와 교목(喬木)299) 과 같은 교화를 앉아서 오게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하를 부리는 도에 있어서도 모범적으로 이끌어 가는 방도를 극진히 하면 서로들 귀감이 되어 공경하고 사양하는 풍조가 자연적으로 발생할 것인데, 따라서 옳은 것을 옳게 여기고 그른 것은 그르게 여기며 어진이를 어질게 여기고 악한이를 악하게 여기게 되어 성(誠)과 명(明) 양쪽이 모두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진이를 올려 주고 악한이를 내쫓음에 있어 한결같이 하늘의 법칙을 따르고 좋아하고 싫어하며 주고 빼앗음에 있어 자기의 사심을 참여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당을 만들고 붕을 만드는 일을 다 잊어버리는 것만한 것이 없는데, 양쪽을 다 잊으면 마음에 누(累)되는 바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기뻐하고 노여워할 때 거울에 비치는 물건처럼 대상에 따라 발하는 것이 최상이니, 그렇게 하면 나의 선입관이 개입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어진이를 천거하면 당(黨)이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 아닌가 의심을 가지게 되고, 악한이를 탄핵하면 자기와 당을 달리하기 때문에 공격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속이고 있지나 않나 하는 생각이 미리부터 성상의 마음을 얽매어 놓게 되는데, 마음속의 본체(本體)가 일단 가리워지게 되면 어떻게 툭 터진 마음으로 재결하고 처리하여 과(過)와 불급(不及)의 차이가 없을 수 있겠으며 거조마다 마땅함을 얻어 사방 백성의 마음을 열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틈을 엿보는 자들이 기교를 부리고 임금의 뜻에 영합(迎合)하는 자들이 자기의 편리를 도모하려고 하여 조용히 하려고 해도 더욱 시끄럽고 제거하려 해도 더욱 치성하게 되는 것이 요즘에 이미 나타난 현상이니, 뱃머리를 돌리고 수레 바퀴를 돌리는 일이 있지 않으면 시끄러움을 그치게 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것 역시 전하께서 삼무사(三無私)300) 의 공심(公心)을 받들어 궁궐에서부터 먼저 시행하여 친소(親疏)에게 한결같이 베풀어 안과 밖의 차이가 없게 한 다음에야 비로소 외정(外庭)을 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 천도(天道)가 지극히 참되기 때문에 만물이 모두 번성하고, 인주가 지극히 공평하게 하기 때문에 만민이 법으로 삼는 것입니다. 《서경(書經)》에 ‘서민(庶民)들이 사당(邪黨)을 두지 않고 관원들이 빌붙지 않는 것은 오직 임금이 표준을 세우기 때문이다.’고 하였는데,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나타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그 감정이 나타나되 모두 절도(節度)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고 하였고, ‘중화(中和)에 이르면 천지가 제 자리를 잡고 만물이 발육된다.’고 하였습니다. 항상 경외(敬畏)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남모르는 깊고 은미한 곳에서의 행동을 두렵게 여기고 경계하여 천리(天理)를 확충하고 덕성(德性)을 함양해 가는 이것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중[未發之中]이요, 안도 없고 바깥도 없으며 보내는 것도 없고 맞아들이는 것도 없이 확연 대공(廓然大公)하여 사물(事物)이 닥쳐 오면 순리대로 응하는 이것이 이미 나타난 화[已發之和]입니다.
하늘과 사람은 한 가지 이치로서 위와 아래가 간격이 없는 것이므로 나의 마음이 올바르면 천지(天地)의 마음도 올바른 것이며, 나의 기운이 순하면 천지의 기운도 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마음을 바루지도 못하고 또 기운을 순히 하지도 못하고서 천지의 마음을 돌려 중화(中和)의 복(福)을 이르게 하고자 한다면 이미 어렵지 않겠습니까. 하늘의 비가 내리려면 반드시 음양(陰陽)이 서로 조화되고 천택(川澤)의 수증기가 올라가서 더운 기운과 찬 기운이 서로 잘 화합하여야 단비가 쏟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라가 장차 다스려지게 하려면 반드시 군신(君臣)의 뜻이 서로 합치되어 태평하고 융화하며 큰 공도(公道)를 넓히고 지극한 이치를 잘 형성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서쪽 교외 하늘의 얇은 구름이 흡족한 비를 내린 적이 있지 않았으며, 교만하게 스스로 성인인 체하는 임금이 치도(治道)를 달성한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형세는 바로 추위에 엉겨 얼음이 얼고 바람이 차고 매서워서, 풀을 말리고 뿌리를 썩혀 살리려는 뜻을 볼 수 없게 된 것과 같습니다. 하늘에 대해 잘 말하는 자는 반드시 사람에게서 본받는 것인데, 항양(恒暘)의 허물이 어찌 그 조짐 없이 있게 된 것이겠습니까.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천지의 상도(常道)는 그 마음으로 운용되지만 만물(萬物)에 두루 미치는 데는 사심이 없으며, 성인의 상도도 그 정으로 이루어내지만 만사(萬事)에 순응하는 데는 사정(私情)이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천하에서 한 나라에 이르고 한 집에서 만사에 이르기까지 화합하지 못하는 이유는 모두 틈이 있기 때문이니, 틈이 없으면 화합하게 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마음을 비워 상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줌이 없으면서 신하들의 편벽됨이 없기를 바라시고, 큰 도량을 넓히지 못하고 의혹된 부분을 끊어버리지 못하면서 신하들에게 틈이 없기를 바라시니, 이는 선왕(先王)께서 평평탕탕(平平蕩蕩)한 왕도 정치를 펴시어 신민이 표준에 모이고[會極] 표준으로 돌아가게[歸極] 하던 방도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절의(節義) 있는 사람을 포상하여 높여 주고 노성(老成)한 선비를 법으로 삼는 것은 나라를 소유한 임금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영돈녕부사 김상헌(金尙憲)과 고 참판 정온(鄭蘊)의 높은 풍채와 준엄한 절의는 비록 일월과 빛을 다툰다고 해도 될 것입니다. 하늘이 한 늙은이를 남겨 놓아 영광전(靈光殿)처럼 높이 보이게 하였는데, 선조(先朝)에서 발탁하여 정승의 자리에 두었으며 성상께서도 남다른 은수(恩數)로 어진 이를 대우하시어 전대와 후대가 한 법을 쓰고 있으니, 두 사람에게는 서운한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공(潞公)301) 이 낙양(洛陽)에 살면서 대정(大政)을 참여하여 들었던 것은 송(宋)나라 조정이 늙은이에게 정사를 물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그 고사를 따르지 않으십니까. 정온에게는 봉작과 증직을 하여 충절을 표창하는 은전을 아직 빠뜨리고 있어서 떳떳한 법에 결함이 있으므로 지사(志士)들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악하게 조처하여 풍성(風聲)을 세우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원로(元老)에게 자문하여 숨은 덕을 드러내는 것 또한 어찌 재변을 그치게 하는 데 한 가지의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신은 만번 죽을 뻔한 뒤에 다시 대궐문에 들어왔고 죄수 속에서 일어나 금방 신이 앉을 자리가 아닌 정승 자리에 외람되게 앉아 있게 되었으니, 옛날부터 특이한 은총을 받은 자들을 헤아려 봐도 신에게 비교될 자는 드물 것입니다. 상의 은덕이 하늘과 같은데 보답해 드릴 곳이 없으니 참으로 어찌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의 구구한 본심으로는 그저 한 조정에 벼슬하고 있는 동료들과 성심을 다하여 서로 대우하고, 공경하고 협동하여 상호 면려하면서 친함과 소원함에 간격을 두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리하여 재능이 있으면 반드시 천거하고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바로잡고자 하였는데, 이런 마음으로 나라에 보답하면 거의 조그만 보탬이 되리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이 나의 마음과 같지 않고 세상이 날이 갈수록 더욱 어렵고 험해지면서 논의가 가닥이 많아지고 거짓말이 날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고 걱정스러운 것들이 눈에 가득하여 손을 댈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옛날의 통달한 재능을 갖춘 사람으로 하여금 이 일을 감당하게 하더라도 수많은 어려움을 두루 구제하여 성상의 마음에 맞게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더구나 신은 재능과 학식이 보잘것없고, 덕망과 실력이 모두 가벼워 위로는 군부(君父)에게 믿음을 받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료(百僚)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임금 마음의 잘못을 바로잡고 사리에 어긋난 일을 바루는 것에 대해서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뿐더러 일에 임하여 응당 해야 할 일도 허술하게 될까 걱정뿐입니다. 그리하여 복속(覆餗)의 재앙이 있을까 스스로 걱정하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시대를 구제하는 직책을 어떻게 감히 맡겠습니까.
아, 궁(宮)·상(商)·각(角)·치(徵)는 똑같이 조율(調律)된 적이 없었고 조(燥)·습(濕)·신(辛)·감(甘)은 각각 다른 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사광(師曠)이 거문고 줄받이를 돌면서 당기기도 하고 늘이기도 하여 소리를 조화하고 역아(易牙)가 손을 놀려 고루고루 섞어 맛을 내기를 기다린 다음에야 음악이 이루어지고 맛이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질장구를 치고 파잎을 불면서 육률(六律)을 의논할 수 있겠으며 풀뿌리를 씹고 나물을 먹으면서 어떻게 오미(五味)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차마 곧장 떠나지 못하는 것이 임금을 향한 간절한 정성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나라의 일을 잘못되게 하고 정사를 어긋나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헤아려 분명하게 처신하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차본(箚本)을 이미 갖추어 놓고 바야흐로 재(齋)가 파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에 삼가 정원에 내린 전교를 보건대, 성인(聖人)의 뉘우치는 마음이 가을바람이 불어오기도 전에 싹텄고 자신의 책임으로 돌려 책하시는 것은 우(禹)임금이나 탕(湯)임금보다도 훨씬 뛰어나셨습니다. 어찌 하늘의 노여움만 돌리고 백성의 심정만 위로해 줄 뿐이겠습니까. 국세가 힘차게 발흥할 것을 눈을 비비고 기다릴 수 있게 되었으므로 신은 진실로 우러러 기뻐하면서 큰 소리로 두세 번이나 외웠습니다.
추구(芻狗)와 토저(土苴)처럼 쓸모없는 신이 어찌 임금의 뜻에 만분의 일인들 응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깜박이는 반딧불도 혹 조림(照臨)하는 밝은 빛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말발굽에 고인 얕은 물도 크나큰 하해(河海)를 이루는 하나의 물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신이 조목별로 진달한 어리석은 말도 재변을 그치게 하는 데에 혹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성상께서는 유의하소서. 나라에 재해가 있을 경우 재상(宰相)을 책면(策免)한 고사(故事)가 있는데, 이치로 볼 때 또한 당연한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의 직명(職名)을 파면하시어 하늘의 꾸지람에 답하시고 어질고 덕망 있는 인재를 다시 뽑아서 이 어려운 때를 구제하소서.”하니,
답하기를,
“경의 차자를 살펴 보건대 정원에 내린 교지를 큰 소리로 두세 번 외웠다고 하였는데,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교차함을 느꼈다. 몸에 돌려 허물을 반성해 보니 망연자실하여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말 한마디 글자 하나인들 감히 소홀히 하겠는가. 내가 띠에 써놓고 언제나 마음을 가다듬는 자료로 삼겠다. 더구나 요즘 어수선한 사단들은 참으로 내가 근본을 바루는 데로 잘 인도하지 못하고 그 끝을 다스리려 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니, 참으로 이른바 성색(聲色)의 말단인 것이라고 하겠다. 나의 과실이 여기에서 더욱 드러났으니 앞으로는 상하가 마땅히 그 본원으로 돌아가서 화목과 협동에 힘써야 할 것이다. 각자 유신(惟新)해서 마음과 힘을 한 가지로 한다면 어찌 나라의 복만 되겠는가. 실로 공경 자손들이 만세토록 누리는 복이 될 것이다.
유생(儒生)을 권유하자는 논의는 깊이 내 뜻에 맞는다. 특별히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즉시 돈독히 유시하게 하라. 그러면 제제(濟濟)한 아름다움이 있게 될 것이다. 요즈음 산림(山林)의 선비들이 오히려 나를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을까 두려운데, 내가 어찌 다른 뜻을 두었겠는가. 처음을 이어가지 못한다는 탄식은 내 마음에 깊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또한 근시(近侍)를 시켜 나를 대신하여 교시를 초하게 하면서 선뜻 올라오게 되기를 기대하였다. 그런데 경(卿)이 왜 이렇게까지 사직하는가. 지금 이처럼 가물고 황충이 발생한 것은 전적으로 내가 어리석어 하늘에 죄를 얻었기 때문에 내려진 재앙이니, 나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경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경은 사직하지 말라. 그리고 또한 나를 같이 일할 만한 자격이 없다고 하여 버리지 말고, 날마다 소장을 올려 숨김없이 직언(直言)을 하여, 나로 하여금 선(善)한 데로 옮겨 가고 허물을 고칠 수 있게 하라.”하였다.
【조선왕조실록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5책 439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법-탄핵(彈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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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292]중화(重華) : 순임금.
[註 293]북신(北辰) : 북극성.
[註 294]온수(溫樹) : 한 무제 온실전(溫室殿)의 나무, 즉 궁중의 일.
[註 295]궁정(弓旌) : 현인을 초빙할 때 쓰던 예물.
[註 296]등려(滕廬) : 여막.
[註 297]범승(范升)을 비난하고 장해(張楷)를 책망하듯 : 범승은 한 무제(漢武帝) 때의 박사(博士)로 한흠(韓歆)이 《비씨역(費氏易)》과 《좌씨춘추(左氏春秋)》의 박사(博士)를 두자고 건의하자 그를 반대했는데, 진원(陳元)이 상소하면서 “소변(小辯)이 언(言)을 파하고, 소언(小言)이 도(道)를 파하는 격이다.”고 비난한 일을 말함. 《후한서(後漢書)》 권36 범승·진원전(范升陳元傳). 그리고 장해는 도술(道術)을 좋아하여 오리무(五里霧)를 펼칠 수 있었는데, 삼리무(三里霧) 밖에 못한 배우(裴優)가 오리무의 도술을 장해에게 배우려 하자 장해가 만나주지도 않았다. 그런데 뒤에 난을 일으키려다 일이 발각되어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장해에게 오리무를 배웠다고 거짓 인용하자, 장해 역시 여기에 연좌되어 2년간이나 조옥(詔獄)에 구속되었던 사건을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권36 장해전(張楷傳).
[註 298]관저(關雎) : 《시경》 주남(周南) 편명.
[註 299]교목(喬木) : 《시경》 주남 편명.
[註 300]삼무사(三無私) : 천무사부(天無私覆)·지무사재(地無私載)·일월무사조(日月無私照)로서, 바로 임금의 마음은 백성에 대해 차별이 없어야 함을 말함.
[註 301]노공(潞公) : 문언박(文彦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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