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통(亨通)한 삶을 살려면
형통(亨通)이란 모든 일이 뜻과 같이 잘되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의 뜻과 같이 잘 되어가는 것이냐 하는 것이다.
시편 1편 1-3절에는 올바른 형통의 의미를 잘 묘사하고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사람들은 복을 받아 누리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길을 따르지 않는다. 복을 받으려 하면서도 악인들의 꾀를 쫒고 죄인들의 길에 줄을 서며 교만한 사람들의 자리에 앉는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하늘이 허락하시는 복을 누릴 수 없다. 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은 악인들의 꾀를 쫒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를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마치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가 누리는 복과 같은 복을 누린다. 그렇다면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가 누리는 복은 어떤 복인가? 시편의 배경인 중동 땅은 물이 몹시 귀한 곳이다. 그래서 나무들이 잘 자라지를 못하는 황량한 들판이다. 그런 중에서도 시냇가에서는 나무들이 자란다. 물의 근원이 가깝기 때문이다. 물의 근원이 가까워 사철 물을 공급 받을 수 있기에 잎사귀가 마르지 않으며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성경에서 물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성령(聖靈)을 상징한다. 그래서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가 늘 물을 공급 받기에 잎이 푸르고 열매를 맺게 되듯이 말씀을 늘 묵상하는 사람은 성령과의 교통이 늘 이어지기에 삶이 싱싱하고 성령의 열매 맺는 삶을 누리게 된다. 그리하여 하는 일이 늘 형통함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형통하다는 말은 모든 일이 잘 된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루어져야 할 일은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않아야 할 일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형통이다. 그 판단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을 살피시는 하나님이 판단하신다.
한편 창세기 39장 2절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라는 구절이 나온다.
요셉은 진짜 형통한 삶을 살았을까? 사실 세상적인 관점으로 생각해보면 요셉만큼 형통하지 않은 인생도 없다. 어릴 때부터 형들에게 모진 구박과 핍박을 당했고 급기야 형들에 의해 다른 나라의 노예로 팔려간 인생이 어떻게 형통한 삶이겠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정직하게 고백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형통, 우리가 목말라하는 형통, 우리가 갈구하는 형통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형통과 괴리(乖離)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형통은 무엇일까? 창세기 39장에서 형통을 설명하는 표현 전후에 어떤 설명이 있는지 보자.
“그의 주인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세기 39장 3절).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창세기 39장 23절). 창세기 39장 3절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앞에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라는 전제가 나오는데, 이는 23절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진리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되더라도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경험하면, 거기가 축복의 자리, 형통의 자리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인을 비꼬는 말 중에 가슴 아픈 말이 “예수 믿는 사람이 더 하다.”는 말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얼마나 성공에 집착하는지 세상 사람과 마찬가지로 뇌물이나 세금 포탈을 일삼는데, 거기에 ‘예수’의 이름까지 동원해 성공을 빈다는 것이다. 새벽마다 교회에 가서 예수께 부르짖는 것이 세상적인 성공과 형통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형통의 개념을 바꿔야 한다. 하나님의 기준으로는 대궐 같은 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사는 것이 형통이 아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이 형통이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이는 찬송가 ‘내 영혼이 은총 입어’의 가사 중 일부로 이것이 바로 올바른 형통이다.
2024.12.10. 素澹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언 8장 17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害)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편 23장 4절)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신명기 31장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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