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원대한 염려
국기를 흔드는 악행을 보고도 당장의 무탈함을 생각하고 뿌리 뽑지 않으면 그 악의 세력들은 더욱 기세등등하게 더욱 큰 죄악을 도모하여 결국은 나라를 크게 위태롭게 하는 것이니, 우리 역사에 이를 잘 보여주는 선례가 있다.
숙종 때 장희빈을 옹호하던 남인 세력들이 장희빈을 도와 부정한 짓을 도모한 것이 들어나 축출되었다. 그러나 장희빈이 나은 아들이 세자(훗날 경종)로 있었는데, 이 때 남인 세력들은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를 등에 없고 당시 집권세력인 서인들을 몰아내고자 흉악한 물건을 만들어 세자의 외조가 되는 장희빈 아버지 무덤에 묻은 사실이 알려졌다. 이는 마치 집권 서인세력들이 세자를 내치려고 한다는 듯이 꾸며 정권을 다시 탈취하려는 음모로 의심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용의자가 들어났는데도 장희재와 가까운 대신 남구만 유상운 등이 이 사건을 깊고 원대한 염려가 있으니 덮자고 하여 덮게 되었다(장희재와 남인들의 죄상이 들어나 처벌을 받게 되면 세자에게도 해로울 것이란 핑계로 덮자고 한 것). 이에 한포재 이건명 선생이 정권을 탈취하기 위한 이런 흉악한 음모를 덮어 두는 것은 악을 행한 자들을 살려두면 앞으로 더 큰 악을 도모하고 국가에 화(禍)를 불러올 것이니 철저히 수사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생각건대 눈앞에 안일함을 생각하고 악을 뿌리 뽑지 않으면 그 악의 세력들은 더욱 기세등등하게 더 큰 악을 도모하여 결국은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위의 사례는 오늘날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에서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국사범에 해당하는 중죄를 저지른 자들이 그대로 희희낙락하며 거리를 활보하고 있으니 이를 속히 바로잡지 못하고 불의한 세력이 계속 판을 치게 놔두면 그 결과는 망국(亡國)으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1696년 숙종 22년 한포재 이건명 선생이 ‘수찬을 사직하고 겸하여 시사를 논하는 상소[辭修撰兼論時事疏 丙子]’에 다음의 기록이 있다.
이번 연서(延曙)에 있는 무덤에 흉물을 묻은 변고는 실로 예전에 들어 보지 못한 일이고,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통분해하는 일입니다. 신이 아래 고을에 있을 적에 상(賞)을 내걸고 범인을 잡으라는 명령을 중외(中外)에 반포하였으니, 혈기 있는 사람치고 누군들 속을 태우고 아픔이 사무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스스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어 국청(鞫廳)을 설치한다는 소문을 듣고서 죄인들을 붙잡아 왕법을 통쾌하게 펴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또 삼가 들으니, 대신(大臣)의 진달로 인하여 붙잡힌 죄수들을 모조리 석방시켰는데,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간쟁해도 안 되자 벼슬하지 않은 선비들이 상소를 올려 묘당이 텅 비기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신은 먼 고을에서 새로 와서 진실로 옥사(獄事)의 실정이 어떠한지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장주(章奏) 사이에 나온 말을 가지고 보면, 그 단서가 거의 드러나고 의심할 만한 정상이 이미 분명해졌습니다. 그런데 조정에서 어찌 한번 엄중히 추궁하고 조사하여 그 실상을 캐내 귀신과 사람들의 통분을 풀어 주지 않고 갑자기 너그럽게 용서해 주자고 의논하여 중앙과 지방의 의혹을 크게 야기한단 말입니까.
아, 국가의 형전(刑典)은 역적을 토벌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고, 《춘추》의 단안(斷案)은 장심(將心)에 대해 더욱 엄중합니다. 하물며 이 흉물을 묻은 역적은 참으로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원수이니, 신하들이 하루라도 같은 하늘을 이고 함께 살 수 없는 자입니다. 하인이나 아녀자조차도 오히려 이들의 가죽을 벗겨 깔고 자고자 하고 살점을 씹어 먹고자 하였으니, 지난날 대신이 한밤중에 어전에서 급히 석방하기를 청한 것이 어찌 역적을 토벌하는 의리를 소홀히 한 것이겠으며, 또한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비호하는 뜻이 있어서였겠습니까. 이는 틀림없이 부득이한 것에 구애되고 시세(時勢)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신은 죽음을 무릅쓰고 전하를 위해 다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 이후 지금까지 22년 동안 조정이 이미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진퇴의 시기마다 주살(誅殺)이 문득 가해져 부리던 대신에게 화가 먼저 미치고 역적을 토벌한 훈신(勳臣)에게 형벌이 참혹하게 이르렀습니다. 비록 지난해 내리신 윤음(綸音)이 간절하고 뉘우침이 간곡하셨지만, 상하 간에 정이 혹 통하지 않고 호령할 즈음에 사람들이 혹 믿지 않아 청자(靑紫)와 금초(金貂)가 영화로운지를 알지 못하고 눈치를 보며 관망하는 것이 그대로 습속이 되었습니다. 한(漢)나라 공손하(公孫賀)가 승상(丞相)에 임명되자 눈물을 흘리며 받지 않기에 이르렀으니, 성상의 밝은 시대를 감히 무제(武帝) 시대에 견줄 수는 없지만, 지금의 대신도 어찌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아, 벼락이 치듯 격노하시면 남은 두려움이 그치지 않고, 경수(涇水)와 위수(渭水)가 번갈아 요동치면 시비가 쉽게 흔들리셨습니다. 이 때문에 중대한 일에 직면하여 결의할 때면, 의리가 이해에 막히고 구차한 데에서 머뭇거리다가 차라리 한 시대의 공의(公議)를 어길지언정 요행히 당장 눈앞의 안일만을 추구하셨고, 염치없이 이익을 꾀하는 무리가 또 따라서 영합하여 고식적인 방법으로 사태를 수습하다 온갖 병폐가 나타났으니, 이렇게 하고서 나라를 잘 다스린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저 벼슬하지 않는 선비들은 단지 대의(大義)를 밝히고 윤리를 부지하고자 하는 자들이니, 그들이 공격하여 배척하는 바를 장차 어찌 꺼리고 조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의 망녕된 생각으로는 오늘날 역적을 토벌하는 일이 엄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대신만을 허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성상의 밝은 조정에만은 바라는 것이 없을 수 없습니다. 만일 전하께서 시원히 뜻을 돌려 결단하여 대의를 분명히 보이시고, 묘당에 칙유(勅諭)를 내려 철저히 조사하여 정상을 알아내게 하시어, 중앙과 지방의 신하와 백성들로 하여금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알게 하신다면, 지금의 대신은 반드시 장차 명을 받들기에 겨를이 없을 것이니, 무엇을 꺼려서 기구한 지경으로 스스로 나아가겠습니까.
‘깊고 원대한 염려’라는 말에 이르러서는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이번 옥사의 실정에 의심할 만한 단서가 있는데도 오히려 철저히 캐묻지 않는다면, 진실로 화가 널리 퍼질지 모를 일입니다. 설령 처리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하더라도, 죄인의 정상이 다 드러난 뒤에 먼저 국법을 바로잡고 그 저촉한 바에 따라서 조용히 잘 처치할 방도가 없지 않은데, 어찌 그렇게 해 보기도 전에 억측해서 중대한 옥사를 갑자기 느슨하게 만든단 말입니까.
지금 만약 그만둔 채 끝내 옳고 그름을 가려 밝히지 않는다면, 신은 아마도 이른바 ‘뒷날을 깊고 멀리 염려한다’는 말이 뒷날에 깊고 멀리 염려를 끼치는 화(禍)를 초래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비록 이해(利害)를 가지고 논하더라도 또한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신의 광망(狂妄)하고 참람함을 용서하시고, 두려워하며 반성하는 데에 더욱 마음을 쓰소서.
[주-1] 수찬을 …… 상소 :
1696년(숙종22) 6월 24일에 올린 상소로, 그 대략적인 내용이 《국역 숙종실록 22년 6월 24일》 기사에 보인다.
[주-2] 이번 …… 변고 :
1695년(숙종21) 겨울에 연서에 있는 희빈(禧嬪) 장씨(張氏)의 친정아버지 무덤의 표석(標石)을 깨부수고, 1696년 봄께 또 무덤을 훼손하고, 나무칼을 꽂은 나무인형 등의 흉한 물건을 묻어 둔 변고를 말한다. 《국역 숙종실록 22년 4월 29일》
[주-3] 상(賞)을 …… 반포하였으니 :
1696년 4월 30일에 관련 죄인들을 고발한 자에게는 두 품계를 높여 주고, 1천 금(金)을 상 준다는 뜻을 중외(中外)에 반포하고, 좌ㆍ우 포도청에서는 경중과 연서 근처를 각별히 염탐하여 반드시 잡도록 분부하라고 명하였다. 《국역 숙종실록 22년 4월 30일》
[주-4] 국청(鞫廳)을 …… 듣고서 :
숙종은 세자 외조의 무덤에 방자하게 저주한 변고에 대해 통탄해하며 유사(有司)로 하여금 곧바로 개좌(開坐)하도록 하여, 먼저 장씨(張氏) 집안의 사람을 심문하여 곡절을 상세히 묻고 나무인형을 바치게 하여 그 글자를 살펴서 변고를 일으킨 사람을 구명해 알아낸 다음, 빨리 나라의 법대로 처벌하여 인심을 시원하게 하되 금기에 얽매이지 말고 날마다 개좌하며, 예사로운 방법을 버리고 각별히 엄하게 국문하도록 지시하였다.《국역 숙종실록 22년 4월 29일》
[주-5] 대신(大臣)의 …… 석방시켰는데 :
1696년(숙종22) 6월 1일에 옥례(玉禮)ㆍ명월(命月)ㆍ업동(業同)을 한곳에서 대질심문하였는데, 업동이 전후에 말한 의심스러운 말을 옥례ㆍ명월이 업동에게 힐문하니, 업동의 말이 많이 막혔다. 이에 국청의 여러 의논은 다 업동을 심문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장희재를 감싸고자 하는 국청의 대신 남구만(南九萬)ㆍ유상운(柳尙運) 등이 듣지 않고 밤에 청대(請對)하여, 업동의 말이 옥례ㆍ명월의 공초와 자못 맞지 않는 것은 곧 의사(疑似)일 뿐인데, 의사로 큰 옥사를 결단하는 것은 옥사의 체모에 매우 어그러진다고 아뢰자, 임금이 갇혀 있는 사람들을 모두 놓아 보내라고 명하였다.《국역 숙종실록 22년 6월 1일》
[주-6] 삼사(三司)의 …… 이르렀다고 :
1696년 6월 5일 사헌부에서 업동을 놓아 보내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계청(啓請)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6월 9일에 장령 양성규(梁聖揆)가 상소하여 업동에 관한 계청을 윤허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자, 6월 10일에 관학 유생(館學儒生) 이세기(李世耆) 등 97명이 상소하여, 대신 남구만ㆍ유상훈 등이 꼬투리가 이미 드러난 뒤에도 차마 끝까지 심문하지 않고 근거 없는 말과 회피하는 말로 국적(國賊)을 감싸며 한밤에 은밀한 자리에서 놓아 주기를 청하기에 바빴다고 비난하면서, 흉물을 묻은 역적을 끝내 핵실하고 역적죄를 감싼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영의정 남구만ㆍ좌의정 유상운ㆍ우의정 신익상(申翼相) 등이 궐문(闕門) 밖에서 대명(待命)함에 따라, 묘당이 텅 비게 되었다.《국역 숙종실록 22년 6월 5일, 9일, 11일》
[주-7] 춘추의 …… 엄중합니다 :
‘장심(將心)’은 장차 난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려는 불충(不忠)한 마음을 품는 것을 말한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장공(莊公) 32년조에 “임금의 친척에게는 장(將)이 없어야 하고, 장이 있으면 반드시 벤다.[君親無將, 將而必誅.]”라고 하였고, 《한서(漢書)》 권43 〈숙손통전(叔孫通傳)〉에 “인신에게는 장이 없어야 한다.[人臣無將.]”라고 하였는데, 그 주(注)에 “장은 역란을 말한다.[將謂爲逆亂也.]”라고 하였다.
[주-8] 전하께서 …… 바뀌었습니다 :
1674년(현종15)의 갑인예송(甲寅禮訟)을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고, 1680년(숙종6)에 삼복의 변[三福之變]을 계기로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고, 1689년에 희빈(禧嬪) 장씨(張氏) 소생을 원자로 호칭을 정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고, 1694년에 갑술옥사를 계기로 남인이 축출되고 소론과 노론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여 환국(換局)이 잇따른 것을 말한다.
[주-9] 진퇴의 …… 이르렀습니다 :
1689년에 희빈 장씨의 소생을 원자로 호칭을 정하는 문제를 계기로 남인이 서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면서, 노론의 주요 인물들인 송시열(宋時烈)ㆍ김수흥(金壽興)ㆍ김수항(金壽恒)ㆍ민정중(閔鼎重)ㆍ김만중(金萬重) 등이 유배되어 사사(賜死)되거나 유배 중에 죽은 일 등을 말한다.
[주-10] 청자(靑紫)와 금초(金貂) :
청자는 한(漢)나라 제도에, 공후(公侯)는 자주색 인끈을 쓰고 구경(九卿)은 푸른 인끈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공경(公卿)의 지위를 말하고, 금초는 금당(金璫)과 초미(貂尾)로 장식한 관(冠)으로, 전하여 고관(高官)을 가리킨다.
[주-11] 한(漢)나라 …… 이르렀으니 :
한 나라 무제(武帝) 때에 조정에 일이 많아 대신들에게 책임을 지우니, 공손홍(公孫弘)이 문책을 당한 이후로 대신들이 일에 연좌되어 죽는 경우가 많았다. 공손하(公孫賀)가 이러한 때에 승상에 임명되자 인수(印綬)를 받지 않고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흘리고 일어나지 않으니, 무제는 그대로 나가 버렸다. 이에 공손하는 부득이 일어나 사은숙배하였다.《漢書 卷66 公孫賀傳》
[주-12] 경수(涇水)와 위수(渭水) :
중국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두 물의 이름인데, 경수(涇水)는 물이 탁하고 위수(渭水)는 맑기 때문에 옳고 그름과 맑고 탁함의 분별을 엄격히 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주-13] 깊고 원대한 염려 :
1696년(숙종22) 6월 11일에 관학 유생 이세기 등 97명이 상소하여, 대신 남구만ㆍ유상운 등이 흉물을 묻은 역적을 구원하면서 세자를 위한 깊고 원대한 염려라고 핑계 댔다고 비판한 데 대해, 임금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지난번에 대신 이하가 청대하여 의사(疑似)로 심문하는 것은 옥사의 체모에 어그러질 뿐만 아니라, 깊고 원대한 염려가 절로 그 가운데에 붙여져 있다고 아뢰었으나, 이것은 대신의 말 때문이 아니라, 죄인의 공초를 보고 깊고 원대한 염려가 먼저 내 마음에 싹튼 것이다.”라고 하였다. 《국역 숙종실록 22년 6월 11일》
<출처 : 한포재집(寒圃齋集) 제3권 / 소차(疏箚)>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서종태 채현경 이주형 전형윤 강지혜 (공역) | 2016
2024. 1.28. 素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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