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諫)하는 말을 멀리하면
임금은 많은 백성의 위에 군림하여 온갖 정무를 접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총명과 예지가 누구보다 으뜸간다 하더라도 분명히 보고 두루 듣지 않으면 보고 들을 때 편벽됨이 있게 되어 자신을 바루고 좋은 정치를 도모할 길이 없게 되는데, 이는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순 임금 같은 성인(聖人)도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랐으며 성탕(成湯) 같은 덕으로서도 간하는 말을 따르고 어기지 않았으니, 옛 성인이 어찌 성지(聖智)로 자처하면서 남은 모자라게 여겼겠습니까. 삼대(三代) 이후로 치세와 난세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마는, 간하는 말을 따르면 다스려지고 간하는 말을 막으면 어지러워 진 것이 역사책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속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후세의 임금들이 간하는 말을 따르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고 간하는 말을 막는 것이 나쁜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간하는 말을 따라 잘 다스린 자는 적고 간하는 말을 막다가 망한 자가 많은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사람의 정이란 언제나 나에게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고 귀에 거슬리는 것은 언제나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혹 자신의 사사로움에 유혹되기도 하고 이해관계에 이끌리기도 하며 기뻐하고 성내는 감정에 좌우되기도 하니, 이것이 충신과 곧은 선비가 언제나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고 따라서 나라가 망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 인조9년(1631년) 10월3일 백강 이경여 선생 등의 상차문(上箚文) 에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
인간에게 있어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이를 인간적인 것으로 환원시키고 인간의 낙인(烙印)을 찍는 것이다.
만일 인간 사상의 유일한 의의(意義)있는 역사를 써야 한다면 사상의 계속적인 후회와 무력(無力)의 역사를 기록 해야만 할 것이다.
사실, 누구에 대하여 무엇에 대해서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내 속의 이 마음이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고 그가 존재한다고 판단한다. 이 세계, 나는 그것을 만져볼 수 있으며 또한 존재한다고 판단한다. 거기에서 내 모든 지식은 멈추고 그 나머지는 구성(構成)이다.
내 자신의 것인 이 마음조차도 나에게는 영영 정의(定義)할 수 없는 것으로 남게 될 것이다. 내가 나의 존재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확실성과 이 확실성에 부여하고자 하는 내용 사이에 있는 도랑은 결코 메워질 수 없는 것이다. 영원히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이방인이리라.
이 지상(地上)의 모든 지식은 이 세계가 나의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그 아무 것도 내게 주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려던 과학은 가설(假說)로 끝나고, 이 명찰(明察)은 비유 속에 잠기며, 이 불확실성은 예술작품으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그 많은 노력 중에서 무엇이 내게 필요했던가? 저 언덕의 부드러운 선(線)과 동요되는 마음 위로 드리우는 저녁의 손길이 나에게 훨씬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불가해(不可解)하고 제한된 이 우주 안에서 인간의 운명은 이제부터 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 세계자체가 합리적이 아니라는 것, 그것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이다.
~ 알베르 까뮈, ‘부조리(不條理)의 추론(推論)’ 중에서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上無禮상무례하며下無學하무학이면 (0) | 2021.04.19 |
---|---|
에스라를 본받아! (0) | 2021.04.15 |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 (0) | 2021.04.09 |
인륜을 행하고 은혜를 베풀라 맹자 등문공상 (0) | 2021.03.27 |
하나님 과 도레미파 (0) | 2021.0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