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대첩비 (鳴梁大捷碑)
대제학과 판서를 겸한 서하 이민서 선생은 병자호란 패전 이후 국민들의 사기진작 및 민족자긍심고취의 일환으로 이순신, 김덕령, 김천일, 이종인, 박광옥 장군 등 임진왜란당시 활약한 우리나라 전쟁영웅들을 발굴하여 알리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아래는 서하 선생이 글을 지은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비 에 관한 소개이다.
지정번호 보물 503호
소재지 전남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1186-7 (해남 충무사)
명량대첩비는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정유재란 때인 1597년 9월 16일 울돌목에서 거둔 명량대첩을 기록한 비이다. 숙종14년(1688년) 3월에 건립하였으며 예조판서 이민서가 비문을 짓고 판돈령부사 이정영과 홍문관 대제학 김만중이 전자로 써서 만들었다.
임진왜란(1592∼1598) 당시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의 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이곳은 옛 조선시대의 우수영(右水營)이며, 강 건너 바로 앞이 진도를 바라보는 해남의 남쪽 끝 해안지역이다.
이 석비는 직사각형의 비받침 위에 비몸돌을 꽂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을 장식한 머릿돌을 얹은 형태이다. 비문에는 선조 30년(1597) 이순신장군이 진도 벽파정에 진을 설치하고 우수영과 진도 사이 바다의 빠른 물살을 이용하여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적함대를 무찌른 상황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높이 267, 너비 114㎝로 1969년에 보물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수난1942년 전라남도 경찰부의 일본인 경찰 아베(阿部)가 비를 뜯어내어 서울로 옮기고 비각을 없앴다. 이때 경복궁 근정전 뒤뜰에 파묻어 버렸다. 해방이후 수색끝에 파묻혀있는 대첩비를 발견하고 당시 미군정청의 협조로 우수영 선창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국민들의 모금운동 노력 끝에 1950년 비각이 재건되고 다시 비를 세워 현재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에 소재하고 있다.
서하 선생의 이러한 우리 영웅 발굴 작업은 일면 생명을 건 사업이기도 했다. 그의 스승인 우암 송시열 선생은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덕령 장군의 향사(享祀)를 주선한다고 하니 과연 훌륭한 일이네. 그러나 염려되는 것은 임진왜란 당시 김 장군을 죽인 세력이 마치 하늘을 뚫을 듯이 팽창하고 있네'라고 안위를 걱정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데에 깊이가 부족하고 지나치게 부정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아 오히려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고 나라를 발전적으로 이끄는 데 저해요인으로 작용하지 않나하는 의구심을 저버릴 수 없다.
2018.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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