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섬기는 도리, 인간다운 삶의 길
사람이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사람이 인간답지 못한 삶을 산다면 그의 삶에 무슨 가치나 보람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길이며 그 길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그 기준의 하나를 창세기 25장에 나오는 에서와 야곱 형제에게서 찾을 수 있다. 두 사람의 삶을 비교하건대 우선 겉보기로는 형인 에서가 사나이답고 인정 있는 삶이었던 것같이 보이고 동생인 야곱은 속임수를 쓰며 살고 꾀로 살아가는 좋지 않았던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에서의 편을 들지 않으시고 야곱의 편을 들었다.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성경 본문을 살펴보면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창세기 25장 31절의 말씀으로 미루어 살피건대 에서는 태어날 때 하나님이 자신에게 부여하신 현실에 성실치 못하였다. 그는 맏아들, 장자란 명분을 너무나 가벼이 여겨 동생에게 쉽사리 넘겨주고 말았다. 34절에서는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여겼다”고 지적하고 있다. 성경이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바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태어날 때의 현실을 소중히 여기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마음가짐이다. 동생 야곱은 이런 명분을 지나치리만큼 소중히 여겨 자신이 그 명분을 이어가려고 애셨다.
우리시대에 사람들이 소홀히 하는 문제들 중의 하나가 명분(名分)이란 가치를 소홀히 하는 점이다. 너무나 모두들 이익이나 이권에 관심을 쏟다보니 명분이나 본질을 소홀히 하며 살고 있다. 형 에서가 팥죽 한 그릇이라는 눈앞의 이익에 팔려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하였다가 삶 전체를 그르친 사연을 우리는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형 에서가 겉보기로는 장점이 더 많았던 것 같고 동생 야곱이 단점이 더 두드러진 것 같이 보이면서도 에서의 삶은 실패자로 끝났고 야곱의 삶은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그 차이가 어디에서 왔을까? 앞에서 지적한 대로 에서는 명분을 소홀히 여기는 과오를 범하였음에 비하여 야곱은 명분을 따름에 전심을 다하였다.
둘째로 삶의 목표와 비전을 추구함에 에서와 야곱은 뚜렷하게 달랐다. 에서는 사냥꾼으로써 하루하루를 자신이 좋은 것을 따름에 매여 살았다. 삶에 방향이나 목표를 추구함이 없이 그냥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러나 야곱은 달랐다. 야곱은 가치를 추구하는 일에 자신을 던졌다. 그의 성격이나 인격에는 일그러진 부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삶을 투자하여 따를 가치를 찾았고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는 일에 자신을 던졌다.
중요한 것은 성경은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에게 있는 약점과 결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추구한다. 야곱이 추구한 삶이 바로 그런 삶이었다. 그가 불모지 루스 땅을 하나님의 집을 뜻하는 벧엘로 고친 것이나 나루터 얍복을 하나님의 얼굴을 뜻하는 브니엘로 바꾼 일들이 이를 말하여 준다. 그리고 그의 삶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승화되어 간 것이 이를 말해 준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그늘진 모습을 탈피(脫皮)하여 나가며, 새로운 미래를 열어 나가고자 힘쓰는 도전의식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탈피하지 못하는 뱀은 죽는다”는 말은 독일의 괴테가 즐겨 쓴 말이다. 산과 들에 나가면 뱀이 벗어 놓은 껍질을 보게 된다. 뱀은 정기적으로 자신의 껍질을 벗으면서 생명을 유지하게 된다. 그런데 뱀이 병이 들게 되면 껍질을 벗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럴 경우 뱀은 자신의 껍질에 갇혀 죽게 된다.
형 에서도 열심히 살았던 사람이기는 하나 일상적으로 되풀이 되는 자신의 틀에 갇혀 살았다. 그의 삶은 미래지향적이지를 못하였다. 마냥 현실에 안주하며 살았을 따름이다. 자신을 극복하여 나가는 삶을 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동생 야곱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극복하여 나가는 변화를 추구하였다. 야곱은 현실에 안주하려 들지를 않고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하여 자신을 던졌다. 창세기에서 야곱의 일생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는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위기에 몇 번이나 직면하게 되면서 그때마다 자신을 더 높은 단계로 발전시켜 나갔다.
끝내는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자신을 변혁시켜 나갈 수 있었다. 창세기 35장의 기록에 의하면 야곱이 젊은 날에 청운의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난지 30년 만에 떠나 온 고향 벧엘로 되돌아 왔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게 하셨다. 야곱은 땅의 사람, 육의 사람을 뜻하는 이름이고 이스라엘은 영의 사람, 하늘의 사람을 일컫는 이름이다. 우리들도 세월 속에서 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땅의 사람에서 하늘의 사람으로 자신을 극복 승화 시켜 나가는 도전이 있어야 한다. 그런 도전이 있을 때에 사람답게 사는 길이 열려진다. (김진홍 목사)
이상의 글을 보며 지난날 백강 이경여 선생과 그 후손들이 조정에서 “하늘을 섬기는 도리”를 자주 말씀하신 것이 생각난다.
그 분들의 말씀을 보면 비록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성경은 전래되지 않은 때 이었으나, 우리나라에도 하나님의 일반은총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1. 하늘을 공경하라 ~ 백강 이경여 선생
1631년(인조 신미년) 부제학이 된 이경여(당시 나이 47세)가 상차하여 인조임금의 잘못을 지적한 글이 있다. 이중에는 아래와 같이 하늘을 공경할 것을 강조하는 대목이 있는데, 인조임금은 매우 절직한 말이라 여겨 좋은 뜻으로 받아들였다.
10월 부제학 이경여가 상차하기를,
“ ~상략~첫째는 하늘을 공경하는 일입니다. 임금은 높은 지위에 있고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니, 두려워 할 것은 하늘뿐입니다. 하늘은 이치이니, 한 생각이 싹틀 때 이치에 합하지 않으면 이는 하늘을 어기는 것이고, 하나의 일을 행할 때 이치를 따르지 않으면 이는 하늘을 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옛적의 제왕이 매우 조심하며 상제(上帝)를 대한 듯 행동한 것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정성으로 하늘을 섬기면 천명(天命)이 계속 아름답게 내려지지만 하늘을 어기고 이치를 거스르면 그 천명이 영원히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마음은 인자하여 차마 갑자기 끊어버리지 못하니, 반드시 재이(災異)를 내려 견책한 뒤 흐리멍덩하게 깨닫지 못하여 끝내 고치지 않은 다음에야 크게 벌을 내리는 것입니다.... 중략...
하늘이 멸망시키거나 사랑하여 돕는 것은 공경과 불경(不敬), 정성과 불성(不誠)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천명은 일정함이 없으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가 즉위한 이후로 천문 지리 곤충 초목의 재이를 실로 낱낱이 들기가 어렵습니다. 수 년 이래로 종묘의 나무에 벼락이 치고 진전(眞殿)에 불이 났는가 하면 반 년 동안 가뭄이 들고 8월에 큰물이 졌으며 벼가 쓰러지고 나무가 뽑히는 큰 바람이 불었으니, 이는 실로 근고에 없었던 변고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를 기수(氣數)와 관계된 현상으로 여겨 스스로 합리화시키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어찌 크게 삼가고 두려워함이 없으며 크게 절약함이 없으며 크게 시행하고 조치함이 없습니까. 상선(常膳)을 감하고 정전(正殿)을 피하는 것으로 하늘의 노여움을 되돌릴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미워함을 사사로운 정에 따르므로 상하가 막혔으니, 하늘의 노여움이 그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게 없습니다.....중략 .....
재앙이나 복은 자신이 초래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잘못을 깊이 징계하고 스스로 장래의 복을 구하여 상림(桑林)의 육책(六責)으로 몸을 살펴 반성하고 운한(雲漢)의 8장으로 몸을 기울여 덕을 닦으소서. 심술(心術)의 은미한 곳으로부터 궁정의 사람 없는 곳과 동작하고 이야기하는 사이에 이르기까지 삼가 공순하고 공경히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게 하소서. 천명을 스스로 헤아려 천리로써 보존하고 자연의 법칙으로써 움직여, 공경하고 조심스럽게 하기를 마치 효자가 어버이를 섬길 때 힘써 성의를 쌓아 기필코 즐겁게 되시도록 하는 것과 같이 하소서. 그리고 애통하는 전교를 시원스럽게 발표하여 과거의 허물을 사과하고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며 덕 있는 사람을 모두 받아들여 적소에 앉혀 쓰되 전일처럼 형식적으로 끝나지 않게 하여 재이를 소멸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소서. "하였다.
2. 조선왕조실록 순조 22년 1822 10.15일 기록을 보면 영상 이재찬의 상소에 아래의 내용이 있다.
지난날 효종조 때에 고 상신 이경여(李敬輿)가 재이(災異)로 인하여 상소하기를, ‘허례 허식이나 잗단 일을 하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도리가 아닙니다. 정전(正殿)을 피해 거처하시는 것이 궁중을 엄히 단속하여 사사로운 길을 막느니만 못하고, 수라의 반찬 가짓수를 줄이는 것이 검소를 숭상하고 낭비를 줄이느니만 못하며, 해마다 바른말을 구하는 한 가지 일을 실천하느니만 못하고, 조정에 납시어 애통해 하는 것이 주야로 두렵게 여기느니만 못합니다.’ 하니, 효종께서 매우 가납하셨습니다. 성조(聖祖)의 허심 탄회하신 덕과 옛 정승의 마음을 바로잡으려는 충성은 백왕(百王)들에 존경을 받고 〈하(夏)•은(殷)•주(周)〉 삼대(三代)를 능가할 수 있습니다. 신 역시 옛 정승이 성조에게올린 말로 전하를 위하여 또 이렇게 되풀이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아뢴 바를 마땅히 유념하겠다.”
비록 백강 선생은 기독교가 전래되기 전에 살아 하나님을 알지는 못하였으나 하늘을 섬기는 도리가 있음을 이미 효종조인 1,600년대 전번에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도 이미 그때부터 하나님의 일반은총이 있었던 것이다. 이후 백강이경여 선생의 손자이신 소재 이이명 선생이 숙종승하후 중국에 사신(고부사)로 가서 본격적으로 천주교(하나님)에 관한 서적등을 우리나라에 가져오셨다.
소재 이이명 선생과 그 아들 일암 이기지 선생은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그곳의 독일, 포르투갈 신부 등과 교류하며 구득한 앞선 서구 문물들과 아울러 기독교(천주교)에 관한 서적등을 이 땅에 본격적으로 들여와 소개하시었다.
2019.10.22. 이 주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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