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받아야할 덕성(德性)
~ 백강(白江)과 동춘(同春)의 직언과 대인선생(大人先生)으로 높인 효종대왕
인조 23년 소현세자가 뜻밖에 일찍 돌아가자 그 동생 봉림대군(훗날 효종)으로 왕세자의 위를 승계토록 할 것인가 아니면 소현세자의 아들[元孫]로 이를 승계토록 할 것인가의 논의가 심각하였다. 인조는 봉림대군으로 마음을 정하고 강력히 추진하려하였는데, 이에 대해 백강(白江)과 동춘(同春)등의 반론이 있었다.
백강 이경여(李敬輿)와 동춘 송준길(宋浚吉)이, 인조 23년(1645)에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자 당시 봉림대군(鳳林大君)이던 효종(孝宗)을 왕세자로 책봉하려는 인조의 뜻에 반대하여 소현세자의 아들[元孫]로 적통을 잇게 해야 한다고 주청하였다. 당시 지평이던 송준길은 병으로 사직하면서, “속히 원손의 위호(位號)를 정하고 김상헌을 빈사(賓師)의 직책을 주어 보양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이경여는 판중추부사로 있으면서, 나이 어린 원손보다 나이 많은 대군으로 세자를 정해야 한다는 인조의 주장에 대하여 “나이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부(賢否)를 가지고 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원손으로 적통을 잇는 것이 원칙이며, 권도로 이를 어길 때는 백성들의 의혹을 사게 되어 소란스러움을 면치 못할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 《仁祖實錄 23年 6月 辛丑, 閏6月 壬午》 ~ 송자대전 제123권 / 서(書) 숙제(叔弟)에게 답함 중에서 한국고전번역원
“우리 효종의 성스러운 것은 왜 모르는가?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과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이 모두 손자를 후사(後嗣)로 세우자고 주장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효종께서 등극하시면 두 집안은 멸문(滅門)의 화를 당할 것이다.’ 하였다. 때문에 신군필(申君弼) 신익륭(申益隆)은 집을 옮기어 동춘을 피하였다. 그러나 효종이 등극하여서는 두 신하가 의리와 정도를 굳게 지키는 어진 사람임을 알고는 믿고 쓰면서 예(禮)로 대우하여 심지어는 백강을 대인 선생(大人先生)이라고 일컫기까지 하였으니, 그 성덕(盛德)과 기상이 어떠한가.”
~ 송자대전 제131권 / 잡저(雜著) 연거잡록(燕居雜錄) 중에서 한국고전번역원
이후 백강 이경여 선생은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끝까지 이 소신을 굽히지 않아 북쪽 끝 산수갑산에 위리안치 되는 등 극형을 받았으나, 효종이 등극하고 나서 다시 영의정으로 복귀하여 병자호란의 참화극복과 북벌계획 등을 추진하게 되나(이 때 효종은 그를 대인선생이라 칭하였다), 위협을 느낀 청나라의 압력으로 영상에서 물러나고 만다.
오늘날 우리의 세태에서 아무리 올바른 말이라도 멸문의 화를 당할 수도 있는 주장을 소신껏 주장하는 이를 찾아 볼 수가 있는가? 나아가 이처럼 충직한 이들을 오히려 대인선생으로 높이는 의로운 풍토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가?
무릇 가정, 사회, 나라의 기초인 각 구성원들이 정의롭고 정직하며 예의를 지키는 것을 가장 중시하는 풍토가 결국은 그 조직의 흥망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된다. 우리에겐 유아초등교육, 가정교육을 강화하여 정의, 정직, 예절이 모든 국민의 몸에 배이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일본의 명치유신의 슬로건이 이런 기초교육을 담당하는 여성들을 바르게 잘 가르치자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반드시 주목해야할 대목이다.
2018. 8.18. 이 주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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