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강 이경여 상공의 인품
백강공은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워서 안으로 강건하고 밖으로는 따뜻하였는데, 정순(精純)한 기(氣)가 커서 안팎으로 맑게 빛났으며 화락하고 순조로운 기운이 용모에까지 이르렀다. 어렸을 때부터 다투거나 화를 내는 기색이 없었다. 남들과 말을 할 때는 마음이 평안하고 정신이 안정되어 말을 하면 사람들이 신뢰하였다. 평소에는 즐거웠고 시원하여 자연스러웠지만 일을 당해서는 오로지 떳떳한 도리로 처리하였고 의리상 마땅히 해야 할 일에는 과감히 힘썼으니, 늠름하여 뜻을 빼앗을 수 없었다.
일찍이 옛사람의 마음을 잡아 보존하고 성찰하는 방도에 마음을 다하고 경사(經史)를 참고하여 의리의 깊은 근원을 훤히 알았다. 일상생활에서는 차근차근 법도가 있었으며, 규문(閨門) 안에서는 엄숙하면서 화목하였고 조리가 지성스러워 엄격하지 않았는데도 집안이 다스려졌다.
책 읽기를 좋아하여 날마다 정해 놓고 공부를 했으며 앉으나 누우나 반드시 책을 손에 들고 있었고 드나들 때도 가지고 다녔으며 질병에 걸렸을 때에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특히 밤이나 아침에 책 읽기를 즐겨 나이가 고령이 되고 관직이 높아졌을 때에도 여전히 그만두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밤기운은 고요하고 아침 기운은 맑아서, 공효는 배나 되고 쉽게 스스로 습득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송 정언 몽석(宋正言夢錫)과 밤에 앉아 책을 읽는데, 송공(宋公)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이러한 때에 마음의 본체를 묵묵히 살피는가. 옛사람이 말한 광풍제월(光風霽月)이란 것을 더욱 징험할 수 있네. 사람이 이때의 광경을 늘 보전할 수 있으면 성현(聖賢)의 마음일세.”라고 하였다.
상을 당했을 때 책을 읽고 있었는데 흔연히 마음에 깨달은 데가 있자,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슬픔을 잊는 경지에 가깝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이어 책 읽기를 그만두려다가, 이윽고 다시 생각하고 말하기를 “상중에 책 읽기는 성인(聖人)께서 금한 적이 없으니, 이는 분명 마음을 바로 하는 데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효우(孝友)에 돈독하였다. 부모를 모실 때 좌우로 어김이 없었고 힘을 다하여 터럭만큼도 유감이 없도록 하였다. 내 증조모 정 부인(鄭夫人)은 연세가 근 백 세였는데, 삭망(朔望)이면 공은 반드시 집안사람들을 모아 술자리를 마련하였고 매번 형제들이 즐겁게 모였고 어린 자손들은 재롱을 피웠다. 공은 윗사람을 받들고 아랫사람을 돌보는 가운데, 정 부인을 즐겁게 하려는 의도로 우스갯소리를 지어냈으니 모두 지극한 사랑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공 때문에 집안사람들이 더욱 친해졌고 술자리가 파한 뒤 정 부인은 기쁜 마음으로 공을 칭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선왕부(先王父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만년에 세상에 분노하다 술병이 들어 행동을 마음대로 하였고, 혹 어두운 밤에 홀로 외출하여 집안사람들이 간 곳을 알지 못했다. 공이 매번 울면서 달려 나가 걸어서 그 뒤를 따라가다가 여러 날 돌아오지 못하고 다리에 피를 흘린 적도 있었다. 병환을 앓은 지 10년 동안 공은 옷에 허리띠를 풀지 않았고 약물은 공이 직접 짓고 맛보지 않으면 함부로 올리지 않았으며, 돌아눕거나 부축할 때는 다른 사람에게 대신 시키지 않았다.
정묘년(1627, 인조5) 이후, 선왕모(先王母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연세가 더욱 높아져 공이 마침내 백마강 가로 모시고 돌아갔다. 이에 사방으로 다니며 벼슬하려는 뜻을 접고 봉양에 전심하니, 아무리 자주 상께서 불러도 피할 수 없을 때만 한번 취임하고는 오래 밖에 있던 적은 없었다.
공의 동생 생원공(生員公)이 일찍 세상을 뜨자 공은 가까운 곳에 집을 짓고 홀로된 제수씨를 거처하게 하고 옷과 음식을 함께 나누었다. 가난하게 사는 누이 한 명이 있었는데, 공은 그 집안일을 보살피고 조카들을 자기 자식처럼 돌보아 모두 가르치고 키워서 시집, 장가보냈다.
형제가 적은 것을 스스로 상심하여 제종(諸從 사촌 형제)에게 우애를 더하였으니, 내제(內弟) 송공 몽석(宋公夢錫)과 집은 따로 살면서도 재산을 함께 나누었고 은혜가 동기간 같았으며, 송공이 세상을 떠나자 과부가 된 제수씨와 남은 자식을 매우 독실하게 보살폈다. 원근의 집안사람들 중에 의탁할 데가 없는 사람은 모두 공에게 귀의하였고, 음식과 의복을 구제해 주어 그 뜻과 생업을 이루어 주었다.
다른 사람과 교유할 때는 내내 변치 않았으며, 오랜 벗의 생사, 가난과 질병, 곤궁에 대해서는 곡진하게 은혜로운 마음을 가졌다. 사람을 만날 때는 현우(賢愚)나 귀천(貴賤)이 없었고, 한결같이 성의로 대하였으므로 다른 사람들도 다 마음을 씻고 성의를 바쳤으며, 아무리 불초한 사람도 오직 그의 허물을 드러낼까 근심하였으니, 공이 사람을 사랑함에 인자하기가 끝이 없었다.
성품이 진기한 완구를 좋아하지 않았고, 사치스러운 그릇과 용구를 더욱 싫어했다. 공은 물건에 대해 담백하여 남달리 좋아하는 기호가 없었으며, 자신의 생활은 매우 검약하여 떨어진 옷과 거친 밥을 평소 습관처럼 편안해했다. 평생 살림에 관한 일은 언급하지 않았으며, 정승의 귀한 자리에 이르러서도 처자식이 집에서 고생하였고 간혹 죽도 넉넉하지 못하였다.
괴이하고 특별한 행위를 하지 않았지만 취하고 버리는 일이나 사양하고 받는 데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변별하였고, 자신을 바르게 견지하였으므로 남들이 감히 사사롭게 청탁하지 못하였다.
평소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여 한적하게 속세를 떠날 마음이 있었다. 소년 시절에 여강(驪江)을 오간 것이 또한 10년이었고, 늘그막에 백강을 알게 되어 호산(湖山)의 절경을 감상하면서 백강 가에 살 터를 잡았다. 좌우에 도서를 쌓아 두고 한가로이 거닐면서 즐겁게 지냈다. 또 산마루에 서실을 지었는데 깎아지른 절벽에 둘러싸여 큰 강을 내려다보고 있어 간혹 손님이나 교유하는 인사들이 오지 못하였다. 매번 한겨울에 눈이 쌓이거나 봄가을로 달이 차면 더욱 즐겨 거처하였다. 공이 그 사이에 이를 때마다 문을 닫아걸고 꼿꼿이 앉아 정신을 모으고 조용히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이렇게 한 것이 여러 해였는데, 그 가운데 깨달은 바는 엿볼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조정에 벼슬한 지 50년 동안 물러난 적이 많고 나아간 적은 적었다. 모든 권세와 이록(利祿)에 대해서는 마치 겁 많은 필부처럼 피하였다. 늘 명절(名節)을 스스로 조심하였으며 비록 위험하거나 욕을 당하는 상황이라도 지조를 변한 적이 없었다. 두 번이나 심양(瀋陽)에 갇혔을 때는 호랑이 입에 들어간 듯 위태로웠고, 남쪽 지방으로 귀양 갔을 때는 상이 진노하여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경우를 당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낯빛이 변하고 슬퍼하게 마련인데, 공은 홀로 걱정하는 기미가 없이 만번 죽을 처지에서도 온화하였으니, 또한 공의 큰 절개는 깊이 길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공은 시무를 처리하는 능력도 넉넉하여 청단(聽斷 송사를 판단함)은 몇 사람 몫을 하였으므로, 관직에 있을 때 사안의 대소에 상관없이 모두 직접 처리하였다. 또 인정을 살펴 호오와 고통이 있는 데를 파악하여 지성으로 보호하였다. 봉직할 때는 근면하였고 일 처리는 민첩하였으므로, 서울과 지방의 관직을 역임하는 동안 모두 위대한 업적이 있었다.
조용히 재단하여 처리하는 일마다 상황에 맞았으므로 법이 바로 서고 백성이 편안해했으며 공효는 이루어지고 자취는 요란하지 않았다. 지휘하는 동안에 풍속이 바로 변하였고, 보고 듣는 것 외에도 정신이 두루 미쳤으니, 이것은 오직 공만이 그러할 수 있었다.
정축년(1637, 인조15) 이후, 집에 거처할 때는 사죽(絲竹 음악)을 듣지 않았다. 관직에 나가 상에게 권할 때는 늘 대의는 멸실해서는 안 되며, 나라의 치욕은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간곡히 말하면서 혹 눈물을 흘리기도 했는데, 그 말이 참으로 귀신을 감동시키는 점이 있었다. 그밖에 조정에서 벼슬할 때의 언론은 모두 온전한 충성의 절조로 정대한 말을 하였고, 고금(古今)을 참작하고 의리(義利)를 판별한 것은 언제나 근본적이고 장구한 계책에 대한 것이었다.
귀양에서 등용되어 다시 정승으로 들어왔을 때, 시세는 갈수록 어려워지는데 더욱 전적으로 위임하였다. 대개 임금의 덕을 바로 하여 교화의 근원을 맑게 하고 폐정을 혁신하여 민력을 두텁게 하며, 언로를 열고 아랫사람들의 심정을 통하게 하며, 인재를 거두고 경제(經制 떳떳한 제도)를 정하여, 일시의 비루한 속된 논의를 씻고 백년 된 무너진 기강을 떨치며, 나라가 거듭 쇠퇴한 시기에 사기(士氣)를 북돋우고 내정(內政)의 편에서 나라의 정책을 구하여, 나라 형세가 장중해지고 왕조의 위엄을 떨치게 함으로써 중흥하여 크게 일어설 뜻을 돕기를 바란 것이다.
공은 늘 말하기를 “임금이 바른 뒤에 나라가 다스려지며, 스스로 다스리고 난 뒤에 남을 도모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니, 그 자임(自任)을 무겁게 하고 계획을 이루는 세심함은 결단코 바꿀 수 없을 것이다. 비록 국정을 맡은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아 그 뜻을 끝까지 펴서 성공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경륜과 경략은 대개 살펴볼 수 있다. 관직을 떠나 집에 있을 때에도 오히려 사안에 따라 의견을 올렸으니, 누차 대계(大計)를 진달하고 간곡하게 되풀이하면서 평생을 마쳤다.
아! 우리 효종대왕(孝宗大王)께서 나라를 부흥시키려는 계획에 힘써 현자를 애타게 구하시어, 원년(元年)에 맨 먼저 쫓겨난 와중에서 공을 등용하여 국정을 보좌하고 국난을 구제하는 자리로 승진시켜 마치 훌륭한 성과를 이룰 수 있을 듯하였다. 그러나 관직에 1년을 있지 못하여 충분히 행할 조짐이 있었는데도 그치고 말아서 성상께서는 조정에서 기쁘지 못하였고 뜻있는 선비는 시운을 돌아보며 한탄하였으니, 하늘의 뜻인가, 사람의 뜻인가? 아마도 성고(聖考 효종(孝宗))의 말씀처럼 용사(用捨 등용하고 버림)에 명이 있어서,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인가. 아, 애통하도다!
공은 문장을 지을 때, 어렵거나 모방하는 표현을 쓴 적이 없었다. 쌓은 것이 두터웠기 때문에 그 발현을 막을 수 없었으며, 경학에 근본을 두고 사리를 끝까지 탐구하였다. 보기 어려운 실정을 드러내면서도 정기와 광채가 빛나고 조리가 명백하여 절로 법도를 이루었다. 시(詩) 또한 정경(情境)을 위주로 하면서 고결하고 전아하게 뜻을 깃들였는데, 연고가 있지 않으면 짓지 않았기 때문에 저작이 많지 않다. 공이 지은 시문(詩文) 약간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 서하 이민서 선조, 선고영의정부군가장〔先考領議政府君家狀〕 서하집 행장(行狀)에서
백강공은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워서 안으로 강건하고 밖으로는 따뜻하였는데, 정순(精純)한 기(氣)가 커서 안팎으로 맑게 빛났으며 화락하고 순조로운 기운이 용모에까지 이르렀다. 어렸을 때부터 다투거나 화를 내는 기색이 없었다. 남들과 말을 할 때는 마음이 평안하고 정신이 안정되어 말을 하면 사람들이 신뢰하였다. 평소에는 즐거웠고 시원하여 자연스러웠지만 일을 당해서는 오로지 떳떳한 도리로 처리하였고 의리상 마땅히 해야 할 일에는 과감히 힘썼으니, 늠름하여 뜻을 빼앗을 수 없었다.
일찍이 옛사람의 마음을 잡아 보존하고 성찰하는 방도에 마음을 다하고 경사(經史)를 참고하여 의리의 깊은 근원을 훤히 알았다. 일상생활에서는 차근차근 법도가 있었으며, 규문(閨門) 안에서는 엄숙하면서 화목하였고 조리가 지성스러워 엄격하지 않았는데도 집안이 다스려졌다.
책 읽기를 좋아하여 날마다 정해 놓고 공부를 했으며 앉으나 누우나 반드시 책을 손에 들고 있었고 드나들 때도 가지고 다녔으며 질병에 걸렸을 때에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특히 밤이나 아침에 책 읽기를 즐겨 나이가 고령이 되고 관직이 높아졌을 때에도 여전히 그만두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밤기운은 고요하고 아침 기운은 맑아서, 공효는 배나 되고 쉽게 스스로 습득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송 정언 몽석(宋正言夢錫)과 밤에 앉아 책을 읽는데, 송공(宋公)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이러한 때에 마음의 본체를 묵묵히 살피는가. 옛사람이 말한 광풍제월(光風霽月)이란 것을 더욱 징험할 수 있네. 사람이 이때의 광경을 늘 보전할 수 있으면 성현(聖賢)의 마음일세.”라고 하였다.
상을 당했을 때 책을 읽고 있었는데 흔연히 마음에 깨달은 데가 있자,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슬픔을 잊는 경지에 가깝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이어 책 읽기를 그만두려다가, 이윽고 다시 생각하고 말하기를 “상중에 책 읽기는 성인(聖人)께서 금한 적이 없으니, 이는 분명 마음을 바로 하는 데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효우(孝友)에 돈독하였다. 부모를 모실 때 좌우로 어김이 없었고 힘을 다하여 터럭만큼도 유감이 없도록 하였다. 내 증조모 정 부인(鄭夫人)은 연세가 근 백 세였는데, 삭망(朔望)이면 공은 반드시 집안사람들을 모아 술자리를 마련하였고 매번 형제들이 즐겁게 모였고 어린 자손들은 재롱을 피웠다. 공은 윗사람을 받들고 아랫사람을 돌보는 가운데, 정 부인을 즐겁게 하려는 의도로 우스갯소리를 지어냈으니 모두 지극한 사랑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공 때문에 집안사람들이 더욱 친해졌고 술자리가 파한 뒤 정 부인은 기쁜 마음으로 공을 칭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선왕부(先王父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만년에 세상에 분노하다 술병이 들어 행동을 마음대로 하였고, 혹 어두운 밤에 홀로 외출하여 집안사람들이 간 곳을 알지 못했다. 공이 매번 울면서 달려 나가 걸어서 그 뒤를 따라가다가 여러 날 돌아오지 못하고 다리에 피를 흘린 적도 있었다. 병환을 앓은 지 10년 동안 공은 옷에 허리띠를 풀지 않았고 약물은 공이 직접 짓고 맛보지 않으면 함부로 올리지 않았으며, 돌아눕거나 부축할 때는 다른 사람에게 대신 시키지 않았다.
정묘년(1627, 인조5) 이후, 선왕모(先王母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연세가 더욱 높아져 공이 마침내 백마강 가로 모시고 돌아갔다. 이에 사방으로 다니며 벼슬하려는 뜻을 접고 봉양에 전심하니, 아무리 자주 상께서 불러도 피할 수 없을 때만 한번 취임하고는 오래 밖에 있던 적은 없었다.
공의 동생 생원공(生員公)이 일찍 세상을 뜨자 공은 가까운 곳에 집을 짓고 홀로된 제수씨를 거처하게 하고 옷과 음식을 함께 나누었다. 가난하게 사는 누이 한 명이 있었는데, 공은 그 집안일을 보살피고 조카들을 자기 자식처럼 돌보아 모두 가르치고 키워서 시집, 장가보냈다.
형제가 적은 것을 스스로 상심하여 제종(諸從 사촌 형제)에게 우애를 더하였으니, 내제(內弟) 송공 몽석(宋公夢錫)과 집은 따로 살면서도 재산을 함께 나누었고 은혜가 동기간 같았으며, 송공이 세상을 떠나자 과부가 된 제수씨와 남은 자식을 매우 독실하게 보살폈다. 원근의 집안사람들 중에 의탁할 데가 없는 사람은 모두 공에게 귀의하였고, 음식과 의복을 구제해 주어 그 뜻과 생업을 이루어 주었다.
다른 사람과 교유할 때는 내내 변치 않았으며, 오랜 벗의 생사, 가난과 질병, 곤궁에 대해서는 곡진하게 은혜로운 마음을 가졌다. 사람을 만날 때는 현우(賢愚)나 귀천(貴賤)이 없었고, 한결같이 성의로 대하였으므로 다른 사람들도 다 마음을 씻고 성의를 바쳤으며, 아무리 불초한 사람도 오직 그의 허물을 드러낼까 근심하였으니, 공이 사람을 사랑함에 인자하기가 끝이 없었다.
성품이 진기한 완구를 좋아하지 않았고, 사치스러운 그릇과 용구를 더욱 싫어했다. 공은 물건에 대해 담백하여 남달리 좋아하는 기호가 없었으며, 자신의 생활은 매우 검약하여 떨어진 옷과 거친 밥을 평소 습관처럼 편안해했다. 평생 살림에 관한 일은 언급하지 않았으며, 정승의 귀한 자리에 이르러서도 처자식이 집에서 고생하였고 간혹 죽도 넉넉하지 못하였다.
괴이하고 특별한 행위를 하지 않았지만 취하고 버리는 일이나 사양하고 받는 데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변별하였고, 자신을 바르게 견지하였으므로 남들이 감히 사사롭게 청탁하지 못하였다.
평소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여 한적하게 속세를 떠날 마음이 있었다. 소년 시절에 여강(驪江)을 오간 것이 또한 10년이었고, 늘그막에 백강을 알게 되어 호산(湖山)의 절경을 감상하면서 백강 가에 살 터를 잡았다. 좌우에 도서를 쌓아 두고 한가로이 거닐면서 즐겁게 지냈다. 또 산마루에 서실을 지었는데 깎아지른 절벽에 둘러싸여 큰 강을 내려다보고 있어 간혹 손님이나 교유하는 인사들이 오지 못하였다. 매번 한겨울에 눈이 쌓이거나 봄가을로 달이 차면 더욱 즐겨 거처하였다. 공이 그 사이에 이를 때마다 문을 닫아걸고 꼿꼿이 앉아 정신을 모으고 조용히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이렇게 한 것이 여러 해였는데, 그 가운데 깨달은 바는 엿볼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조정에 벼슬한 지 50년 동안 물러난 적이 많고 나아간 적은 적었다. 모든 권세와 이록(利祿)에 대해서는 마치 겁 많은 필부처럼 피하였다. 늘 명절(名節)을 스스로 조심하였으며 비록 위험하거나 욕을 당하는 상황이라도 지조를 변한 적이 없었다. 두 번이나 심양(瀋陽)에 갇혔을 때는 호랑이 입에 들어간 듯 위태로웠고, 남쪽 지방으로 귀양 갔을 때는 상이 진노하여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경우를 당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낯빛이 변하고 슬퍼하게 마련인데, 공은 홀로 걱정하는 기미가 없이 만번 죽을 처지에서도 온화하였으니, 또한 공의 큰 절개는 깊이 길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공은 시무를 처리하는 능력도 넉넉하여 청단(聽斷 송사를 판단함)은 몇 사람 몫을 하였으므로, 관직에 있을 때 사안의 대소에 상관없이 모두 직접 처리하였다. 또 인정을 살펴 호오와 고통이 있는 데를 파악하여 지성으로 보호하였다. 봉직할 때는 근면하였고 일 처리는 민첩하였으므로, 서울과 지방의 관직을 역임하는 동안 모두 위대한 업적이 있었다.
조용히 재단하여 처리하는 일마다 상황에 맞았으므로 법이 바로 서고 백성이 편안해했으며 공효는 이루어지고 자취는 요란하지 않았다. 지휘하는 동안에 풍속이 바로 변하였고, 보고 듣는 것 외에도 정신이 두루 미쳤으니, 이것은 오직 공만이 그러할 수 있었다.
정축년(1637, 인조15) 이후, 집에 거처할 때는 사죽(絲竹 음악)을 듣지 않았다. 관직에 나가 상에게 권할 때는 늘 대의는 멸실해서는 안 되며, 나라의 치욕은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간곡히 말하면서 혹 눈물을 흘리기도 했는데, 그 말이 참으로 귀신을 감동시키는 점이 있었다. 그밖에 조정에서 벼슬할 때의 언론은 모두 온전한 충성의 절조로 정대한 말을 하였고, 고금(古今)을 참작하고 의리(義利)를 판별한 것은 언제나 근본적이고 장구한 계책에 대한 것이었다.
귀양에서 등용되어 다시 정승으로 들어왔을 때, 시세는 갈수록 어려워지는데 더욱 전적으로 위임하였다. 대개 임금의 덕을 바로 하여 교화의 근원을 맑게 하고 폐정을 혁신하여 민력을 두텁게 하며, 언로를 열고 아랫사람들의 심정을 통하게 하며, 인재를 거두고 경제(經制 떳떳한 제도)를 정하여, 일시의 비루한 속된 논의를 씻고 백년 된 무너진 기강을 떨치며, 나라가 거듭 쇠퇴한 시기에 사기(士氣)를 북돋우고 내정(內政)의 편에서 나라의 정책을 구하여, 나라 형세가 장중해지고 왕조의 위엄을 떨치게 함으로써 중흥하여 크게 일어설 뜻을 돕기를 바란 것이다.
공은 늘 말하기를 “임금이 바른 뒤에 나라가 다스려지며, 스스로 다스리고 난 뒤에 남을 도모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니, 그 자임(自任)을 무겁게 하고 계획을 이루는 세심함은 결단코 바꿀 수 없을 것이다. 비록 국정을 맡은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아 그 뜻을 끝까지 펴서 성공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경륜과 경략은 대개 살펴볼 수 있다. 관직을 떠나 집에 있을 때에도 오히려 사안에 따라 의견을 올렸으니, 누차 대계(大計)를 진달하고 간곡하게 되풀이하면서 평생을 마쳤다.
아! 우리 효종대왕(孝宗大王)께서 나라를 부흥시키려는 계획에 힘써 현자를 애타게 구하시어, 원년(元年)에 맨 먼저 쫓겨난 와중에서 공을 등용하여 국정을 보좌하고 국난을 구제하는 자리로 승진시켜 마치 훌륭한 성과를 이룰 수 있을 듯하였다. 그러나 관직에 1년을 있지 못하여 충분히 행할 조짐이 있었는데도 그치고 말아서 성상께서는 조정에서 기쁘지 못하였고 뜻있는 선비는 시운을 돌아보며 한탄하였으니, 하늘의 뜻인가, 사람의 뜻인가? 아마도 성고(聖考 효종(孝宗))의 말씀처럼 용사(用捨 등용하고 버림)에 명이 있어서,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인가. 아, 애통하도다!
공은 문장을 지을 때, 어렵거나 모방하는 표현을 쓴 적이 없었다. 쌓은 것이 두터웠기 때문에 그 발현을 막을 수 없었으며, 경학에 근본을 두고 사리를 끝까지 탐구하였다. 보기 어려운 실정을 드러내면서도 정기와 광채가 빛나고 조리가 명백하여 절로 법도를 이루었다. 시(詩) 또한 정경(情境)을 위주로 하면서 고결하고 전아하게 뜻을 깃들였는데, 연고가 있지 않으면 짓지 않았기 때문에 저작이 많지 않다. 공이 지은 시문(詩文) 약간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 서하 이민서 선조, 선고영의정부군가장〔先考領議政府君家狀〕 서하집 행장(行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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