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령이 거문고 타는 것을 들으며 (觀聽彈琴) ~ 강한 황경원 선생
홍양지 재 의 청원관 잔치에서 거문고 타는 것을 보다〔讌洪養之 梓 淸遠 觀聽彈琴〕
와병 생활 혹독하여 즐거움 없어 / 卧病悄無歡
그대가 생각나 홀로 가노라 / 懷人聊獨往
가을 깊어 산 속 나무 성글고 / 秋高山木疎
밤 깊어 은하수 넓게 펼쳐졌구나 / 夜永天河廣
헌걸찬 홍양지는 / 有頎洪養之
아름다운 문장 어찌 그리 뛰어난고 / 淸藻何遒朗
드디어 이원령을 맞아 / 遂邀李元靈
좋은 날 함께 노닐게 되었네 / 良辰共偃仰
때마침 홀로 거문고를 타는데 / 孤琴時自彈
오음이 번갈아 일렁이누나 / 五音迭相盪
처음엔 엄숙하게 우성이 드날리더니 / 羽聲厲初揚
슬프고도 낭랑한 상성이 울려라 / 商聲哀且爽
모두 공상과 잘 어울리니 / 一與空桑和
마치 광릉산을 감상하는 듯 / 還同廣陵賞
밝은 달 수풀 끝에 걸릴 때 / 明月挂林端
다시 〈유수곡〉을 듣노라 / 更聽流水響
[주-D001] 홍양지(洪養之) : 홍재(洪梓, 1707~1781)이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양지(養之)로, 홍귀조(洪龜祚)의 아들이다. 1753년(영조29) 시직(侍直)으로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1757년 수찬으로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정언ㆍ부교리ㆍ부수찬ㆍ헌납ㆍ대사간을 역임하였고 1769년 동지 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한성부 좌윤과 대사헌을 지냈다. 문필에 능하여 북청의 〈이지란신도비(李之蘭神道碑)〉와 경주의 〈삼강묘비(三綱廟碑)〉가 있다.
[주-D002] 청원관 : 홍재(洪梓)가 소유하고 있던 누관(樓觀)이다. 황경원이 지은 〈이원령 묘지명(李元靈墓誌銘)〉에 “성보가 일찍이 밤에 술병을 끼고 홍씨의 청원관에서 술을 마시면 군 역시 흔연히 그를 따라 갔다.〔成甫嘗夜携酒, 飮于洪氏淸遠觀, 君亦欣然而從之.〕”라는 대목이 있다. 《江漢集 卷15》
[주-D003] 이원령(李元靈) : 이인상(李麟祥, 1710~1760)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원령(元靈), 호는 능호관(凌壺觀)ㆍ보산자(寶山子)이다. 고조부는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경여(李敬輿)이나 증조부가 서자였기 때문에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뒤 음보(蔭補)로 참봉(參奉)이 되고 음죽 현감(陰竹縣監) 등을 지냈으나, 관직을 그만두고 은거하며 벗들과 시ㆍ서ㆍ화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는데 그중에서 이윤영(李胤永)ㆍ송문흠(宋文欽)ㆍ김무택(金茂澤) 등과 가장 가깝게 지냈다. 특히 효종대왕의 북벌론을 찬성하고 배청사상을 지니고 있어 황경원과는 이념적 성향이 같았다. 문집으로 《능호집(凌壺集)》이 있다.
[주-D004] 우성(羽聲) : 오음의 하나로 강개하고 격앙된 소리이다.
[주-D005] 상성(商聲) : 오음 중 맑고 슬픈 음색을 띤 소리이다.
[주-D006] 공상(空桑) : 고대의 유명한 비파의 이름이다.
[주-D007] 광릉산(廣陵散) : 혜강이 즐겨 연주하던 금곡(琴曲) 이름. 진(晉)의 혜강(嵆康)이 사마소(司馬昭)에게 끌려 동시(東市)의 형장으로 갔을 때 태학생(太學生) 3천 명이 나서서 그를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청했으나 사마소가 불허하자, 혜강은 그 전에 화양정(華陽亭)에서 자면서 어느 나그네에게 전수받았던 광릉산(廣陵散)을 마지막으로 거문고 가락에 울려 연주했다고 한다. 《晉書 卷49 嵆康列傳》
[주-D008] 유수곡 : 춘추 시대 백아(伯牙)가 타고 그의 벗 종자기(鍾子期)가 들었다는 거문고 곡조이다. 〈고산유수곡(高山流水曲)〉 또는 〈아양곡(峨洋曲)〉이라고도 한다. 백아가 마음속에 ‘높은 산〔高山〕’을 두고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이를 알아듣고 “아, 훌륭하다. 험준하기가 태산과 같다.〔善哉! 峨峨兮若泰山.〕”라고 하였고, 백아가 마음속에 ‘흐르는 물〔流水〕’을 두고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이를 알아듣고 “아, 훌륭하다. 광대히 흐름이 강하와 같다.〔善哉! 洋洋兮若江河.〕”라고 하였다. 《列子 湯問》
강한집 제1권 / 시(詩)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 박재금 이은영 홍학희 (공역) | 2014
*** 지은이~ 황경원[黃景源] 자 대경(大卿), 호 강한유로(江漢遺老), 시호 문경(文景) ***
출생 - 사망 :1709년(숙종 35) ~ 1787년(정조 11)
본관 : 장수(長水)
저서(작품) : 남명서(南明書), 명조배신전(明朝陪臣傳), 강한집
대표관직(경력) : 호조참판, 홍문관제학, 대제학, 공조판서
1709(숙종 35)∼1787(정조 11). 조선 후기의 문신·예학자(禮學者).
개설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대경(大卿), 호는 강한유로(江漢遺老). 황휘(黃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정랑 황처신(黃處信)이고,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황기(黃璣)이며, 어머니는 권취(權冣)의 딸이다. 황승원(黃昇源)의 형이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27년(영조 3) 19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 뒤 의금부도사를 지내다가 174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고, 이어 예문관검열·병조좌랑을 거쳐, 홍문관응교로 있을 때에는 명나라 의종(毅宗)의 추사(追祀)를 건의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대사성·대사간·대사헌 겸 양관제학(兩館提學) 등의 청화직(淸華職)을 거쳐, 1761년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나, 고서(姑壻) 이정(李涏)의 상언사건(上言事件)에 연좌되어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이듬해합천으로 이배되었다가 고향으로 방환(放還)되고, 이듬해에는 풍천부사로 복관되어 영조가 죽기까지 12년 동안 호조참판·홍문관제학·이조참판 겸 대제학과 형조·예조·공조의 판서 등으로 활약하였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면서 모두 사양하고 중추부판사로 죽었다.
서예에도 뛰어났으며, 예학(禮學)에 정통하고 고문(古文)에도 밝아, 오원(吳瑗)·이천보(李天輔)·남유용(南有容) 등이 그를 따르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항상 춘추대의(春秋大義)로 자임하여 1418년(영락 16, 태종 18)부터 1645년(홍광 1, 인조 23)까지의 『남명서(南明書)』를 편찬하였고, 또 명나라 의종 이래로 명나라에 대한 절의를 지킨 조선 사람들의 전기(傳記)인 『명조배신전(明朝陪臣傳)』을 저술하였다. 문집으로 『강한집』 32권 15책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황경원 [黃景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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