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님

[스크랩] 백강 이경여 선생 신도비문

jookwanlee 2015. 2. 23. 15:16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직부(直夫), 호는 백강(白江)·봉암(鳳巖). 세종의 7대손이며, 할아버지는 첨정(僉正) 극강(克綱)이고, 아버지는 목사 유록(綏祿)이며, 어머니는 송제신(宋濟臣)의 딸이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1611년 검열이 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이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직후 수찬(修撰)에 취임했고,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에 호종하였다. 이어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이 되었으며, 1630년(인조 8) 부제학(副提學)·청주목사·좌승지·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피란하였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가 되고, 그 뒤 이조참판으로 대사성을 겸임해 선비 양성의 방책을 올렸고, 이어 형조판서에 승진하였다.

1642년 배청친명파로서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음을 이계(李烓)가 청나라에 밀고해 심양(瀋陽)에 억류되었다가 이듬해 세자와 함께 귀국해 대사헌이 되었고, 이어 우의정이 되었다. 1644년 사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다시 억류되었으나, 그 동안 본국에서는 영중추부사라는 벼슬을 내렸다.

이듬해 귀국, 1646년 민회빈 강씨(愍懷嬪姜氏:昭顯世子嬪)의 사사(賜死)를 반대하다가 진도에 유배되고, 다시 1648년 삼수에 위리안치되었다. 이듬해 효종이 즉위하자 풀려 나와 1650년(효종 1)에 다시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이어 영의정으로 다시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청나라의 압력으로 영중추부사로 옮겼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와 흥덕(興德)의 동산서원(東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강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백강 이경여(1585-1657) 선생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대사성 형조판서 우의정 영중추부사 영의정을 지냈으며 시문과 글씨가 뛰어났다.백강집 문집을 남겼고 내촌면 음현리 산31-3번지에 묘가 있고, 신도비는 1669년(현종 10년)에 건립하였으며 송시열선생 비문으로 심익현 선생이 글씨를 쓰고 김만중 선생이 각하였다고 되어 있으면 국역된 비문은 다음과 같다. 

숭정(崇禎) 을유년(乙酉年, 1645년 인조 23년)에 임금이 이르기를, “세자(世子)가 졸(卒)하고 그의 아들이 어리니, 내가 장차 현능(賢能)하고도 장성한 사람을 세자로 선택하겠다.” 하자, 군신(群臣)이 모두 “전교(傳敎)가 지당하십니다.” 하였으나, 영의정(領議政) 백강(白江) 이공(李公, 이경여(李敬輿))만은 홀로 불가하다는 의사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어린 아들의 어머니가 죄를 입어 죽게 되자 공이 또한 힘을 다해 다투니, 임금이 전사(前事)를 가지고 공을 남방(南方, 진도(珍島)임)에 귀양 보냈다가 다시 북쪽 아주 궁벽한 먼 곳(삼수(三水)임)으로 이배(移配)시켰다.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이 드디어 차적(次適)으로 왕위(王位)에 오르자 즉시 공을 특사(特赦)하고, 풀려 돌아온 지 두어 달도 못되어 상공(相公)에 복직시켰다.

공은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중대한 명을 받아 매양 정심(正心)ㆍ성의(誠意)의 설(說)로 임금 앞에 진주(陳奏)하여 백성들과 화합하고 천명(天命)을 기도하는 근본으로 삼으니, 온 사방이 다같이 공에게 국운(國運)을 회복시킬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으나, 공은 곧 졸(卒)하고 말았다. 그러나 모두가 이르기를, “성인(聖人) 임금에 현인(賢人) 신하가 있기로는 삼고(三古) 이래로 드문 일이다.” 하였다.

공의 휘(諱)는 경여(敬輿)이고 자(字)는 직부(直夫)인데, 우리 세종 대왕(世宗大王)의 7대손이다. 세종 대왕의 별자(別子)인 밀성군(密城君) 휘(諱) 침(琛)으로부터 3대를 지나 왕실(王室)과의 친속(親屬) 관계가 조금 소원(疏遠)해진 때에 미쳐 비로소 드러난 이가 있었으니, 이가 곧 첨정(僉正) 이극강(李克綱)으로 공의 아버지인 목사(牧使) 이수록(李綏祿)이 바로 그의 아들이다. 목사공(牧使公)은 훌륭한 행실과 아름다운 덕이 있어 사대부(士大夫)들이 지금까지 그를 칭송한다.

공은 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資質)이 있어 15세 되었을 때에 명나라의 동 낭중(董郎中, 동한유(董漢儒))이 공을 만나보고서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비록 중국에서 났다 할지라도 반드시 세상에 높이 이름을 떨칠 사람이다.” 하였다. 17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25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한림(翰林)으로서 권신(權臣)의 자식을 천거하지 않고 장유(張維)공을 천거하여 자신의 직책을 대신하게 하였다. 공과 장공(張公)이 다 소인들로부터 참소를 받게 되자, 공은 스스로 인책하고 외직으로 나가기를 요청하여 이천 현감(利川縣監)을 거쳐 충원 현감(忠原縣監)으로 옮겼다. 그때 부역(賦役)이 매우 번거로웠으나 공이 규획(規畫)을 잘 짜서 방도가 있게 함으로써 백성에게 미친 혜택이 많았다. 그 뒤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서 곧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였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에 인조 대왕(仁祖大王)이 즉위하였다. 이에 앞서 이이첨(李爾瞻) 등이 비록 공을 미워하였으나, 인품(人品)과 지망(地望)으로 항상 청요직(淸要職)에 있었는데 공이 문득 사퇴하고 물러갔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맨 먼저 공을 수찬(修撰)으로 부르자, 공은 매양 임금께 왕도(王道)로 마음을 가질 것을 청하니, 당시에 관상(管商, 관중(管仲)과 상앙(商鞅))의 설(說)을 숭상하는 자들이 기세를 펴지 못하였다. 이때 (이이첨 등) 원악(元惡)은 이미 복주(伏誅)되었는데, 공은 간직(諫職)에 있으면서 그의 당여(黨與)까지 구태여 근절시킬 필요는 없다고 말하여 관대한 전법(典法)을 보이게 하였다. 부모가 늙었다는 이유로 지방 수령으로 나가기를 요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특별히 쌀과 콩을 하사하였다. 이해 겨울에 이조 낭관(吏曹郎官,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옮겨졌으나 공은 남달리 청정(淸正)하여 시비 선악을 분명히 처결함으로써 요행의 문(門)을 스스로 막았다.

이듬해에 (이괄(李适)의) 난(亂)으로 인하여 남쪽으로 내려가서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고, 이어 겸 문학(兼文學)이 되어 세자(世子)를 시강(侍講)하였다. 그 뒤 얼마 안되어 사명(使命)을 받들고 서남(西南) 지방에 갔다가 돌아와서 서수(西帥)를 갈아야 한다는 장문(狀文)을 올렸으나 조정에서는 들어주지 않았는데 뒤에 과연 실패하였다. 응교(應敎)ㆍ전한(典翰)을 거쳐 사간(司諫)이 되었는데, 청음(淸陰)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이 기회를 엿보아 수완을 휘두르는 조신(朝紳)을 논박하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려 파면된 일과 또 임금이 사친(私親)의 상(喪)을 당하여 중궁(中宮)의 예(禮)를 쓰려는 데 대해 공이 변론하여 매우 강력하게 저지하다가 마침내 파면되고 말았다.

다시 서용(敍用)되어 시정(寺正)이 되고, 중국 사신[詔使]이 왔을 때 연접사(延接使)가 되었으며, 도청(都廳)으로서 폐조(廢朝, 광해조(光海朝)를 가리킴)의 실록(實錄)을 수찬(修撰)하는 데 참여하였다. 다시 사가 독서(賜暇讀書)를 한 다음 호패(號牌)를 차고 명을 받들어 호남(湖南) 지방에 찰거(察擧)하러 나갔다가, 노변(虜變)이 있다는 말을 듣고 호남으로부터 즉시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집의(執義)에 제수되고 이어 승지(承旨)에 올랐으며, 얼마 후 다시 충청도 감사(忠淸道監司)가 되었다. 공은 교만하고 방자한 훈귀(勳貴)들을 내쫓는 데 무릇 큰 이해(利害)가 달려 있을 경우에는 조정에 극력 주청하여 반드시 내쫓고야 말았다.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서 대사성(大司成)ㆍ이조 참의(吏曹參議)ㆍ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였다.

이때 공이 부여(扶餘)에 복거(卜居)해 있으면서 여러 번 소명(召命)을 사양하고 부모 봉양을 위해 청주 목사(淸州牧使)가 되었는데, 관리들은 공을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공을 사랑하여 명령하지 않아도 모두가 일에 잘 따라 주었다. 공은 매양 공무를 마친 여가에는 흥취(興趣)를 가져서 속세(俗世)를 벗어나는 고상한 생각이 있었다. 다시 들어와서 부제학(副提學)이 되어 차자(箚子)로 8조목을 진계(陳啓)하여 학문에 진취하고 궁중(宮中)을 잘 어거하는 일로 근본을 삼게 하니, 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겨 구마(廐馬)를 하사하였다. 어버이의 병환으로 남쪽으로 내려가기 위해서 면직시켜 줄 것을 간절히 바랬으나 윤허 받지 못하였다. 마침내 승지(承旨)로 부르자 조정에 들어가서 글 읽은 사람이 항상 경악(經幄, 경연(經筵))에 있어야 한다는 점을 논하였고, 다시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인목 대비(仁穆大妃)가 죽었을 때 빈전(殯殿)에 조알의(朝謁儀)를 정지한 데 대해 공이 차자를 올려 시정함으로써 이로부터 그대로 법령(法令)이 되었다. 임금이 또 친히 무고옥(巫蠱獄)을 다스렸는데 옥사(獄辭)가 자못 빈전(殯殿)에게까지 침범하자 공이 정성을 다하여 조호(調護)함으로써 임금이 마음에 깊이 느껴 깨달아 성효(聖孝)를 다하게 되었다. 공이 귀성(歸省)을 마치고 오자 조정에서 공에게 전라도 감사(全羅道監司)를 제수하고 겸하여 편의 종사(便宜從事)하도록 하였다. 공은 이(利)와 병폐에 관한 열 가지 일을 조목조목 열거하여 올렸는데, 정치를 하는 데 하나같이 지방의 호족(豪族)들을 억누르고 가난한 백성들을 붙들어 주는 일을 급선무로 삼았다.

갑술년(甲戌年, 1634년 인조 12년)에 정전(正殿)에 뇌진(雷震)이 있었다. 공은 이때 조정에 돌아와서 옥당(玉堂, 홍문관(弘文館))의 장(長)이 되었는데 매우 간절히 진계(進戒)하였다.

을해년(乙亥年, 1635년 인조 13년)에 인열 왕후(仁烈王后, 인조비(仁祖妃) 한씨(韓氏))가 승하하자 공이 부여(扶餘)에서 올라와서 소(疏)를 올려 임금이 기년복(朞年服)을 입지 않고 주상(主喪)을 하지 않는 것과 세자가 진현(進見)할 때 반길복(半吉服)을 입는 것은 모두 예(禮)가 아니라고 논하였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에 오랑캐[虜]와 불화(不和)의 단서가 열리자 공이 매우 분발(奮發)한 말을 진계하고, 또 아뢰기를, “임금께서 이미 대의(大義)에 의거하여 저들을 배척하여 대의를 지향하는 소리가 이미 드러났는데, 도리어 국가의 체통을 떨어뜨리고 애걸 복걸하며 화친하기를 요청한단 말입니까? 차라리 나라가 멸망할지언정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하겠습니까?” 하였다. 이해 겨울에 오랑캐가 과연 대거 침입해 오자, 공이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이듬해 여름에는 경상도 감사(慶尙道監司)에 제수되었는데 공이 (문경(聞慶) 북쪽) 어류(御留, 어류 산성)의 형세가 관방(關防)이 될 만함을 보아 두었다가, 돌아와서는 여기에 성을 쌓아서 위급한 때에 대비하기를 청하였다. 이후로는 항상 논사(論思)의 직책에 있으면서 정엽(鄭曄)공의 고사(故事)에 따라 대사성(大司成)을 겸임하였고, 이어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 어버이를 위하여 여주 목사(驪州牧使)로 나가게 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대부인(大夫人)이 세상을 떠났다. 상(喪)을 마치자 임금이 공을 등용하기 위해 부르기를 더욱 마지않았다.

노인(虜人)이 어떤 사건(事件)으로 인하여 이계(李烓)를 잡아다가 신문하자, 이계는 자기가 죽는 것을 면하기 위해 ‘공이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노(虜)의 연호(年號)도 쓰지 않으며, 그의 뜻은 항상 남조(南朝, 명(明)나라를 가리킴)에 있다’고 밀고(密告)함으로써 오랑캐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공을 잡아 가지고 돌아갔다. 그러나 공은 태연히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모두가 운명이다.” 하였다. 그 뒤 여러 달만에 조정에서 벌전(罰錢)을 들여보냄으로써 공이 마침내 돌아오게 되었다.

공이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을 때 나라의 풍속이 점점 오랑캐의 풍습[胡習]에 물듦으로 공이 법제를 확립하고 기강(紀綱)을 바로잡되 특히 잃어버린 기강을 바로잡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다.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임금이 오랫동안 병환이 있었던 터라 요인(妖人)의 말을 받아들여 그의 사술(邪術)을 쓰려 하므로, 공이 마음을 맑게 하고 흉심을 적게 하여 명(命)을 세우고 이치를 밝히며 정도를 지켜서 사(邪)를 멀리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곧 그날로 요인에게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이윽고 공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노중(虜中)에 갔는데, 오랑캐가 전일의 원한을 가지고 부사(副使)로 하여금 사명을 마치게 하고는 이내 공을 구금하였다. 뒤에 노인(虜人)이 전후(前後)로 구급했던 몇 사람을 모두 석방하여 저들의 만족한 뜻을 보임으로써 공이 마침내 청음공(淸陰公,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세자(世子)를 따라 본국(本國)으로 돌아왔으나 세자는 세상을 떠났다. 효종(孝宗)이 즉위한 처음에 해괴한 기미가 은밀히 일어나고 유언비어(流言蜚語)가 발생하였으나, 공이 수상(首相)으로서 조용히 처리하여 끝내 무사하게 되었다.

공은 일찍이 노인(虜人)에게 가까이하지 않았으므로 노인이 본디 좋아하지 않았는데, 노인이 일찍이 사신(使臣)의 임무를 억지로 정지시키자 공이 말하기를, “적인(敵人)으로 하여금 우리나라 사람의 금종(擒縱, 생금(生擒)함과 석방함)을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고 감히 힐난하지 못하니, 어찌 나라의 체통이 설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변사(辨使)를 보내어 맞서 따지니, 노인이 노(怒)하여 말하기를, “이를 주장하는 자가 누구냐?” 하고는 드디어 공까지 아울러 폐고(廢錮)시켰다. 그러자 임금이 공을 불러 보고 눈물을 흘렸다. 공은 비록 자리를 떠나 있었지만 반드시 일에 따라 임금께 납약(納約)하니 더욱 공을 믿고 의지하였다. 일찍이 노중(虜中)에 다시 공에 대한 번잡한 말들이 나돈다 하여 향리(鄕里)에 피해 가 있었는데, 임금은 누차 분부를 내려 공을 소환(召還)하였다.

공이 정유년(丁酉年, 1657년 효종 8년) 8월 8일에 집에서 세상을 떠나자, 임금이 유소(遺疏)를 보고 매우 애통해 하며 추은(追恩)을 특별히 후하게 하였다. 그해 10월에 교하(交河)의 월롱산(月籠山) 아래에 예장(禮葬)하였다. 그 뒤 무오년(戊午年, 1678년 숙종 4년) 4월에 포천(抱川)의 주금산(鑄金山) 남록(南麓)에 천장(遷葬)하였는데, 바로 공의 선영(先塋)으로 윤 부인(尹夫人)의 묘(墓)가 그 위에 있다.

공은 자품(資稟)이 청수하고 아름다우며 힘써 배워서 학문하는 요점을 알았다. 공이 항상 이르기를, “이 마음은 마치 광풍 제월(光風霽月, 비가 갠 뒤의 바람과 달)과 같은 것이니, 야조지기(夜朝之氣, 깨끗하고 조용한 마음)에서 더욱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독서(讀書)로써 물을 대듯 하여 그 인격의 뿌리를 북돋았다. 이 때문에 글을 짓고 일을 처결하는 데도 모두 본말(本末)이 있었다. 일찍이 인조(仁祖)에게 상언(上言)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데 반드시 규모(規模)를 정하고 기강(紀綱)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인주(人主)의 한마음으로 주장을 삼아, 안으로 남이 알지 못하는 지극히 은밀한 곳으로부터 계구(戒懼, 삼가고 두려워함)하고 근독(謹獨, 혼자 있을 때를 삼가는 일)하기를 더욱 엄격하고 긴밀히 하여 인욕(人欲)은 물러가고 천리(天理)가 밝게 드러나도록 한 뒤에야 이 두 가지 일이 근본한 바가 있어서 정립(定立)될 것입니다. 도(道)를 행하는 데는 가인(家人)에게서 가장 먼저 행해야 하는 것이니 스스로 반성하여 위의(威儀)를 가진다면 집안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는 효험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였다.

인조가 몹시 게을러서 시사(時事)가 날로 글러가자, 공은 마침내 고개를 숙이고 배회하여 매사에 후퇴(後退)할 뿐이었고, 정축년(丁丑年, 1637년 인조 15년) 이후에는 더욱 죽지 못한 것을 수치(羞恥)로 여겼다. 일찍이 하정(賀正)하면서 아뢰기를, “거(莒)에 있을 때의 마음을 잊지 마시고1), 존주(尊周)의 의2)(義)를 더욱 돈독히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상담(嘗膽)의 사업3)(事業)에 대해서는 오히려 성상의 더욱 견고해진 뜻을 축하하며 사림(士林)들이 전송(傳誦)하고 있으나 시사(時事)는 더욱 투박하고 해이해져 갑니다.” 하였다. 공이 또 간곡하게 반복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 처음부터 마음을 바르게 하고 덕(德)을 닦으며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구제하였다면, 어찌 오늘날과 같은 변(變)이 있겠습니까? 지금에는 천경(天經)과 지의(地義)를 아주 사소하게 여기고, 민이(民彝, 사람이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와 물칙(物則, 사물(事物)의 법칙)을 괴멸(壞滅)되도록 내버려두어서 온 천하(天下)의 법칙을 보존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대개 공은 임금에게 빙화(氷火)의 뜻이 해이해지지 않게 하려고 하였고, 일을 하는 데는 마치 내정(內政)을 일으키고 군령(軍令)에 붙인다는 관씨(管氏, 관중(管仲))의 글처럼 하여 밖으로는 그 형체가 드러나지 않으면서 안으로는 실상 치도(治道)를 확립시키고자 하였으되, 또한 일찍이 인주(人主)의 몸과 마음에 근본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효종과 어수(魚水)의 정의가 있어서 임금이 매양 공을 대인 선생(大人先生)이라 칭하면서 메아리처럼 서로 대화하였다. 공이 일찍이 임금이 뜻 가짐이 너무 예민하여 지레 화(禍)를 초래할 걱정이 있는 것과 또 수시로 미워하거나 노여워하는 태도가 있는 것에 대하여 차자(箚子)를 올려 말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과인은 기욕(嗜慾)을 단절(斷絶)하고 주야(晝夜)로 노심 초사(勞心焦思)하는 마당에 공리(功利)가 말단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진실로 지극히 통분(痛憤)한 일(병자호란 때 하성(下城)했던 일을 말함)이 마음속에 박혀 있어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근래에는 대각(臺閣)에 당론(黨論)이 서로 치열하여 그를 증오하는 내 마음이 중도를 지나치게 되니, 선생 장자(先生長者)는 이들을 잘 유도하여 이런 풍습이 없도록 할 수 없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공은 반드시 임금에게 먼저 할 것과 뒤에 할 것을 알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공은 너그럽게 인자한 정사(政事)를 청하여 까다로운 정령(政令)을 제거하고, 재간(才幹) 있는 신하를 등용하지 않고 경술지사(經術之士)를 먼저 등용하도록 하였다. 또 양정(良丁)이 날로 줄어드는 것을 염려하여 종모법(從母法)을 시행하기를 청하였고, 서리(胥吏)들의 횡포를 걱정하여 먼저 당오(堂奧)를 맑게 할 것을 청하였다. 효종은 급급하여 게으름이 없었고, 공은 찬찬하여 빨리 하려는 것이 없었으니, 이는 반대되는 것을 가지고 서로가 일을 성취시킨 것이다.

인조 때에 공은 임금이 분발하여 힘써서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였고, 효종조에는 공이 ≪주역(周易)≫에서 말하지 않는 것이 잘 아는 것이라고 하듯이 전혀 말을 하지 않았으니, 이는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처한 것이다. 또 공은 매양 조론(朝論)이 화합하지 못한 것으로써 양익(梁益, 양주(梁州)와 익주(益州))이 반으로 갈라지는 것을 깊이 걱정하여 자주 협동하는 것을 급선무(急先務)로 삼았다. 그러나 반드시 한마음으로 근본을 삼은 것만은 전후 수십 년 동안에 걸쳐 한 본에서 나온 것과 같았다. 진실로 만일 공의 책략을 오래도록 쉬지 않고 베풀었다면 태평 성세(太平盛世)를 기약할 수가 있었건만, 공이 세상을 떠난 지 3년 만에 또 효종이 승하하였으니, 하늘은 어찌하여 이미 성현(聖賢)을 내놓고서 끝내 그와 같은 액운(阨運)을 내렸는가? 아! 슬프다.

공의 초취(初娶)는 영의정(領議政) 윤승훈(尹承勳)의 딸로서 부덕(婦德)이 훌륭하였는데, 효성을 극진히 하다가 그로 인해 죽자 정려(旌閭)되었다. 후부인(後夫人) 임씨(任氏)는 별좌(別坐) 임경신(任景莘)의 딸로서 4남 2녀를 낳았다. 장남 이민장(李敏章)은 청송 부사(靑松府使)이고, 차남 이민적(李敏迪)은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고, 3남 이민서(李敏叙)는 이조 판서(吏曹判書)이며, 4남 이민채(李敏采)는 벼슬이 지평(持平)이다. 장녀는 현감(縣監) 이준(李懏)에게, 차녀는 박세격(朴世格)에게 각각 시집갔다. 측실(側室) 소생으로 아들은 이민철(李敏哲)과 이민계(李敏啓)이고, 딸은 이후필(李後泌)에게 시집갔다. 이민장은 도정(都正) 이초로(李楚老)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이정명(李鼎命)이고, 차남은 이진명(李晉命)이고, 3남은 이태명(李泰命)이고, 장녀는 송주석(宋疇錫)에게, 차녀는 좌랑 신계화(申啓華)에게, 3녀는 진사(進士) 김진규(金鎭圭)에게 각각 시집갔다. 이민적은 부윤(府尹) 황일호(黃一皓)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이사명(李師命)이고, 차남은 이부명(李孚命)이고, 3남은 이이명(李頤命)이고, 4남은 이익명(李益命)이고, 장녀는 김만견(金萬堅)에게, 차녀는 김도제(金道濟)에게 각각 시집갔다. 이민서는 좌의정(左議政) 원두표(元斗杓)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이관명(李觀命)이고, 차남은 이건명(李健命)이며, 장녀는 홍중기(洪重箕)에게, 차녀는 남학명(南鶴鳴)에게, 3녀는 김창립(金昌立)에게 각각 시집갔다. 이준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이겸저(李謙著)이고, 차남은 이승저(李升著)이고, 딸은 김진옥(金鎭玉)에게 시집갔다. 박세격은 2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박태승(朴泰升)이고, 차남은 박태겸(朴泰謙)이다.

공의 부인 (임씨는) 공보다 18년 뒤에 세상을 떠났는데, 처음에는 춘천(春川) 관천리(冠川里)에 장사지냈다가 무오년(戊午年, 1678년 숙종 4년)에 이장(移葬)하여 공의 묘(墓)에 부장(祔葬)하였다.

공은 항상 마음이 즐겁고 평온하여 간격이 없었고 또 일찍이 세속에 유동(流動)하지 않은 점이 있었다. 공은 내행(內行, 집에 있을 때의 행위)이 매우 정직하였고 본디 효제(孝悌)로써 미루어 남에게 미쳤기 때문에, 비록 시론(時論)이 서로 엇갈려 조정에 완전한 사람이 없었지만 공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그의 선(善)을 즐겨 이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 대체로 공의 사적을 이루 다 쓸 수 없으므로 다만 그 세도(世道) 및 시사(時事)에 관계된 큰 것만 기록하였으니, 이는 공의 뜻이기도 하다.

나 송시열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공은 효종 때에 국사(國事)를 위해 큰 모의(謀議)를 하는 데 혹 임금과 서로 불합한 점이 있었지만 ‘지극히 통분한 것이 마음속에 박혀 있다.’는 전교를 공에게만 분명히 말하였으니, 어찌 공만이 이 말을 들을 수 있었음이 아니겠는가? 이는 마치 성문(聖門, 공자(孔子)의 문하)의 3천 명 가운데 오직 단목씨(端木氏, 단목(端木)은 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의 성(姓)임)만이 남이 듣지 못한 것을 들었던 것과 같으니, 후세에 공을 알고자 하는 자는 다만 여기에서 찾아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사람들이 효종의 덕(德)이 하늘처럼 크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역시 공으로 인한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생각건대, 성고(聖考)께서는 천명으로 왕위에 올랐네. 그 누가 제세(濟世)의 인재였던가? 대인 선생(大人先生)이었지. 때는 잘 다스려진 시대인데 서로가 잘도 만났구려. 남다른 공(公)을 잘 알아보아 베푸신 은혜 더 할 수 없었네. 공이 북으로 귀양 가 있을 땐 모두들 야위었다 하였지만, 공이 돌아와 빙그레 웃으니 그 옛날의 모습일세. 만인(萬人)이 이마에 손을 얹으니 사마광(司馬光)과 같았네.4) 난봉(鸞鳳)이 사납지 않으니 악한 새도 그를 보호하네. 성고(聖考)께서 말씀하되 ‘공은 나의 시귀(蓍龜)로다. 나의 진취가 부합되지 못하니 어찌 다스려지지 못함뿐이랴?’ 공이 말하되 ‘우리의 일은 그 욕망 빨리 성취하기 어려우니 우리 백성들과 화합하고 우리 국가 튼튼하게 만들며 조정에서 화협하여 우리의 힘을 기르되 겉으로는 나타남이 없게 하고 마음으론 각오를 단단히 하여 원망과 감정을 깊이 쌓았다가 적당한 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는 대개 근본이 있으니, 곧 성상의 마음입니다. 옛날 주 부자(朱父子)는 송(宋)나라가 망할 때를 당해 임금에게 진계(進戒)한 것이 가장 은미한 것이었습니다. 사욕(私慾)을 잘 이긴다면 무슨 일이든 쉽게 성취될 것입니다.’ 임금이 말씀하되 ‘그러하다. 나는 오직 성공을 바랄 뿐이다. 내가 삼가거니, 공이 어찌 모범을 잃을쏘냐? 이 마음으로 서로 도우면 일이 아주 안전하리라.’ 하셨네. 공을 모르는 자는 공에게 용기가 없다고 하였지. 적(敵)은 문득 우리를 해치고자 하는데 하늘은 기어이 공을 남겨두지 않았네. 그러나 전형(典刑)이 있어 기록이 사씨(史氏)에게 있으니, 뒷날 글 짓는 이 있으면 공의 사적 밝히지 않으랴? 내가 공의 묘(墓)에 명(銘)하면서 이어 성고(聖考)를 서술하였네. 고요(臯陶)와 후직(后稷)의 모훈(謨訓)처럼 제덕(帝德)을 정성껏 훈도했으니, 훌륭하다 성현(聖賢)들이여. 고금(古今)에 길이 빛나리.

각주

  • 1) 어려웠던 지난날을 잊지 말라는 뜻. 춘추 시대(春秋時代) 제 환공(齊桓公)이 거(莒) 땅에 망명하여 고생했는데, 후에 관중(管仲)이 제 환공에게 “거(莒)에 있었던 때를 잊지 마소서.” 하였음. 여기에서는 하성(下城)의 치욕을 잊지 말라는 뜻으로 쓰였음.
  • 2) 존주(尊周)의 의(義):존주(尊周)는 주(周)나라 왕실(王室)을 존숭(尊崇)하는 것으로, 여기에서는 명(明)나라와의 의리를 돈독히 하라는 뜻으로 쓰였음.
  • 3) 상담(嘗膽)의 사업(事業):상담(嘗膽)은 쓸개를 맛본다는 뜻으로, 복수하려고 모든 간고(艱苦)를 참는 것을 이름.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복수할 생각으로 몸을 괴롭게 하고 노심 초사(勞心焦思)하며 늘 쓸개를 맛보았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임. 곧 북벌 계획(北伐計劃)을 가리킨 말임.
  • 4)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이 대궐로 들어가는 길에 백성들이 모두 이마에 손을 얹고 기뻐하면서 “저분이 사마 상공(司馬相公)이다.” 하며 길을 가로막고 구경을 하는 바람에 길이 막혀서 말이 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함

 

출처 : 원불교 포천교당
글쓴이 : 최창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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