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분노할 것인가
언제 분노(憤怒)할 것인가
오늘날은 거의 모든 성인(成人)들은 가정에서 직장에서 기타 모임 등에서 관리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관리자로서 무엇보다도 경계해야 할 일은 바로 갑작스런 분노(憤怒)이다. 아랫사람에 대하여 버럭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는 것은 예로부터 관리자의 가장 경계해야 할 일로 여겨졌다.
이러한 맥락은 효종 8년(1657년) 5월 5일 백강 이경여(李敬輿)선생이 분노의 절제(節制)가 중요함을 아래와 같이 강조한 바에도 잘 나타나 있다.
『“전하께서는 남달리 총명하시며, 기쁘거나 노한 감정을 절제하지 않습니다. 남달리 총명하면 아랫사람을 경시하는 병통이 있으며, 기쁘거나 노한 감정을 절제하지 않으면 상벌에서 당연한 원칙을 잃게 됩니다. 이 때문에 아랫사람들이 기가 죽어 물러나 귀에 거슬리는 바른 말이 날로 전하에게서 멀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전에 죄를 지은 언관(言官)은 진실로 크게 거슬린 것도 없는데, 억측을 너무 심하게 하여 바람과 우레 같이 갑자기 진노하셨으며, 한마디 말이 뜻에 거슬리자 형벌과 출척이 잇따랐던 것입니다.』<조선왕조실록, 백강 이경여 선생 상차문(上箚文) 에서>.
인성(人性)교과서 <小學>에는 갑작스런 분노에 대하여 이렇게 경계하고 있다. “관직에 있는 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은 갑작스런 분노다.(當官者 必以暴怒爲戒!) 만약 아랫사람이 일처리 못마땅한 것이 있다면(事有不可) 마땅히 자세히 일을 살펴서 대처해야 한다.(當詳處之.) 그러면 어떤 일이든 사리에 적중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必無不中!) 만약 책임자가 먼저 갑작스런 분노를 표출한다면(若先暴怒) 이것은 다만 자신에게 손해가 될 뿐이다.(只能自害!)” 여기서 폭노(暴怒)란 버럭 화를 내는 ‘갑작스런 분노’이다. 분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버럭 화를 내는 갑작스런 분노가 관직자로서 조심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사실 분노를 포함한 인간의 감정 그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기에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있을 수 있다. 다만 그것이 때를 잃고 명분을 잃었을 때 중용의 원칙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덕수궁에는 중화전(中和殿)이 있다. 중화(中和)는 군왕이 자신의 감정을 적절히 조절해야 한다는 경계의 뜻을 갖고 있다. 다음은 중용에 나오는 중화(中和)의 의미이다. “희노애락의 감정이 가슴 속에서 표출 되지 않았을 때를 중(中)의 상태라 한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그것이 밖으로 적절히 표출되어 원칙에 맞을 때를 화(和)의 상태라고 한다.(發而皆中節 謂之和.) 중화(中和)는 군왕이 천하를 다스리는 대본(大本)이며 천하를 통치하는 달도(達道)인 것이다.(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기쁨과 분노, 슬픔과 즐거움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적절히 표출되었을 때 오히려 중화(中和)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기쁨과 즐거움이 지나치면 음란해지고, 슬픔과 분노가 지나치면 상처가 난다. 그래서 너무 기쁜 것이나, 너무 슬픈 것이나 인간에게는 씻을 수 없는 후유증을 남긴다. 적절한 분노는 오히려 조직을 긴장시키고 자신을 생존하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맹자는 분노를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있다. 하나의 필부(匹夫)의 사적 분노며, 다른 하나는 대장부(大丈夫)의 공적 분노이다. “필부의 분노는 한 사람만 대적할 수 있는 분노다.(匹夫之勇 敵一人者也.) 그러나 대장부의 분노는 천하의 모든 백성들을 안정시킬 수 있는 분노다.((大丈夫之勇 安天下之民.)” 리더는 한 사람에 대한 개인의 감정으로 분노해서는 안 되며 천하를 안정시킬 공적인 분노를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리더도 때로 화를 낼 때가 있다. 조직의 생존을 위해서 뼈를 깎는 결정을 내리거나, 조직의 긴장감을 높이기 위하여 심기일전(心機一轉)의 분노를 발휘할 때가 있는 것이다.
버럭 화를 내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이치를 깨달지 못해서 쏟아져 나오는 감정덩어리의 발산이다. ‘명심보감’에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분노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리석고 성품이 탁한 사람이 버럭 화를 내며 진노(嗔怒)한다. 이것은 모두 자신의 감정에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갑작스런 분노가 일면 마음 위에 화내는 것을 그만 두어야 한다. 누군가 나의 분노를 일으키면 그저 귓가를 스치는 바람처럼 여겨야 한다.”
병중에 가장 큰 병이 화병(火病)이다. 가슴 속에서 불이 나고 화가 치미는 병으로 어떤 약으로도 치료가 쉽지 않은 병이다. 오직 치료약이 있다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 밖에는 없다. 분노는 상대방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일 뿐이다. 내 가슴 안에서 폭발하는 분노는 오랫동안 나와 타인에게 상처를 입혀 회복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분노는 인생을 힘들게 만드는 가장 큰 고질병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분노를 스스로 다스리고 절제하여 나아가 극복 할 수가 있을까?
나의 오랜 생각의 결과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이는 인간이 지닌 생래적(生來的)인 한계로 본다. 그러나 우리와 늘 동행하는 친구인 예수그리스도와의 만남과 대화에서 그의 성품을 닮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 길을 발견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상상할 수없는 고통을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이겨내었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평안을 얻으리니.”(마태복음 11장 29절).
아래에서는 성경에서 제시된 화를 절제하는 방법에 관한 말씀들을 소개한다.
성경의 말씀도 기본적으로 급히 화를 내지 말라는 취지이다. “급하게 화내지 말라. 분노는 어리석은 사람의 품에 머무는 것이다.”(전도서 7장 9절). “사랑은 쉽게 화를 내지 아니한다.”(고린도 전서 13장 5절).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성전(聖殿)에서 상행위를 하여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에게 화를 내신 적이 있으며, 우리들도 사랑하기 때문에 오히려 깊은 관심에서 최선의 해결책으로 화를 낼 수도 있다. 화를 내는 것 그 자체는 죄가 아니다. 다만 화가 우리를 파괴적인 행동으로 몰아갈 때에 죄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화를 조정하고 절제하여 극복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 우리들이 다른 사람과 심히 다투어 언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전화가 오면 우리는 분노를 절제하고 전화를 받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분노를 절제할 수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일단 물러서서 돌아보자. “미련한 사람은 화를 있는 대로 다 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화가 나도 참는다.(잠언 29장 11절)” 화가 났을 때 즉각적인 충동적 반응은 자제하기 바란다. 하루 종일 자제하라는 것이 아니라 한 5분 정도 시간을 가지고 한 발짝 물러서서 두루 돌아보기 바란다. 미국독립선언서의 작가인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말하기를 “화가 나면 말하기 전에 열을 세고, 매우 화가 나면 말하기 전에 백을 세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시간동안에 내가 왜 화가 났는지, 내가 정말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또 그를 얻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바란다. 이를 통하여 화를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화를 풀어갈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을 찾아보자. “화가 나면, 이로 인하여 죄악으로 빠지지 말도록 하라.(에베소서 4장 26절)” 화가 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며, 화가 난 것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것이 죄이다. 문제는 이를 잘 풀어내어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아니하도록 하는 것이다. 화가 나는 것 그 자체가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며, 그 이면에는 상처, 두려움, 좌절감 등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좀 시간을 가지고 돌아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원인을 스스로 이해하게 될 때에 우리는 화로 인하여 파괴적인 행태를 일으켜 결국은 죄에 이르지 않게 하는 방법들을 찾아 갈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급히 화를 내는 것이 유일한 최선의 해결책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인간사의 해결은 결국 하나님이 주관하시며 어려운 문제의 해결은 오랜 세월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화를 잘 절제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하자. “성급한 사람과 사귀지 말고, 성을 잘 내는 사람과 함께 다니지 마라. 네가 그 행위를 본받아서 그 올무에 걸려들까 염려된다.(잠언 22장 24-25절)” 화를 내는 것도 전염성이 있다. 큰 소리로 떠드는 자들과 같이 있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목소리도 커지게 된다. 그러므로 분노를 잘 다루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습관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는 그 품성이 스스로 겸손하고 온유하다고 하였으니 그를 따르는 제자들과 어울리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제임스 도브슨(James Dobson)은 성공적인 결혼이란 충돌이나 분노가 없는 결혼이 아니며, 이러한 분노나 충돌을 어떻게 잘 풀어가는 가를 익힐 수 있는 결혼이라고 하였다.
성경이 제시하는 방안을 한마디로 줄이면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친구로 늘 가까이하고 동행하며 그의 인품 즉 사랑, 겸손, 온유, 절제, 오래참음 등의 성품을 배워가라는 것으로 집약될 수 있겠다. 예수그리스도는 모두에게 덕(德)이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화를 내어본 적이 없다. 그런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한 사랑으로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택한 바를 생각하며 이웃사랑을 실천하고자 할 때 사사롭게 분노할 일들은 사라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이 길은 나아가 우리들이 이 세상을 넘어 영생(永生)으로 나아가는 참 기쁨의 길이 된다.
2025. 6.24. 素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