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네 마음을 닦아라
무엇보다 네 마음을 닦아라
사람의 마음은 흐르는 물과 같아 알지 못하는 먼 곳에서 생겨나서 머무는 일도 없이 사라져버리며, 또한 바람과 같아 알 수 없는 먼 원천에서 생겨나서 멀리 날아가므로 잡을 수 없으며 그 모습을 볼 수도 없다.
이런 마음에 대해 불교 선종(禪宗)의 창시자 보리달마(菩提達磨)는 말하기를 “마음은 모든 성자(聖者)의 근원이며 만 가지 악의 주인이다. 해탈(解脫)의 즐거움도 자신의 마음에서 오는 것이고, 윤회(輪廻)의 고통도 마음에서 온다. 고로 마음은 이 세상을 뛰어넘는 문이고 해탈로 나아가는 나루터이니, 일단 마음의 문을 열면 나아가지 못할까 걱정할 것 없고, 나루터를 알면 강 건너 기슭[피안(彼岸)]에 이르지 못할까 근심할 것 없다.”라고 하였다.
‘플러시보(placebo)’란 어떤 약(藥) 속에 특정한 유효성분이 들어 있지 않은데도 마치 그것이 들어 있는 것처럼 위장하여 환자에게 투여하는 약을 말한다.
밤중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입원 환자들이 간호사에게 더러 수면제를 요구한다. 이럴 때 어쩔 수 없이 수면제와 모양이 닮은 소화제를 수면제라 속이고 줄 때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소화제를 먹은 환자는 곧 편안하게 잠든다는 것이다. 열이 나는 환자에게 증류수를 해열제라고 속여 의사가 직접 주사하면 많은 경우 열이 내린다고 한다. 강한 믿음이 기적을 일으키고 병도 치료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어느 여인은 살충제를 먹고 자살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죽었다. 그러나 그녀의 위액을 조사하니 살충제는 없었고, 독이 없는 다른 액체를 마시고 자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가 마신 액체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도 살충제를 먹은 줄 알았기 때문에 그 충격으로 죽은 것이다. 담석증 수술을 받아야 할 어느 마음 약한 여인은 자기의 배를 칼로 연다는 사실을 심히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수술 준비를 위하여 수술대 위에 눕혀 놓고 차가운 알코올로 이 여인의 배를 소독했을 때, 수술 칼로 자기의 배를 여는 것으로 착각하고 쇼크사 했다는 것이 임상보고 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로써 우리는 온갖 세상사를 넘어, 삶과 죽음의 길 또한 나 자신의 마음에 달려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런 이치를 깨달은 백강 이경여 선생은 마음을 닦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효종대왕에게 말씀하기를 “대개 본심이 지켜지지 않으면 덥지 않아도 답답하고 춥지 않아도 떨리며 미워할 것이 없어도 노엽고 좋아할 것이 없어도 기쁜 법이니, 이 때문에 군자에게는 그 마음을 바루는 것보다 중대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君子莫大於正其心). 이 마음이 바로 잡히고 나면 덥더라도 답답하지 않고 춥더라도 떨리지 않으며 기뻐할 만해야 기뻐하고 노여울 만해야 노여우니, 주자(朱子)가 이른바 대근본(大根本)이라는 것이 이것입니다<백강 이경여 선생 1653년 7월2일, ‘상차문(上箚文)’에서>.”라고 하였다.
또한 일찍이 성경에 기록되기를, 솔로몬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장 23절)”라고 하여 마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함을 간파하였으며, 에스겔 선지자는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靈)을 깨끗하게 할지어다(에스겔 18장 31절).”라고 하여 우리에게 마음과 영을 깨끗하게 닦을 것을 특별히 주문하였다.
나아가 마음을 닦는 방도에 대해 백강 이경여 선생은 구체적으로 언급한바 있으니, “덕(德)을 밝히려는 옛사람이 마음을 바루는 것을 근본으로 삼기는 하였으나, 본심의 착함은 그 체가 지극히 작은 반면 이욕(利欲)이 공격하는 것은 번잡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성색(聲色) 취미(臭味)와 완호(玩好) 복용(服用)과 토목(土木)을 화려하게 하고 화리(貨利)를 불리는 일이 잡다하게 앞에 나와 거기에 빠지는 것이 날로 심해집니다. 그 사이에 착한 꼬투리가 드러나 마음과 몸이 고요한 때는 대개 열흘 추운 중에 하루 볕 쬐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따라서 이 학문을 강명(講明)하여 이 마음을 개발(開發)하지 않으면, 또한 어떻게 이 마음의 바른 것을 회복하고 이욕의 사사로운 것을 이겨 만화(萬化)의 주재가 되고 끝이 없는 사변(事變)에 대응하겠습니까. 이른바 강학(講學)은 장구(章句)나 구독(口讀)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깊이 몸 받고 그 지취(旨趣)를 밝혀서, 자신에게 돌이켜 의리의 당연한 것을 찾고 일에 비추어 잘잘못의 기틀을 증험함으로써,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참으로 아는 동시에 미리 생각하여 익히 강구하고 평소부터 대책을 세워두어야 합니다<백강 이경여 선생 1653년 7월2일, ‘상차문(上箚文)’에서>.”라고 하였다.
2024. 7. 6. 素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