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력의 한계를 넘어서
사고력(思考力)의 한계를 넘어서
“이 무한대란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전율케 한다. 인간은 이 무한대 속에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은 한줄기의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 가운데 가장 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바로 그 사고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사고력을 가지고 자기를 높여야 한다. 도덕의 근본은 바로 우리가 사고함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신(神)을 직감하는 것은 나의 이성(理性)이 아니고 나의 심정(心情)이다. 이성이 아닌 심정에 의해 직감되는 신! 이것이 신앙이다.”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인간은 하나님이 그의 목적에 따라 창조하신 피조물들 가운데 영혼과 사고력을 부여받고 하나님의 형상(形象)을 따라 창조된 가장 고귀한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육신이 매우 미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다만 인간은 그가 부여 받은 사고력을 통하여 진리가 무엇인지를 밝혀갈 수 있는데, 거기에 그의 존엄성이 있으며 그로부터 정의(正義)가 나오고 도덕(道德)이 나오고 인륜도의(人倫道義)가 나온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제한적인 능력으로는 온전한 파악이 불가능한 초월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은 그의 말씀과 그가 창조하신 우주·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양심 그리고 인류역사의 불멸의 성인(聖人)들의 가르침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발견할 수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하고 확실한 길은 수천 년 인류 역사에서 살아남아 여전히 역동하는 생명력을 그대로 유지하는 불멸의 도리(道理)를 찾는 데에 있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하나님이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모든 것을) 온전히 알리라.” 이는 고린도전서 13장 9-12절의 말씀인데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증언한 말씀으로 수천 년이 지나도 그 역동하는 생명력은 변함이 없고 이를 뒤엎을 만한 확고한 이론이나 주장도 나오지 않는다.
인류역사에 스스로를 일컬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복음 14장 6절).”라고 말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다만 사악한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해석하여 제 욕심을 채우려는 것이 널리 횡행하니 이것이 반드시 경계해야할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역사상 불멸의 성현들의 말씀은 이를 가려내는 주요한 시금석(試金石)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은 물론이요, 동서고금의 다른 경전·고전들을 두루 섭렵(涉獵)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진리는 스스로 찾는 것이다. 노암 촘스키(Noam Chomsky)는 말하기를 “누구도 진리를 그대의 머릿속에 집어 넣어주지 않는다. 진리는 다만 그대 스스로가 그대의 힘으로 찾아 내야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율곡 이이 선생은 “뜻을 세우는 것과 밝게 아는 것과 독실하게 행하는 것 모두가 나 자신에게 달려있다[지지립 지지명 행지독 개재아이(志之立 知之明 行之篤 皆在我耳)]<격몽요결(擊蒙要訣)>.”라고 하였다. 공자는 말하기를 “아침에 도(道)를 깨달았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子曰(자왈) 朝聞道(조문도) 夕死(석사)可矣(가의)]<논어 이인(里仁) 8장>.”라고 까지 하였다.
2024. 6. 9. 素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