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疑心)에 대해
의심(疑心)에 대해
“의심(疑心)은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근본요인이며 사이를 떼어 놓는 독(毒)이며 서로의 생명을 손상시키는 칼날이고 서로의 마음을 괴롭히는 가시이다”<‘아함경(阿含經)’에서>.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열두 제자 중 가롯 유다가 배신하였고, 세상에는 넘쳐나는 게 배신행이이며,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 21-25절에서 고백하기를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라고 하였다. 하여 우리는 모든 사람이 선한 마음과 더불어 원죄(原罪)로 인한 죄성(罪性)을 아울러 지니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조건 모든 사람을 의심하지 않는다면 이는 더 큰 화(禍)를 불러오게 되는 도화선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의심하지는 안지만 모든 사람을 쉽게 믿어서는 안 되며 항상 성현들의 지혜의 말씀을 거울삼아 잘 살피면서 신중하게 살아가는 것이 바른 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중용(中庸)’의 도(道)를 찾아서 그에 따라 살아가야하는 것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잠언 4장 27절).
한편 경험에 비추어 생각할 바는 사람을 대할 때 그의 지난 행실과 자라온 환경과 조상들의 행적을 살펴보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요직에 인물을 등용하려면 그의 팔고조(八古祖)를 살펴보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것이 전혀 무의미 한 것이 아니다.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벗어나기 어려우니 대부분 이런 검증을 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피상적인 한때의 대중적인 인기만으로 사람을 택하는 것이 오히려 더 위험할 수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연고로 백강 이경여 선생은 임금에게 사람을 등용할 때 재간보다는 경륜(經綸)과 덕망(德望)을 중요하게 볼 것을 임금에게 주문한 것이다.
효종 8년(1657년) 5월5일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상차(上箚)하기를, “오늘날을 보면 민첩한 인사가 노성(老成)한 사람보다 많고 재간 있는 신하가 경학(經學)의 신하보다 우세하며, 기개 있게 감히 말하는 자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시세에 빌붙는 자만 조정의 자리에 많이 있습니다. 이는 성명(聖明)께서 공을 세운 신하는 좋아하고 장려하면서 강직한 선비는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길들여져서 이처럼 된 것이니, 전하께서는 공정하고 충실한 선비를 힘써 발탁하여 자신의 덕을 돕게 하고, 임금의 비위를 거스리며 간쟁하는 선비를 장려하고 나오게 하여 자신의 허물을 고치소서.”하였다. 또 백강 선생은 효종4년(1653년) 7월2일 상차하기를 “당상(堂上)의 선임은 반드시 정직(正職)을 지내야 하고 아장(亞長)·동벽(東壁)을 거치고 문지(門地)와 명망이 다 높아야 비로소 초배(超拜)될 수 있고, 당상을 거쳐서 아경(亞卿)에 제수되고, 아경을 거쳐서 재상에 발탁되었는데 다 한때의 명망 있는 자를 극진히 가렸습니다. 하여 덕망(德望) 있는 자를 임명하는 바가 혼란하지는 않았는데, 이제는 금옥이 뜰에 가득해도 인재가 부족한 것을 늘 걱정합니다. 이는 지름길이 많아 덕망으로 선임하는 것이 실로 쇠퇴하였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여 경륜과 덕망 있는 인사의 선임을 가장 강조하였다.(‘조선왕조실록’ 에서).
2023.12.10. 素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