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경구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앞부분에 나온다.
색(色)이란 모든 질량을 가지고 있는 물질을 포괄적으로 말함이니 인간은 물론 단지 물질만 있는 나무, 돌, 등 우주안의 모든 물질로 이루어진 것을 말함이요, 반면에 공(空)이란 일체 물질이 없는 텅 비어 있는 상태의 것들을 말함이다. 그런데 “그러한 물질이 알고 보면 공이요(色卽是空),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는 공이 곧 물질이다(空卽是色)”라는 뜻으로 물질과 비어 있는 공의 세계가 둘이 아니고 하나이라는 의미이다. 즉 색(色)과 공(空)이 따로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다.
내가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맞은쪽에서 걸어오는 사람과 무심결에 ‘쾅’하고 부딪쳐 바닥에 ‘꽈당’하고 넘어졌다. 엉덩이와 척추 끝자락이 무척 아프다. 이 때, 내가 벌컥 ‘앞도 안보고 어딜 보고 다녀!’하고 상대방에게 고함을 냅다 지르면 이때는 색(色)의 상태가 된다. 마음을 화라는 색(色)으로 채운 결과라는 것이다. 그런데 화를 내지 않고 ‘에이, 저 사람도 무슨 생각에 골몰히 빠져 있는 상태에서 걷다보니 앞을 잘 못 봤겠지’하고 마음을 비우면 이때는 공(空)의 상태가 된다.
이 마음을 비운 공(空)의 상태가 되면 다시 다른 색(色)을 받아들일 수가 있게 된다. 즉 다른 일에 생각을 돌려 거기에 전념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화를 내고 그 화에 마음을 자꾸 쏟으면 그 색(色)의 상태에서 벗어 날 수가 없게 된다. 고정적인 색즉시색(色卽是色)의 상태에 빠져 다른 색(色) 쪽으로 마음을 돌리지 못하는 비생산적인 마음 상태에 자신을 가두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하고자 하는 일마다 잘 안될 것이다. 하나의 색(色)으로 꽉 차있으니까 다른 색(色)이 들어올 여지가 없어서 그리할 것이다.
그런데 마음을 비우고 공(空)의 상태에 있으면 비운 상태이니까 무엇이든 다른 것을 채워 넣을 수가 있게 된다. 상대방이 행한 행동의 이면을 생각해보고 그 상대방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해서 그 화의 기분을 털어버리면 진실한 공(空)의 상태에 들어가 다른 색(色)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된다는 뜻이다.
‘야, 오늘 대낮부터 별을 봤으니 앞으로 기분 좋은 일만 있을 것 같네’ 하고 손을 털털 털고 일어서면서 ‘무슨 바쁜 일이 있나 보군요!’하고 넘어진 상대방도 일으켜 주면 그날은 내내 기분이 좋아 다른 일도 손에 잘 잡힐 것이다. 이것은 공(空)의 상태에 있어야 만이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공(空)의 상태에 있어야 다른 색(色)으로 말끔하게 채울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공즉시색(空卽是色)이 실현된다.
마음을 비워라, 그래야만 새로운 진리의 말씀으로 마음을 채울 수가 있다. 백강 이경여 선생은 ‘마음을 비우고 밝게 하여 북돋는 것이 깊고 두터우며 이(理)가 밝고 의(義)가 정(精)하여 경계하고 삼가고 두렵게 여기는 것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채울 것’을 효종대왕에게 다음과 같이 주문하였다.
“이른바 성심(聖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개 본심이 지켜지지 않으면 덥지 않아도 답답하고 춥지 않아도 떨리며 미워할 것이 없어도 노엽고 좋아할 것이 없어도 기쁜 법이니, 이 때문에 군자에게는 그 마음을 바루는 것보다 중대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잡히고 나면 덥더라도 답답하지 않고 춥더라도 떨리지 않으며 기뻐할 만해야 기뻐하고 노여울 만해야 노여우니, 주자(朱子)가 이른바 대근본(大根本)이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함양하는 방도도 불씨(佛氏)처럼 면벽(面壁)하거나 도가(道家)처럼 청정(淸淨)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발동되기 전에 지키고 발동된 뒤에 살피며 미리 기필(期必)하지 말고 잊지도 말아 보존해 마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비고 밝은 한 조각 마음이 그 속에 거두어져 있어 북돋는 것이 깊고 두터우며 이(理)가 밝고 의(義)가 정(精)하여 경계하고 삼가고 두렵게 여기는 것이 잠시도 떠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근본이 이미 굳어져서 어느 것을 취하여도 본원(本源)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지키고 버리는 사이에서 주재(主宰)하는 것이 없으면 마음이 이미 없는 것이니, 어찌 외물(外物)에 대응할 수 있겠습니까.” <1653년 효종 4년 7월2일 백강 이경여(李敬輿) 선생 상차문(上箚文)에서>
2022. 9. 4. 素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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