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

그 사람을 가졌는가?

jookwanlee 2022. 5. 28. 02:34

그 사람을 가졌는가?

 

사람이 한평생을 사는 동안에 온갖 만남이 있는데, 그런 만남들 속에서 우리는 성숙하여 갑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그릇된 만남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잘못된 만남의 핵심은 서로 욕심을 품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상대방을 이용하려는 만남입니다. 우정도 이러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만남에서는 서로가 상처 받게 되고 불안하게 되며 지치게 됩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멀리 있는 벗이 찾아오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하여 교우의 즐거움을 말하였지만(논어 학이 제1장), 또 이르기를 “이로운 교우(交友)가 셋이며 해로운 교우가 셋이니, 솔직한 사람 진실한 사람 박식한 사람과 교제 하는 것은 이로운 교우이며, 관행(慣行)에 젖은 사람 남의 비위를 잘 맞추는 사람 관언(慣言)에 젖은 사람과 교우하는 것은 해로운 교우이다.”라고도 하였습니다(논어 계씨 제4장).

 

맹자는 말하기를 “교우(交友)는 나이가 연장인 것과 신분이 귀하다는 것과 유력한 형제가 있다는 것을 끼고 사귀지 않는 것이다. 벗을 사귄다는 것은 그의 덕(德)을 사귀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언가를 옆에 끼고 사귀면 안 되는 것이다”라고 ‘맹자’ ‘만장’ 하 제3장에서 말하였습니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실존적 교제”라는 말을 하였는데 그 뜻은 ‘순수한 혼(魂)과 혼이 아무런 이권(利權)이나 거래관계 없이 깨끗하고 투명하게 만남’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우정은 언제인가는 이를 시험 받는 시기에 이르게 됩니다. 특히 고난을 만났을 때 내 곁을 떠나가는 벗이 있지요. 이는 참된 친구라고 할 수 없으며 벌써 떠나보냈어야 할 친구들입니다. 영국 속담에 “순경(順境)은 친구를 만들지만 역경(逆境)은 우정을 시험한다.” 라는 말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3년 동안 제자들과 같이 살아오시다가 마지막에 ‘다락방감화’ 라고도 하는 교훈을 남기셨습니다(요한복음 13-16장). 그중에 너희들은 이제부터 나에게 종과 같은 존재가 아니며 내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복음 15장13-17절). 여기에서 말하는 우정(友情)은 아래와 같은 단계를 거쳐 이루어집니다.

 

첫째로 우정은 선택으로 시작됩니다.

우리가 만나는 많은 사람들 중에 오직 몇 명만이 나의 친구가 되는 것이며, 고로 세르반테스 는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기를 원한다면 그 친구를 보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16절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였다” 그리하여 친구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친구는 어느 날 갑자기 인생 속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친구가 되어줌으로써 참된 우정으로 갈 수 있음을 가르쳐 준다고 해석됩니다.

또 예수님은 “너희가 가서 과실을 맺게 하려고” 친구로 선택하셨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그자신이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하여 친구로 선택하신 것이 아니며 그 제자들의 삶이 열매로 풍성하도록 하고자 친구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방의 삶에 축복이 되어주기 위한 선택,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우정을 형성하려고할 때 예수님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 됩니다. 내가 저 사람들의 인생 속에 축복이 되어주기 위해서 내가 그들의 친구가 되겠다는 것이지요. 마치 하버드 교수였던 ‘헨리 나우웬(Henry Nouwen)’이 토론토 근처의 작은 장애인 공동체에 그 장애인들과 친구로서 더불어 살고자 들어간 것처럼 말입니다.

 

둘째로 우정은 나눔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우정은 나눔으로서만 자라갈 수 있습니다. 이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속 깊은 내면을 열어서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비밀을 나눌 수 있는 나눔이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문화적인 풍토는 외식(外飾) 지향적인 것이 많아 여기에 약해 보입니다.

예수님이 위의 15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 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여 이제는 아버지께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다 알게 하였으므로 너희를 친구로 삼겠다는 뜻이지요.

이렇게 우리가 비밀을 나눌 수 있으려면 신뢰라는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서로 믿을 수 있어 내면의 비밀이 비판되거나 오용(誤用)되거나 하지 아니하고 이해된다는 신뢰가 형성 될 때에 비밀들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친구가 되고 치유가 일어나고 건강한 삶이 형성됩니다.

한 히틀러 전기 작가에 의하면 히틀러의 불행의 단초는 나누는 친구가 없었던 불행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유일한 친구인 엘버트 스피어는 말하기를 “히틀러는 환상가 이었고 자신의 카리스마에만 몰두하였을 뿐이었다. 그는 우정에 반응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우리와 공감할 수 있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심지어 함께 체리열매를 먹으며 즐거워하는 것조차 그는 거부하였다. 우리 모두는 단지 그의 거대한 에고(Ego)의 투사체에 불과 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셋째로 우정은 순종함으로서 강화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피차에 순종함으로 그 우정을 강화 시킬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믿을 수가 있다면 우리는 따라 갈 수가 있습니다. 함께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위의 1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의 명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셨는데, 이는 그분에게 제자들이 순종함으로써 그분 자신이 아니라 그분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설득 하시는 것으로 보아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나 사이에는 상당한 절대적인 순종이 필요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의 우정에는 그렇지는 않을 것이며 얼마든지 의견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순종이란 희랍어 단어는 본래 듣는다는 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즉 순종은 당신을 존중한다는 메시지로 친구는 내 이야기에 귀를 경청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우정은 희생으로 완성됩니다.

우리들의 우정의 교류를 마침내 아가폐(agape)적인 사랑의 단계까지 승화 시킬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의 13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라고 하셨습니다. 이후 예수님은 친구인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시어 우정을 완성하시고 우리도 그렇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함석헌 선생의 시(詩) “그 사람을 가졌는가?”는 이러한 친구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만리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 맡기며 마음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너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너 뿐이야 하고 믿어주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탓던 배가 가라앉을 때 구명대를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너 하나 있으니 하며 빙그레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에 ‘예’보다도 ‘아니요’ 라고 가만히 머리를 흔들어 진실로 충언해주는 그 한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2022. 5.28. 素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