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

하늘은 머지않아 정의를

jookwanlee 2021. 11. 8. 01:53

하늘은 머지않아 정의를 바로 세운다

············································· 영조대왕이 신임사화의 사악함을 바로잡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최근 윤석열 대선후보가 언급하였듯이 부정과 부패가 극심하여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울 정도의 절체절명의 상황에 놓여있는데 오는 3월9일에 새로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다. 이 중대한 시점에 우리가 새기고 경계하여야할 역사가 있어 여기에서 상기(想起)하고자 한다.

 

우리역사에 자신들의 사사로운 권력욕을 충족시키고자 사악한 마음으로 모의하여 충성스런 분들을 모함하여 도륙하는 천인공노할 일이 있었으니 바로 신임사화이다.

그러나 아무리 완벽한 범죄를 도모했어도 하늘은 정의를 사랑하는 바, 훗날 영조대왕이 이를 바로잡아 정의를 바로세우는 역사가 있었으니 여기에 그 기록을 찾아 적는다.

이 참혹했던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示唆)하는 바가 매우 크니, 이를 교훈으로 삼아 이 시점에 개인의 탐욕을 충족하고자 권력을 부정하게 획득하고 사욕을 탐하여 권력을 휘두르는 잘못을 저지르는 자들이 있다면 속히 뉘우치고 바른 길로 돌아와서 국가와 자신들에 닥칠 큰 위해를 미리 방지하기를 바란다.

 

 

국조보감 제57권 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영조1년(을사, 1725년)

○ 3월 고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이명(李頤命)ㆍ이건명(李健命), 우의정 조태채(趙泰采)의 관작을 회복해 주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또 고 판서 이만성(李晩成) 등의 신하들도 모두 관작을 회복해 주었다.

처음에 경종이 편찮은 상황에서 후사(後嗣)가 없자, 김창집 등 여러 대신이 경종에게 아뢰어 자전에 여쭈어 상을 왕세제로 책봉하도록 하였다. 이에 적신(賊臣) 유봉휘(柳鳳輝)ㆍ조태구(趙泰耈)가 김일경(金一鏡) 등과 서로 앞뒤로 상소를 올려 김창집 등을 터무니없는 사실로 얽어 넣어 이로써 저궁(儲宮)까지 핍박하려 하였다. 끝내는 목호룡(睦虎龍)을 사주하여 무옥(誣獄)을 일으켜 살육을 멋대로 행하였는데, 김창집 등의 대신 및 이만성 등의 인물이 모두 참화를 입게 되었다.

이때 이르러 우의정 정호(鄭澔)가 상차(上箚)하여, 당시의 옥안을 검열하여 이미 죽은 자는 억울함을 풀어주고 귀양가 있는 사람은 놓아주기를 청하였다. 상이 비답하기를,

“네 대신이 억울함을 당한 것을 어찌 차마 말로 할 수 있겠는가. 부르짖은 자는 역적 김일경이고 응한 자는 역적 목호룡이다. 선대왕의 깊은 어짊과 후한 은택이 아니었다면 그 사단이 어찌 이 정도뿐이었겠는가. 그렇긴 해도 이 일은 중대하니 한 번의 비답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 대신, 2품 이상, 삼사가 빈청(賓廳)에 모여 국안(鞫案)을 자세히 검열해 본 다음 등대(登對)하여 품처하도록 하라.”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입시하자, 상이 이르기를,

“대순(大舜)이 사흉(四凶)을 죽이자 천하가 복종하였는데, 지금의 원악(元惡)은 김일경에 지나지 않는다. 목호룡과 함께 체결하고 화응하여 큰 옥사를 속여 일으키고 낭자하게 참벌(斬伐)을 가하였다. 숙종이 의지하던 대신과 맡겨 부리던 신하들이 아울러 도륙되었고, 그 밖에 장(杖)을 맞다가 죽은 사람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천지 사이에 지극한 원통함이 맺혀 있는데 화기(和氣)가 이로 인하여 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오늘 억울함을 풀어주는 거조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를 인하여 또 주륙을 가한다면 이는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곧 보복하는 것이 된다. 경들은 이러한 뜻을 유념하여 공평하게 하도록 힘쓰라.”하고, 마침내 네 대신에 대해 관작을 회복해 주고 치제하도록 한 것이다.

이윽고 또 하교하기를,

“네 대신은 나라를 몸받는 정성으로 두 조정을 잇따라 섬겼는데, 끝에 가서 독기를 부리는 자들에게 피해를 입었으니 지금까지도 마음이 아프다. 이제 처분이 이미 정해져 네 대신이 입었던 참혹한 무고도 다 씻겼으니 어찌 선조(先朝)의 남기신 뜻을 따른 것일 뿐이겠는가. 또한 너그럽고 훌륭했던 대행조(大行朝)도 반드시 어둡고 어두운 가운데에서 기뻐하고 계실 것이니, 이는 오늘날에만 할 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뒷날에도 장차 돌아가 양조(兩朝)에게 아뢸 말씀이 있게 된 것이다. 이미 관작을 회복해 주었으니, 즉시 시호(諡號)를 내리도록 하라.”하였다.

이에 김창집에게는 충헌(忠獻), 이이명에게는 충문(忠文), 이건명에게는 충민(忠愍), 조태채에게는 충익(忠翼)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다시 유생들의 상소를 인하여 서호(西湖)에 사당을 세우고 사충사(四忠祠)라고 사액(賜額)하였다.

 

○ 8월 목호룡 등의 위훈(僞勳)을 삭제하였다. 이를 종묘에 고하고 사면령을 내렸다.

교문(敎文)에 이르기를,

“지난 몇 해 동안의 일들을 차마 말로 할 수 있겠는가. 간흉들이 죽 늘어서서 교묘히 계략을 세우고 큰 옥사를 만들어서 사류(士類)들을 풀 베듯 주륙하였다. 그 마음의 끝간 데를 찾아보면 어찌 이 정도에 그치고 말 뿐이었겠는가. 이에 전후의 사단을 가지고 근본 원인을 통렬히 분석하여 대중에게는 포고하는 바이니, 분명하게 듣고 시끄럽게 하지 말기 바란다.

아, 생각건대 우리 숙종대왕은 어질고 밝으며 강하고 훌륭하여 천명(天命)을 스스로 헤아리셨는데, 사문(斯文)의 일과 윤리와 의리의 중대함에 대해서 더욱 삼가 뜻을 기울이셨다. 신사년과 병신년의 두 처분은 지극히 바르고도 엄하여 천지간에 세워도 어그러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저 흉당(凶黨)의 마음은 이와 어긋났으니 어찌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마음이 없을 수 있겠는가. 감정과 원한을 쌓아 한번 멋대로 뜻을 이루어보고자 하였으나 그럴 기회가 없었다.

선왕(先王)의 초년에 저위(儲位)가 비어 인심이 의지할 곳이 없자, 종묘와 사직의 중함을 깊이 생각하여 보잘것없는 이 몸을 책립하였다. 이에 간당(奸黨)들이 이때를 틈타 그 흉악한 모의와 혐의를 무릅쓴 말들을 멋대로 해대고 그 장본(張本)이 의혹스러운 이야기들을 하였다. 이어 또 한밤중에 합문(閤門)을 두드리고 북문(北門)으로 몰래 들어오는 일로써 위태로이 동요시켰다. 그 뜻이 지극히 흉하고 그 계획이 지극히 치밀하였는데, ‘하늘에 두 개의 해가 없다.’는 말과, ‘천위(天位)를 몰래 옮긴다.’는 말에 이르러 더욱 참혹하였다. 마침내 역적 김일경이 6적(賊)을 거느리고 흉소(凶疏)를 창도해 올려 외부에서 척후(斥候)가 되고, 요사한 박상검(朴尙儉)이 김일경의 오른팔로서 은밀한 계기를 몰래 주선하여 안에서 해적(害賊)이 되어, 안팎으로 선동하여 재앙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다행히 선대왕의 독실한 우애에 힘입어 저들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박상검이 먼저 주륙을 당하였다.

이 이후로 흉역(凶逆)의 무리들이 크게 겁을 먹고 마침내 역적 목호룡을 사주하여 변서(變書)를 빨리 올리도록 하였다. 그 글 가운데 나에 대해 무고한 것은 그 말이 매우 음흉하고 간특하여 가리키는 바를 길가는 사람이라도 다 알 만하였다. 게다가 그 변서를 올리는 일을 앞서 하지도 뒤에 하지도 않고 반드시 중국에 갔던 사신들이 일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날 하였으니, 그들의 속셈이 이에 더욱 드러난다 하겠다. 옥사(獄事)가 일어나자마자 정국(庭鞫)의 명이 내리니, 그 간사함이 쉽사리 탄로날까 염려하여 급급하게 면대(面對)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본부로 옮겨 국문하여 늘였다 줄였다 하는 것을 조정하여 오직 하고자 하는 바대로 하였다. 또 심문도 하지 말고 기록도 하지 말도록 청하여 나를 암담한 가운데 두었다. 이어 다시 삼수(三手)의 설을 창출하였는데, 이른바 삼수란 하나는 검(劒), 하나는 약(藥), 하나는 국상(國喪)을 틈타 교지(矯旨)하는 것이었다. 검은 부러지고 무딘 일반 칼에 지나지 않는데 이를 비수(匕首)라 하였고, 약은 그들이 말한 샀다는 사람의 이름자가 어긋나고 쓴 사람의 날짜가 맞지 않았다. 교지 운운한 것은, 이삼(李森)을 내보내 충청 병사(忠淸兵使)로 삼는 것을 큰 관건으로 삼았는데, 대신 제수받은 자도 외직으로 의망되었으니 그 글이 자연 파탄되어 버렸다. 또 궁성(宮城)의 호위에 관한 말을 지어내어 하나의 요긴한 것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그 이른바 함께 의논했다는 대신도 실제 국경을 나간 지 이미 오래된 상태였고 보면, 헛되고 사실 무근한 것을 날조한 정상이 이에 더욱 드러나게 되었다. 저들이 반역이라 가리킬 때에는 문득 삼수(三手)를 일컬었는데 이 세 가지 일들이 모두 근거가 없고, 그 승복하였다고 일컬은 것도 대부분 죽은 후에 강제로 날인한 것이었다. 예로부터 난옥(亂獄)이 한정없이 많았지만 어찌 이와 같이 허망한 옥사가 있었겠는가.

아, 네 대신은 선조(先朝)의 덕망 있던 신하로서 자기 한 몸의 생사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며 충성을 다하려 하였다. 위태로움에 임하여 계책을 결정해서 충성스러운 마음이 밝게 드러났으니, 이는 절의(節義)를 위해 죽은 사람에 비겨 논할 만하다. 참혹한 데 억울하게 걸려들었어도 뜻을 지켜 변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모두 곧고 충성스러운 신하였는데, 다 음형(淫刑)을 가하여 차례대로 주륙하였으니, 천하에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더욱 통탄스러운 것은 역적을 토벌했다고 하여 목호룡을 훈적(勳籍)에 기록하도록 천승(千乘)의 지존에게 강요하여 이내 천예(賤隷)들과 함께 맹반(盟盤)의 피를 같이 마시게 한 것이다. 군부를 업신여기고 상의 몸을 거짓으로 무고하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는데, 역적 김일경이 지은 글 가운데, ‘무당을 모았다’느니, ‘피를 밟았다’느니 하는 말들에 이르러서 더욱 참혹함을 더하였다. 극도로 흉악함이 어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른단 말인가.

대개 그 마음먹고 뜻한 바가 실로 망측한 죄안을 날조하여 보호하는 신하들을 다 죽이고, 인하여 상을 침범하는 계제로 삼아 원래의 음모를 쾌히 이루려 한 데 있었다. 그런데 문생(門生)이니 국로(國老)니 한 비유는 그 뜻이 어그러져 더욱 신하로서 감히 말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아, 충현(忠賢)이 나란히 운명하여 국맥(國脈)이 모두 끊겨, 분명하게 엎어져 넘어질 듯한 형세라 나의 몸도 조석으로 위급한 지경에 놓여 있었다. 지난번 우리 조종(祖宗)이 위에서 묵묵히 도와주고 선대왕이 지극한 어짊과 훌륭한 덕으로 안전하게 하여 도와주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오늘날을 맞이할 수 있었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선대왕은 자애롭고 어질어 사람을 사랑하고 살리기를 좋아하는 뜻이 윤음에 무성하게 나타났었다. 두 대신이 극한 참화를 당하게 되자 명을 도로 거두어 들이라는 분부를 하셨고, 중간에 재앙을 스스로 허물하여 빈번히 죄수를 너그러이 처분하여 석방하도록 명하셨으니,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여기에서 알 수 있다. 종래에 온갖 재앙과 변란이 다 일어났지만 어찌 이로써 우리 성덕(聖德)에 누를 끼치겠는가. 이에 선왕의 끼친 뜻을 추모하여 이미 고 상신(相臣) 김창집ㆍ이이명ㆍ조태채ㆍ이건명의 억울함을 펴 주도록 명하여 그 관작을 회복해 주고 아름다운 시호를 내렸다. 또 이만성(李晩成)ㆍ홍계적(洪啓迪)ㆍ김운택(金雲澤)ㆍ김민택(金民澤)ㆍ김제겸(金濟謙)ㆍ조성복(趙聖復)ㆍ이홍술(李弘述)ㆍ윤각(尹慤)ㆍ백시구(白時耈)ㆍ이상집(李尙)ㆍ김시태(金時泰) 등에게 그 직첩을 도로 주고, 등급을 건너뛰어 작질을 추중하였다. 그리고 역적 김일경ㆍ목호룡 등은 아울러 법에 의거하여 사형시키고 이사상(李師尙)은 우선 말감(末減)하는 법률을 따라 참작하여 교형(絞刑)에 처하였다. 부사공신(扶社功臣)을 혁파하고 그 녹권(錄券)을 거두어 들였으며, 그 나머지 흉적들은 혹 찬출(竄黜)하기도 하고 혹 가두어 국문하기도 하였다. 주토(誅討)의 법전이 짐짓 오늘날 지체되고 있긴 하지만 순역(順逆)이 분변되어 거의 신인(神人)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아, 너희 중앙과 지방의 신하들은 나의 뜻을 모두 알고서 사악함을 물리치고 바름을 부지하여 영원히 그 마음을 곧게 함으로써 나라를 보전해 나가도록 하라. 아, 억울함을 펴 주고 죄를 성토하여 천리(天理)의 공변됨을 따르고, 나라를 열고 집안을 계승하여 소인(小人)의 화를 영원히 끊어버리도록 하라…….”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경희 (역) | 1995

 

2021.11. 8. 素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