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黙示)를 따라 사는 길
묵시(黙示)를 따라 사는 길
“주님께서 나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 묵시(黙示)를 기록하여라. 판에 똑똑히 새겨서, 누구든지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여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다. 끝이 곧 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공연한 말이 아니니, 비록 더디더라도 그 때를 기다려라. 반드시 오고야 만다.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 ~ 하박국2장2-3절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를 내려 그의 뜻과 진리를 알게 해주시 것이 묵시이다. 하나님의 묵시는 인간의 생각, 인간의 때와는 다르게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반드시 이루어지고 만다는 말씀이다.
환언하면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는 언제인가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니 사람의 좁고 낮은 생각으로 판단하며 살아가지 말고, 진리를 배우고 진리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야만 마지막에 승리하는 인생이 된다는 말씀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 말씀을 깨닫기도 어렵지만 실천하기는 더욱 더 어려워, 우리는 오늘은 실천하다가 내일은 잊어버리고 또 다시 미혹(迷惑)의 길로 돌아가 헤매기 일쑤이다. 오호통재(嗚呼痛裁)라!
이런 어려움에 대해 1653년(효종4년) 백강 이경여 선생은 재변(災變)을 이겨내는데 힘써야할 21항의 상차문(上箚文)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덕(德)을 밝히려는 옛사람이 마음을 맑고 바르게 바루는 것을 근본으로 삼기는 하였으나, 본심의 착함은 그 체(體)가 지극히 작은 반면 이욕(利慾)이 공격하는 것은 번잡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성색(聲色) 취미(臭味)와 완호(玩好) 복용(服用)과 토목(土木)을 화려하게 하고 화리(貨利)를 불리는 일이 잡다하게 앞에 나와 거기에 빠지는 것이 날로 심해집니다. 그사이에 착한 꼬투리가 드러나 마음과 몸이 고요한 때는 대개 열흘 추운 중에 하루 볕 쬐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그런고로, 우리에게는 진리를 향한 담대한 믿음을 기르는 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일이 참으로 중요하다.
그러면 어찌해야 우리가 이 담대한 믿음, 호연지기를 기를 수가 있을까?
생각건대 매일매일 성경말씀을 비롯하여 동서고금의 성현(聖賢)들의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로 여겨진다. 인간의 생각은 미천하고 좁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스스로 깨닫는다고 하지만 성철스님 같이 각고(刻苦)의 노력을 한 분도 그 마지막 말씀이 종을 잡을 수가 없으니 내 자신의 능력은 믿을 것이 못된다. 인간은 유한한 피조물임이 분명하다.
이에 대해 백강 선생은 위의 말씀에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따라서 이 학문을 강명(講明)하여 이 마음을 개발(開發)하지 않으면, 또한 어떻게 이 마음의 바른 것을 회복하고 이욕의 사사로운 것을 이겨 만화(萬化)의 주재가 되고 끝이 없는 사변(事變)에 대응하겠습니까. 이른바 강학(講學)은 장구(章句)나 구독(口讀)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성인(聖人)의 가르침을 깊이 몸 받고 그 지취(旨趣)를 밝혀서, 자신에게 돌이켜 의리(義理)의 당연한 것을 찾고 일에 비추어 잘잘못의 기틀을 증험함으로써,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참으로 아는 동시에 미리 생각하여 익히 강구하고 평소부터 대책을 세워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울러 우리가 대자연과 같이 호흡하는 기회를 자주 가지는 일, 나아가 위대한 예술작품들을 감상하는 일 등이 생각난다. 대자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그대로 녹아져 있으며 위대한 예술작품에는 위대한 영혼들의 생생한 증언들이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묵시를 따라 사는 길은 죄 많은 우리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길이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묵시가 이루어지는 큰 소망이 있으니 큰 복(福)을 받은 것이다. 아니 그 길 외에 우리가 택할 참된 길은 달리 보이지를 않는다.
그런즉 우리가 성공하는 인생이 되려한다면 하나님의 가르침에 대한 담대한 믿음과 호연지기를 길러 성경 말씀의 정수(精髓), 하나님의 묵시의 근간(根幹)을 따라 반드시 사사로운 탐욕(貪慾) 즉 육신(肉身)의 정욕, 안목(眼目)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모두 버리도록 애쓰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誡命)대로 진리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함에 힘쓰는 길 이외에는 달리 없다고 보는 것이다. 슈바이처(Schweitzer)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이 나의 행복의 비결이다‘라고 한 말이 헛말이 아닐 것이다.
2021. 1.31. 이 주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