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

진리는 간명하다

jookwanlee 2020. 2. 6. 12:41

진리는 간명하다


긴 세월 온갖 철학들은 죽음과 같은 삶의 근본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물어 왔지만 확실한 해담은 유보한 체로 알아듣기 어려운 난해한 말들을 계속해왔다.


진리는 쉽고 간결 명확한 것이지 난해하고 복잡하면 진리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자녀들이 배우기 쉽게 쉽고 간결하게 알려주신 것이다.


중용장구 13 장에서 공자는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나니, 사람이 도를 행하면서 사람을 멀리하면 도라고 할 수 없다.〔道不遠人 人之爲道而遠人 不可以爲道〕”고 하였다. 사람이 멀고도 높아서 행하기 힘든 일에서 를 찾으려는 경향을 경계한 말로서, 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의 생활 가까이에 있다는 말이다.


진리를 우리 생활의 구체적인 규범인 로 끌어들인 사계 김장생 선생은 를 하늘이 정해준 질서, 곧 다시 말하면 대자연과 우주의 형성원리이며 동시에 인간의 구체적인 법도로 파악하고 있다. ~ "영원한 선비 사계 김장생" 중에서. 사계 선생이 가정과 사회를 바로 세우고자 평생을 연구한 라는 것은 멀고 높은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 생활 속에서 발견되는 자연의 평범한 이치 가운데에 있다고 한 것이다.


인류역사상 진리에 대해 가장 간명하게 말씀한 것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요한복음 146). 예수 그리스도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며 그의 말씀은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라는 것이다.



백강 이경여 선생은 진리를 성심(聖心)을 함양하는 데에서 찾으며 효종대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 뜻은 만사의 근본이고 뉘우침은 착한 것을 회복하는 기틀인데,~ 그 발단인 이른바 성심(聖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개 본심이 지켜지지 않으면 덥지 않아도 답답하고 춥지 않아도 떨리며 미워할 것이 없어도 노엽고 좋아할 것이 없어도 기쁜 법이니, 이 때문에 군자에게는 그 마음을 바루는 것보다 중대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잡히고 나면 덥더라도 답답하지 않고 춥더라도 떨리지 않으며 기뻐할 만해야 기뻐하고 노여울 만해야 노여우니, 주자(朱子)가 이른바 대근본(大根本)이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함양하는 방도도 불씨(佛氏)처럼 면벽(面壁)하거나 도가(道家)처럼 청정(淸淨)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발동되기 전에 지키고 발동된 뒤에 살피며 미리 기필하지 말고 잊지도 말아 보존해 마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비고 밝은 한 조각 마음이 그 속에 거두어져 있어 북돋는 것이 깊고 두터우며 이()가 밝고 의()가 정()하여 경계하고 삼가고 두렵게 여기는 것이 잠시도 떠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근본이 이미 굳어져서 어느 것을 취하여도 본원(本源)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 下略 ~

 

()을 숙련하는 공부가 어찌 일조일석에 되는 것이겠습니까.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천덕(天德)·왕도(王道)는 그 요체가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데에 있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홀로 있을 때를 삼가지 않아서 유암(幽暗)하고 은미(隱微)한 데에 문득 간단(間斷)되는 곳이 있다면 어떻게 날로 고명(高明)한 데에 오르겠습니까. 당 태종(唐太宗)이 일찍이 ‘임금의 한 마음은 공격받는 것이 많다. 조금이라도 게을리하여 그 하나만 받아들이는 날이면 위망(危亡)이 따른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그 자성(資性)이 밝고 트여 이 마음이 희미한 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인(聖人)의 극치(極治)라는 것도 결국은 이 길 외에 따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 下略 ~

 

성학(聖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덕을 밝히려는 옛사람이 마음을 바루는 것을 근본으로 삼기는 하였으나, 본심의 착함은 그 체가 지극히 작은 반면 이욕(利欲)이 공격하는 것은 번잡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성색(聲色) 취미(臭味)와 완호(玩好) 복용(服用)과 토목(土木)을 화려하게 하고 화리(貨利)를 불리는 일이 잡다하게 앞에 나와 거기에 빠지는 것이 날로 심해집니다. 그 사이에 착한 꼬투리가 드러나 마음과 몸이 고요한 때는 대개 열흘 추운 중에 하루 볕 쬐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따라서 학문을 강명(講明)하여 마음을 개발(開發)하지 않으면, 또한 어떻게 마음의 바른 것을 회복하고 이욕의 사사로운 것을 이겨 만화(萬化)의 주재가 되고 끝이 없는 사변(事變)에 대응하겠습니까.

 

강학(講學)은 장구(章句)나 구독(口讀)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성인의 가르침을 깊이 몸받고 그 지취(旨趣)를 밝혀서, 자신에게 돌이켜 의리의 당연한 것을 찾고 일에 비추어 잘잘못의 기틀을 증험함으로써,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참으로 아는 동시에 미리 생각하여 익히 강구하고 평소부터 대책을 세워두어야 합니다. ~ 下略 ~

 

~ 효종 4(1653 계사) 7 2(을축)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올린 재변을 이겨내는데 힘써야할 21항의 상차문 중에서

 

요약하면, 진리는 쉽고 간단 명료하며 복잡하고 난해하면 진리가 아니다. 그 진리를 찾아 배우는 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깊이 마음에 새기고  영혼으로 받으며 그의 행실을 따라 실천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거짓 선지자가 많아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는 데에는 공자나 석가모니의 말씀 등 인류의 영원한 고전들(하나님의 일반은총)이 좋은 기준이 되므로 성경과 같이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국교직원노동조함(전교조)의 교육이 큰 해독을 끼치는 것은 바로 이것을 무시하고 검증되지 않은 짧은 자기들 생각으로 아이들을 가르쳐왔기 때문이다.

 

2020. 2. 6. 이 주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