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조건
‘글쓰기’의 조건
만권의 책을 읽어 근본을 다지고 (讀萬卷, 以立其體, 독만권, 이립기체,)
사방을 유람하여 활용할 능력을 기른 뒤에 (遊四方, 以達其用, 유사방, 이달기용,)
대장부의 할 일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然後大丈夫之能事畢矣. 연후대장부지능사필의.)
위의 글은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 선생이 지은 「송이서장시서(送李書狀詩序)」의 한 대목인데, 그가 쓴 여러 편의 송서문(送序文)을 보면 그는 대장부가 할 일 가운데에 정사(政事)와 더불어 ‘글쓰기(文章)’도 들어간다고 하였다. 아마도 글이란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됨으로 이로써 세상을 움직일 힘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서거정 선생은 이어서 말하기를 “도도히 흐르는 장강(長江)을 굽어보며 유장(悠長0한 흐름을 음미하고 탁 트인 벌판에 서서 흉금(胸襟)을 열고 높은 산악에 올라 웅대한 기상을 기르라. 고적(古迹)을 답파(踏破)하여 옛 일을 상상해 보고 현자(賢者)를 만나 식견을 넓히며 중원(中原)의 대도(大都)에 가서 그 선진 문물을 호흡해 보라. 그러면 너의 몸에 형언할 수 없는 장대한 기운이 스며들어 쓰는 글마다 저절로 기이(奇異)하게 될 것이다.”라고 부연(敷衍)하여 설명하였다.
그런데, 나는 우리가 ‘글쓰기’를 제대로 하려면 이들보다 우선하여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글쓰기’를 제대로 하려면 동서고금의 불멸의 경전(經典)과 불멸의 고전(古典) 등을 두루 읽고 사색하면서 자신의 인생관, 가치관 그리고 역사관을 올바르게 정립하는 일이 필요하다. 글을 쓰는 이가 자신의 인생관, 가치관 그리고 역사관을 올바르게 세우지 못한 상태에서 쓰는 글은 읽는 이들에게 오히려 좋지 못한 영향을 줄 수가 있고, 세월이 흐르면서 그 글은 차츰 생명력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글쓰기’를 제대로 하려면 갖추어야할 조건은 세상살이의 여러 가지 경험들을 심도 있게 경험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깊은 삶의 체험에서 나오는 글이 진실성과 감동과 생명력을 가질 수가 있다. 위에서 서거정 선생은 대장부가 할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두루 유람(遊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는데, 여행은 피상적인 경험일 뿐 깊이 있는 삶의 교훈이 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한 지역의 사람들의 삶의 진솔한 내면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적어도 일이 년 이상은 그들과 같이 삶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복잡다단(複雜多端)한 세상살이와 인간사(人間事)를 제대로 파악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편, 무엇보다도 나의 변함없는 생각은, ‘글쓰기’가 매우 가치 있는 것이기는 하나, 먼저 자신의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갈 참된 진리를 찾아 매진(邁進)하는 인생이 되어야만 가치 있고 보람 있고 행복한 인생이 될 수가 있을 것이며, ‘글쓰기’는 이후 그 연장선(延長線)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聖經)을 쓰지 않았고 공자도 논어(論語)를 쓰지 않았고 석가모니도 불경(佛經)을 쓰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진리의 길로 달려갔을 뿐이며 성경, 논어, 불경은 훗날 그 제자들이 쓴 것들이다.
2025. 5.30. 素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