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 뻗친 충성과 절의
우주에 뻗친 충성과 절의
순조 16년 (1816.6.10) 차대(次對)하였다. 좌의정 한용귀가 아뢰기를,
“고 상신 이경여(李敬輿)는 경학(經學)·명망·지조가 한 시대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효묘(孝廟)께서 왕위에 오른 초기부터 서로의 관계가 융숭하였고, 국가의 기밀 계획에 매양 참여하였으므로,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이 심지어 〈촉한(厥蜀漢)〉 소열(昭烈)의 무후(武侯)3687) 에게 비유하였습니다. 더구나 재차 심양(瀋陽)에 구속되었으나 한결같이 지조를 지켜 변하지 않았으므로, 우주에 뻗친 곧은 충성과 큰 절의는 천하 후세에 길이 전하게 되었으니, 조정에서 보답하는 도리로 볼 때 부조(不祧)의 은전을 시행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청컨대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소서.”라고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註 3687]소열(昭烈)의 무후(武侯) : 소열은 촉한(蜀漢) 선주(先主)인 유비(劉備)의 시호이고, 무후는 유비의 정승인 제갈양(諸葛亮)의 시호임. ☞
출처 :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
*** 백강 이경여 상국 졸기 및 유차(遺箚) ***
효종 8년 정유(1657) 8월 8일(무인)
영중추부사 이경여의 졸기 및 그의 유차(遺箚)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죽었다.
그의 유차(遺箚)에,
“신이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나 티끌만큼의 도움도 드리지 못한 채 지금 미천한 신의 병세가 위독해져 하찮은 목숨이 곧 끊어지게 되어 다시금 상의 모습을 우러러 뵙지 못하고서 밝은 시대를 영원히 결별하게 되었으니 이 점을 땅속으로 들어가면서 구구하게 한하고 있습니다. 오직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기뻐하거나 성내는 것을 경계하고 편견을 끊으시며 착한 사람을 가까이 하고 백성의 힘을 양성하여 원대한 업을 공고하게 다져 죽음을 눈앞에 둔 신하의 소원에 부응해 주소서. 신의 정신이 이미 흩어져 직접 초안을 잡지 못하고 신의 자식에게 구두로 불러 주어 죽은 뒤에 올리도록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막 원로를 잃고 내 몹시 슬퍼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이어 유소를 받아 보니 경계해 가르침이 더없이 절실하고 내용이 깊고 멀어 간절한 충성과 연연해 하는 정성이 말에 넘쳐 흘렀으므로 더욱 슬퍼서 마음을 진정할 수 없다. 띠에다 써서 가슴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경여는 인품이 단아하고 몸가짐이 맑고 간결하였으며 문학에도 뛰어난데다 정사의 재능도 있어서 사림들에게 존중받았다. 젊은 시절부터 벼슬에 나오고 물러가는 것을 구차하게 하지 않았고 혼조(昏朝)에 있으면서도 정도를 지켜 굽히지 않았다. 계해 반정(癸亥反正)에 맨 먼저 옥당에 뽑혀 들어가 화평하고 조용하게 간하니 사랑과 대우가 특별히 높았다. 고 정승 장유(張維)가 일찍이 한 시대의 인물을 평론하면서 말하기를 “이경여는 경악(經幄)에 있을 때에는 마음을 쏟아 임금을 인도하는 책임을 다했고 지방에 있을 때에는 임금의 뜻을 받들어 펴는 임무를 다했으니 지금에 있어서 재능을 두루 갖춘 자이다”고 하였다. 병자년 이후로 벼슬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인조가 그를 소중하게 여기고 신임하였으므로 발탁해 우상에 제수하였다. 그런데 이계(李烓)가, 경여가 명나라에 뜻을 두고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는다고 청나라 사람에게 고하여 두 번이나 심양에 잡혀갔었으나 몸과 마음가짐이 더욱 굳건하였다. 을유년 세자를 세울 때 자기의 소견을 변동하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서 남북으로 귀양살이를 다녔으나 상이 즉위하자 방면하고 수상에 제수하였다. 이 때 선비들의 의논이 매우 격렬하였으나 경여가 화평한 의논으로 견지하면서 이들을 조화시키는 데 온 힘을 기울였는데 혹 이를 그의 단점으로 여기기도 했다. 얼마 안되어 청나라에서 경여가 정승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힐책하자 이 때부터 정승의 자리에서 물러나 묻혀 살았다. 그러나 나라에 일이 있을 때마다 말씀을 올려 건의한 바가 많았었다. 이 때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73세이다.
【원전】 조선왕조실록 36 집 105 면
[주-D001] 혼조(昏朝) : 광해군.
[주-D002] 계해 반정(癸亥反正) : 인조 반정.
[주-D003] 을유년 …… 않았는데 : 인조 23년에 소현 세자가 죽고 봉림 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이경여가 반대하였다.
*** 선고 영의정 부군 가장〔先考領議政府君家狀〕***
서하집 제15권 / 행장(行狀) 서하 이민서 선생 지음
본관은 완산(完山)이며, 계보는 선원(璿源)에서 나왔다.
증조부는 증(贈) 승헌대부(承憲大夫) 광원군(廣原君) 행 창선대부(行彰善大夫) 광원수(廣原守) 구수(耇壽)이다.
증조모는 증 현부인(縣夫人) 동래 정씨(東萊鄭氏)이다.
할아버지는 증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세자이사(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世子貳師) 행 통훈대부(行通訓大夫)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 극강(克綱)이다.
할머니는 증 정경부인(貞敬夫人) 온양 정씨(溫陽鄭氏)이다.
아버지는 증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세자사(世子師) 행 통정대부(行通政大夫) 여주 목사(驪州牧使) 광주 진관병마(廣州鎭管兵馬)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유록(綏祿)이다.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진천 송씨(鎭川宋氏)이다.
공은 휘(諱)가 경여(敬輿)이고, 자(字)는 직부(直夫)이며, 호(號)는 백강(白江) 또는 봉암(鳳巖)이고, 세종 장헌대왕(世宗莊憲大王)의 7대손이다. 장헌대왕(莊憲大王)의 열세 번째 아들 밀성군(密城君) 휘 침(琛)은 총명하고 걸출하여 세종(世宗)께서 매우 사랑하였다. 당시 종실의 지손(支孫)에 대해 아직 관직 진출을 금지하는 법이 없었으므로,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를 처음 설치하면서 공이 맨 먼저 도총관(都摠管)이 되어 군사행정을 기획하고 숙위 군사를 총괄하였으며, 좌리 공신(佐理功臣)에 책봉되어 공렬이 성대하게 드러났으니 이 모든 사실이 나라의 역사에 실려 있다. 이분이 운산군(雲山君) 휘 계(誡)를 낳았는데, 종실의 뛰어난 인물로 선대의 아름다움을 계승하여, 중묘(中廟 중종)가 즉위한 뒤 정국 공신(靖國功臣)에 책봉되었다. 이분이 광성정(匡城正) 휘 전(銓)을 낳았다. 광성군이 광원군(廣原君) 휘 구수(耇壽)를 낳았는데, 이분이 공의 증조부이다.
광원군은 타고난 자질이 중후하면서도 재능이 많아 여러 기예에 두루 통달하여 자식들의 관상을 보면 모두 징험되었고 스스로 들어갈 무덤을 미리 잡아 놓았는데 지관(地官)이 칭찬하였다. 광원군은 4남을 두었는데, 찬성공(贊成公)이 그 장남으로, 휘는 극강(克綱)이고, 자는 자장(子張)이다. 집안을 다스릴 때 법도가 있었고 힘써 배우며 몸가짐을 신중히 하였다. 비로소 급제하였으나 관직은 현달하지 못하고, 후손들에게 경사가 돌아갔다.
아버지 의정공(議政公)은 휘가 유록(綏祿)이고, 자는 유지(綏之)로, 지극한 행실과 아름다운 덕이 있었으며, 부모를 섬길 때 온화하고 조심하였고 차마 그 곁을 떠나지 못하여 쉰 살에도 아이처럼 사모하였다. 타고난 자질이 특출하여 문장을 지을 때는 힘들이지 않고 짓는데도, 격조와 기운이 맑고 기이하여 깊고 풍부한 느낌이 크게 발휘되어 당시 동료들이 모두 도저히 미칠 수 없다고 떠받들며 인정하였다.
공은 행실이 준정하고 말씨가 엄격하여 주저하거나 회피하는 적이 없었다. 언관(言官)이나 홍문관에 있을 때는 반드시 극언하여 자신의 뜻을 펼치니 당시 사람들에게 용납되지 않아 여러 번 지방 수령으로 나갔지만, 부임한 고을에서는 백성들이 부모처럼 사랑하였다. 공이 이미 세상과 잘 어울리지 못한데다가 시사(時事)가 크게 잘못되는 것을 보고는, 더욱 세상에 나가 벼슬할 마음이 없어져 마침내 술로 마음을 풀었고, 매번 술을 마신 뒤 심정이 격렬해지면 그때마다 비통하여 눈물을 흘리며 개연히 굴평(屈平)이 〈회사(懷沙)〉에서 표현했던 분한 마음을 가졌다. 일찍이 적신(賊臣)과 마주 앉은 자리에서 준엄한 말로 꾸짖은 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얼굴에서 목까지 온통 벌개져서 두려워 차마 듣지 못하고 달아난 적이 있었다.
평소 빈한한 선비처럼 담박하게 거처하여, 사는 곳이 더러 비바람도 가릴 수조차 없었으며, 세상을 떴을 때는 집을 팔아 상을 치러야 했다. 공의 덕행에 대한 사실은 청음(淸陰) 상공(相公)의 명(銘)에 있다.
아! 공은 훌륭한 자질을 온전히 지녔고 행실의 절조가 높았는데, 불행하게도 벼슬살이에 좋은 때를 만나지 못하여 세상에 공적을 크게 드러내지 못하고 마침내 근심과 울분으로 건강을 잃었으니, 세상에는 반드시 그의 풍모를 듣고 길게 탄식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의정공은 진천 송씨(鎭川宋氏)를 아내로 맞았는데, 선전관(宣傳官) 송제신(宋濟臣)의 딸로,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만력(萬曆 명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13년 을유년(1585, 선조18) 1월 9일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에 선공(先公 이경여)을 낳았다.
공이 강보에 싸인 아이였을 때 계집종이 안고 길가에 서 있었는데, 승지 강서(姜緖)가 지나가다 보고, 말 위에서 다가오게 하여 살펴보고는, “이 아이는 후일 대단히 귀하게 될 것이니, 공보(公輔)의 그릇이다.”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 가족을 따라 전쟁을 피해 서산(瑞山)으로 갔다. 갑오년(1594, 선조27), 공의 나이 10세가 되어 처음 글을 배웠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이 번거롭게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글자를 익혔고, 연결해서 읽으면서 왕왕 그 의미를 잘 이해하였다. 때로 오언시(五言詩)를 지었는데, 그 어휘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돌아가신 조부가 처음에는 배울 시기를 놓쳤다고 걱정하였다가 이때에 이르러 기특하게 여겼다. 공은 어려서 남다른 자질이 있었는데, 장중하여 아이들과 장난을 치지 않았다. 영특한 모습이 겉으로 드러났고 안으로 정신이 이에 부합하여, 금옥(金玉)처럼 아름다운 도량이 있었다.
기해년(1599), 돌아가신 조부를 따라 곽산(郭山 평안도 곽산군) 부임지에 있었다. 명나라 동 낭중(董郞中)이 길가에서 바라보고 놀라 기이하게 여기고는, 맞이하여 이야기를 나누자고 청하며 말하기를 “상국(上國 중국)에서 태어났어도 세상에 이름을 날릴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하고는, 이어 몇 부(部)의 책을 주고 헤어졌다.
신축년(1601, 선조34),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당시 공은 17세였는데, 덕과 국량이 이미 완성되고 문장이 크게 진보하여 아름다운 명성이 자자하니, 명성과 덕행이 있는 선배들이 모두 선후배를 따지지 않고 교유하였다.
기유년(1609, 광해군1), 증광시 을과에 급제하여 괴원(槐院 승문원)에 뽑혀 들어갔다. 경술년 겨울, 천거되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임명되었다. 신해년(1611), 대교(待敎 예문관 정8품)로 승진하였으며,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를 겸하였다. 공은 시종신 중에서 가장 젊었는데, 사관(史官)으로서 붓을 잡고 출입할 때면 반열에서 빼어났다. 광해군(光海君)이 일찍이 눈여겨보았다가 좌우에게 말하기를 “내가 근신(近臣) 가운데 신선(神仙) 같은 사람 하나를 얻었다.”라고 하였다.
임자년(1612), 봉교(奉敎 예문관 정7품)로 승진하였다. 당시 이이첨(李爾瞻)이 한창 권력을 훔쳐 정치를 농단하였는데, 공에게는 종고모부(從姑母夫)였다. 이이첨이 공에게 자기 아들을 천거하게 하고자 여러 차례 뜻을 보였으나 좌절되자 곧 끊임없이 협박하였다. 하루는 공에게 묻기를 “근일 사관 천거 대상은 누구인가?”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사관 천거는 응당 공의(公議)를 따라야 하고, 당로자(當路者)의 자제는 본디 함부로 천거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나는 공의 친척이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이이첨은 공의 뜻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화를 내며 욕하기를 “당로자 자식은 모두 백정 집 자식이란 말인가?”라고 하고, 공과 절교하였다. 공은 결국 장공 유(張公維)를 천거하였다. 이이첨은 그 무리를 사주하여 장공을 논계하여 쫓아내고 아울러 공을 파직시켰다.
그해 가을, 다시 봉교가 되었고, 전적(典籍)으로 옮겼다. 겨울, 공조 좌랑으로 옮겼고, 지제교를 맡았다. 얼마 있다가 정언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 여러 차례 정언, 사서(司書) 등의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오래 있던 적이 없었다.
을묘년(1615, 광해군7) 4월, 경기 도사(京畿都事)에 임명되었다. 정사년(1617), 공이 극력 지방 관직을 구하여 처음에는 이천(利川)을 맡았다가, 4월에 충원(忠原)으로 바뀌었다. 당시 혼주(昏主)가 임금으로 있으면서 끝없이 부세를 거두어 백성들이 살 수가 없었다. 공이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백성들을 사랑하였고 시행하는 조치에 방도가 있어, 정해진 조항 외의 역(役)은 매번 자신의 봉록(俸祿)으로 채웠고, 불시에 요구하는 것 또한 사전에 준비해 두었다.
하루는 한창 여름에 고을 백성들에게 칡을 채취하여 대령하라고 명하였는데, 백성들이 어디에 쓸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 봄이 되자, 궁궐도감(宮闕都監)에서 과연 칡으로 만든 끈 수천 동(同)을 징수하여 칡 값이 삼대나 모시와 같아졌지만 고을 백성들은 다른 지역과 달리 편안하였다. 그 나머지를 가지고 이웃 고을의 급한 수요에 보태 주고 그 가격을 싸게 받아 다른 부세에 보태니, 온 고을 사람들이 크게 힘입었다.
도감에서 또 장목(長木) 수만 그루를 징발하면서, 백성들에게 부과해야 할 형편이었다. 공은 이에 앞서 경상(京商)들이 북산(北山)에서 벌목하는 행위를 금지하였는데, 이때 공이 강상(江上)으로 달려가 상인들에게 명하기를 “모 산(某山)에 본래 재목이 많다. 너희들 중에 재목을 베어 절반을 도감에 납부하면, 나머지 반을 주겠다.”라고 하였다. 모두 좋아서 펄쩍 뛰면서 공의 명을 따라 목재 수만 개를 다 납부하니, 백성들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공이 기발한 계책을 내어 백성을 구하는 것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도둑을 다스리는 일이 바야흐로 급하여 주현(州縣)에서 잡은 도둑의 신문(訊問)이나 국문(鞫問)은 모두 토포사(討捕使)에게 보냈는데, 체포된 자들 대부분이 원통하게 죽었다. 공이 방백(方伯)에게 청하기를 “고을 사람이 도둑질을 했을 경우 향리에는 증거가 모두 갖추어져 있어 쉽게 그 허실을 알 수 있습니다. 토포사가 단지 엄한 형벌로 다스린다면 심한 곤장 아래 분명 남형(濫刑)으로 인한 억울함이 많을 것입니다. 고을에서 먼저 조사하여, 그 범죄가 도둑질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뒤에 토포사에게 보내 다스리도록 하십시오.”라고 하니 방백이 허락하였다. 이 때문에 온전히 살아난 사람이 매우 많았다.
공이 어떤 마을에 나가 본 적이 있었는데 거주하고 있는 백성이 매우 많아서 아전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아전이 말하기를 “윤 숙의(尹淑儀)의 농장입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윤 숙의가 한창 귀히 사랑을 받고 있었으므로 많은 백성이 그 농장으로 들어갔고 농장에 있는 호(戶)가 수백이었는데 관청에서 감히 역을 부과하지 못하였다. 공이 묻기를 “여기서 공적인 부역[公役]에 응한 자가 몇이나 되는가?”라고 하니, 아전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즉시 이정(里正 동리 책임자)을 불러 정(丁 역 의무가 있는 성인 남자)의 수를 모두 찾아내게 한 뒤 적어서 돌아가 다음 날 이들을 군대에 충당하니, 고을 백성들이 통쾌하게 여겼다.
새벽에 일어나 일을 처리하였는데, 관아의 바깥문을 활짝 열어 두어, 일이 있어 찾아온 백성들이 모두 관아 뜰로 들어와 직접 호소하게 하였다. 자세히 듣고 판결하였고 시일을 끌지 않았으므로, 아무리 궁벽한 곳에 사는 백성이라도 사정을 다 털어놓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골육(骨肉) 사이에 소송이 벌어진 경우에는 반복하여 타일러 스스로 후회하게 만들었고, 재업(材業 재능과 학업)이 있는 선비는 예우하고 학문을 독려하여 성취시켰으며, 효우(孝友)의 행실이 있으면 더욱 대우하여 장려하였으니, 이런 이유로 백성들이 모두 다투어 노력하였다. 토호들이 침해하고 교활한 관리들이 속이는 경우에는 엄격하게 법으로 다스렸고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정의 정치는 어지럽고 과도한 세금이 난무하였지만 고을 경내는 편안하였다.
기미년(1619, 광해군11), 관직을 버리고 돌아와 흥원(興元 전라도 흥덕(興德)) 강가에서 우거하였다. 산수 사이에서 자유롭게 지내니 더욱 세상일에 뜻이 없었다. 처음에 이이첨은 공의 재주와 학문을 사모하여 꼭 구슬려 자기편으로 삼고자 했고, 한찬남(韓纘男) 또한 공의 친척이었으며, 박정길(朴鼎吉)은 평소 공과 오랜 친분을 가지고 있었기에, 모두 공을 굳이 끌어들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마치 자신을 더럽히는 것처럼 간주했기 때문에 이들 적신(賊臣)들이 공을 끝없이 원망하여 기어이 중상모략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공은 평소 행실이 고상했고 또한 고을로만 관직을 돌면서 기미가 있으면 먼저 피했으므로 결국 공을 해치지 못하였다.
경신년(1620, 광해군12) 8월, 조부(祖父 이경여의 아버지 이유록) 상을 당하였는데 예문(禮文)보다 지나치게 슬퍼하였고 매번 상식을 올릴 때마다 땅을 치며 부르짖어 우니, 곁에 있던 사람들이 차마 보지 못하고 감동을 받았다. 상을 마칠 때까지 하루같이 슬퍼하고 그리워하였다. 판서 정광성(鄭廣成)이 공의 여차(廬次 상주가 머무는 처소)에 들렀다가 물러나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누군들 모두 사람의 자식이 아니겠는가만, 나는 이공(李公)처럼 상을 치르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라고 하였다. 공은 궤전(饋奠 제수를 올리고 제사 지냄)하고 남은 시간은 오직 책을 읽고 예(禮)를 강론하는 일만 하였다. 임술년(1622, 광해군14) 탈상한 뒤에도 그대로 여강(驪江 경기도 여주(驪州))에 거주하였다.
계해년(1623) 봄, 수찬(修撰)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3월에 인조대왕(仁祖大王)이 혼란한 군주를 몰아내고 즉위한 뒤 명망과 덕행을 지닌 예전의 인물을 모두 불렀는데, 맨 먼저 홍문관 부수찬으로 공을 불렀다. 공은 감격하여 곧 들어가 사은하였고 얼마 있다가 부교리로 옮겼다. 공은 자신이 맨 먼저 부름을 받았고 또 주상이 정치에 정성을 쏟고 백성들이 바야흐로 다시 살아났으므로, 임금의 자문에 보좌한 뒤에도 아는 것을 모두 진달하였는데 인조 또한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였다.
당시 황폐하고 어지러워진 뒤를 이었으므로 여러 사안들에 문제가 많았고 서북(西北) 지방에는 근심거리가 있었다. 조정에서 한창 군사와 식량을 조달하고 변방 대비를 의논하였는데, 권한을 가진 공경(公卿)은 모두 한순간의 조절에만 힘씀으로써 정치를 해치고 백성을 병들게 하였다.
공은 ‘정론(正論)과 속론(俗論)은 항상 서로 엇갈리는데, 임금은 늘 속론을 펴 주고 정론을 굴복시키게 됩니다. 반드시 이런 태도를 물리친 뒤에야 근본을 바로잡고 백성을 사랑하는 말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반드시 먼저 주상을 위해 의리(義理)의 경중의 단서를 분별하되 경전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본말을 분석함으로써 기어코 임금의 마음에서 일어나 정치에서 발현되는 일들이 한결같이 바른 데서 나오게 하려고 하였다. 자주 공신들과 함께 아뢴 내용을 가지고 주상 앞에서 쟁론하였는데, 조용히 부연 설명하였고 심기가 화평하니 주상 또한 그 말을 경청하였다.
하루는 호조 판서 이서(李曙)가 재화를 징수하는 일에 대해 매우 오래 언급하였다. 공이 물리치며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은 재화가 없는 상태를 일컫는 것이 아닙니다. 민생이 오래 곤궁하다가 거꾸로 매달린 지경에서 겨우 풀려나 장차 자신들을 고통에서 구해 주리라 기대하고 있는데, 일을 맡은 신하가 주상의 덕을 펴고 큰 은혜를 펼치지는 못하고 도리어 재화를 늘리는 것을 우선으로 삼고 있으니, 앞으로 어떻게 백성들의 여망을 위로하겠습니까. 또한 광해 때의 포흠(逋欠 결손 곡식)을 얼마 전에 모두 정지시켰는데 명을 내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또다시 징수한다면 이는 크게 신뢰를 잃는 처사입니다. 무왕(武王)은 주(周)나라를 세우고 거교(鉅橋)의 곡식을 풀었거니와, 상(商)나라의 옛 장부에 따라 세금을 징수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정승 신흠(申欽)이 주상에게 아뢰기를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를 기대할 수는 없고, 관중(管仲)과 상앙(商鞅)의 치세 또한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공이 나아가 “주상께서 처음에 청명하게 하시니 신민들이 바야흐로 요순(堯舜) 시대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관중과 상앙의 공리설(功利說)로 어떻게 우리 임금을 계도하겠습니까. 또한 지금 삼대를 본보기로 삼아도 오히려 초심을 잇지 못하고 사사로운 마음이 점차 생겨 날로 저속해질까 걱정인데, 더구나 당초 삼대를 본보기로 삼지도 않는다는 말입니까.”라고 하니, 신 정승이 부끄러워 사죄하였고, 상 또한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하루는 호패(號牌) 사안을 논의하였다. 공이 나아가 “호패는 본디 좋은 제도입니다만,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반드시 먼저 계획을 정하고 기강을 확립한 뒤에 치세가 이룩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계획을 정하고 기강을 확립하는 것 또한 임금의 한 마음에 근본을 두고 있습니다. 반드시 궁정의 방 모퉁이 깊은 곳에 홀로 있을 때에도 경계하고 삼가, 엄숙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법도에 맞게 스스로 규율함으로써 인욕(人欲)은 물리치고 천리(天理)는 밝게 드러내어, 마음 하나가 싹트더라도 반드시 정밀하게 살펴 그 공사(公私)와 의리(義利)의 분별을 알아 제거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뒤에 임금의 덕이 날로 수양되고 인심이 기뻐 복종하여, 계획은 근본을 갖추고 정해질 것이고 기강은 기댈 곳이 생겨 확립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귀신(貴臣)이 공훈을 믿고 국정을 전단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공이 꿋꿋이 바른말을 하였고 조금도 몸을 낮추어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았다. 대간(臺諫)이 김공 류(金公瑬)를 논핵하니, 이배원(李培元)이 말하기를 “김공은 공로가 크니, 가볍게 논핵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그 말은 옳지 않다. 김공이 비록 세상에 없는 공을 세웠더라도 죄과가 있으면, 언관이 잘못을 바로잡는 책임을 맡고 있으면서 어떻게 공로가 높다고 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연평 귀(李延平貴)가 공과 임금 앞에서 논쟁을 하다가 화를 냈으나 통하지 않자 속된 말로 공에게 욕을 하였다. 공이 나아가 말하기를 “이귀가 공훈을 믿고 교만 방자하여 주상 앞에서 근신(近臣)을 욕하였으니, 이는 매우 불경한 일입니다. 더욱이 자기가 한 말에 대해 남이 감히 그 잘못을 고치지 못하게 하려 하니, 이런 습성을 키워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니, 상이 그렇다고 여겼다. 이공이 물러난 뒤에 사적으로 공을 보고 “내가 자네 아버지와 좋은 사이였는데, 어찌 유독 나를 주상 앞에서 꺾으려고 하는가?”라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조정의 일에는 감히 사사로운 의리를 돌아보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9월, 헌납(獻納)으로 옮겼다. 당시 양사에서 날마다 대궐 아래 모여 광해군 때 죄지은 자들을 계속 논핵하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적발하여 죽이고 귀양 보냈으며, 조금만 오점이 있어도 서로 연루되는 경우 또한 많았다. 공은 “원악(元惡)이 이미 사형되었으니 당여들을 굳이 연루시켜 다스릴 것은 없고, 또 새롭게 시작하는 초기에 사람들이 의구심을 품고 있으니 의당 관대함을 보여야 한다.”라고 말하였는데, 지론이 합리적이어서 죄를 면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가을, 옥당에 있다가 늙은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지방관을 얻고자 하였으나, 상이 쌀과 콩을 하사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오 상국 윤겸(吳相國允謙)이 이조 판서였는데, 평소 공을 신뢰하여 함께 힘을 합쳐 일하였다. 공이 이조에 들어간 뒤 힘써 공도(公道)를 넓히고 사류(士類)를 보전하기 위하여, 대각(臺閣)과 청선(淸選)에는 반드시 당시의 공론에 따랐고 마음대로 관직을 올리거나 내리지 않았으므로, 천거로 발탁된 사람 중에 누구도 공의 덕을 보았다고 여기는 자가 없었다. 인망에 합당하지 않은 공신은 엄격히 억제하였고, 세력을 가지고 시기를 틈타 함부로 자리를 차지하는 자들은 더욱 힘써 저지하였다. 사사로운 은혜가 있는 친척이라도 하나도 자리를 얻은 일이 없었고, 무인(武人)은 공의 깨끗한 판단을 거스르지 못하고 또 감히 찾아가지도 못하였다. 이런 이유로 집에 청탁하러 찾아오는 손님이 없었고, 벼슬길은 맑아졌다. 겨울, 한학 교수(漢學敎授)를 겸하였다.
갑자년(1624, 인조2), 평안도 병마절도사 부원수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임금이 공주(公州)로 피난을 갔다. 공은 어가(御駕)를 호종하여 갔는데, 완평부원군 이공 원익(李公元翼)이 체찰부 종사관으로 불렀다. 어가가 돌아왔다. 3월에 겸 교서관 교리(兼校書館校理)가 되었다. 겨울에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을축년(1625, 인조3) 봄, 겸 혜민서 교수(兼惠民署敎授)가 되었고, 또 겸 시강원 문학(兼侍講院文學)이 되었다. 암행 어사로 영남(嶺南)에 갔는데, 70여 고을을 드나들며 수령의 현부(賢否)를 살피고 백성의 고통을 물어본 뒤, 그중 특히 불량한 수령 10여 명과 선정을 포상해야 할 사람 여러 명 및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몇 가지 역(役)의 면제에 대해 보고하였다. 인조(仁祖)께서는 일찍이 조정 신하들에게 “근래 어사 가운데 이 모(李某)에 견줄 만한 사람은 없었다.”라고 하였다.
여름,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 승진하였다. 또 응교(應敎)로 옮겼고, 얼마 있다가 전한(典翰)으로 승진하였으며, 다시 사간(司諫)으로 옮겼다. 후금의 움직임[西事]이 바야흐로 급박해져 변방에 큰 병력을 주둔시킨 상태였다. 공이 체찰사 종사관으로 명을 받들고 가서 오랑캐 방비를 감독하여, 무기를 점검하고 군사를 먹였으며 방어 상황을 살폈다.
9월, 의주(義州)에 이르렀다. 당시 본래 있던 군사와 지원군으로 진영에 주둔하던 자가 1만 4천 명이었다. 공이 관사에 들어간 뒤, 한밤중에 말 탄 군사 하나를 따르게 하여 통군정(統軍亭)에 이르러 북을 치며 횃불을 들었다. 그러자 군사들이 모두 무기를 들고 성첩에 올라가 횃불을 늘어놓고 응수하였는데, 부윤(府尹) 이완(李莞)은 창졸간에 앞에 이르러 놀라 겁먹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니, 공이 그를 끌고 나와 곤장을 치려고 했다. 조정에 돌아와서 말하기를 “이완은 늙어서 상황에 어둡기 때문에 비상시에는 믿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묘당(廟堂)에서 귀담아듣지 않았으나, 후에 과연 공의 말처럼 패배하였다.
죄인 공(珙)이 여러 번 역적에게 추대되었는데, 조정에서 목숨을 살려 둘 계획으로 영동(嶺東) 고을에 위리안치하였다. 목성선(睦性善)이 그 논의에 반대하여 옥사를 다스린 신하들을 위태롭게 만들고 이어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들을 공격하여 제거하고자 하였다. 공이 동료들과 글을 올려 그 간사한 정상을 지목하여 진달하고, 상소를 태워 버릴 것을 청하였는데, 주상이 목성선을 지지하자 공은 이로 인하여 사임하여 체직되었다.
병인년(1626, 인조4), 계운궁(啓運宮)의 상(喪)에 예장도감 도청(禮葬都監都廳)이 되었다. 당시 염빈(斂殯)의 예(禮)에, 주상이 중궁(中宮)의 의례를 쓰고자 하였으나 도감에서 안 된다는 의견을 견지하여 논쟁이 잦았고 이 때문에 파직되었다. 얼마 안 있어 군기시 정으로 서용되었다.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연접도감 도청(延接都監都廳)이 되었다. 폐군(廢君) 때의 일록(日錄)을 편찬할 때 또 편수낭청(纂修都廳)이 되었다. 문관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되어 독서당(讀書堂)에 들어갔다.
호패법을 시행할 때 또 호패 어사(號牌御史)가 되어 호남(湖南)에 가서 시찰하였다. 호패법을 시행하려고 할 때 주상이 어사들에게 조당(朝堂)에 가서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당시 이서(李曙)가 호패 장부대로 군액(軍額)에 충당하려고 하였다. 공은 안 된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호패란 본래 백성의 숫자를 알려고 하는 일입니다. 이미 백성의 숫자를 파악했다면, 병사를 뽑아 부족한 인원을 보충하는 것은 다음에 할 일입니다. 지금 만일 아직 일을 마무리 짓기도 전에 이어서 군사에 보충한다면 민심이 놀라고 두려워 불안해할 뿐 아니라, 조정의 큰 체모 또한 이와 같아서는 안 되리라 생각합니다.”라고 하니, 여론이 그렇게 여겼다.
정묘년(1627, 인조5), 오랑캐 기병이 평산(平山)에 이르자, 어가가 강도(江都)로 피난 갔다. 공은 호남을 시찰하다가 나주(羅州)에 도착했을 때 그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귀환하여 뒤따라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러 집의(執義)에 제수되었다. 이윽고 어가가 돌아왔다. 5월,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
9월, 충청 감사에 제수되었다. 그때 이인거(李仁居)가 군사를 일으켰다는 고변서가 도착하였고, 조정에서는 공의 출발을 재촉하며 또 경병(京兵)을 지급하여 스스로 방위하게 하고, 공을 조정에 불러 장차 방략(方略)을 지시하려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횡성(橫城)은 백 호(戶)도 되지 않는데, 이인거가 설사 그 지방에서 군사를 불러 모을 수 있다고 해도 어찌 백 리를 넘어 쳐들어오겠습니까? 군현에서 장차 체포할 것입니다.”라고 하고 홀로 말을 타고 한강을 건넜는데, 그 무렵 이인거가 사로잡혔다.
충청 감사의 업무를 볼 적에, 청주 목사(淸州牧使) 심기성(沈器成)이 심기원(沈器遠)의 동생으로서 교만 방자하여 법을 지키지 않자, 공이 즉시 보고하고 쫓아내니 온 도가 숙연해졌다. 영춘(永春 충청도 영춘현)은 토지가 척박하고 메마른 불모지였다. 공이 현재 경작하는 토지에만 세금을 매기도록 조정에 청하여 세금을 반으로 줄일 수 있었다.
해를 이어 흉년이 들자 주현(州縣)에서 체납된 조세가 매우 많아서 백성들이 내야 할 평상시 세금이 다른 날의 배가 되었다. 공은 해마다 체납액의 10분의 1을 거두어 10년이 되면 채우도록 하고, 산읍(山邑)의 경우 곡식 대신 포(布)로 내도록 하며, 값을 대신할 수 있는 다른 세금에 대해서도 예전에는 제값으로 하지 않았던 것을 그 값을 공평하게 하여 나머지를 백성에게 주기를 청하였다. 공이 조정에 요청한 모든 사안에 대해 조정에서 혹 바로 허락하지 않으면 재삼 청하여 재가를 얻고야 말았다. 당시 대부인(大夫人)이 적병을 피하여 서산(瑞山)에 있었는데 공이 봉양하기 위하여 이곳에 부임한 것이었다.
무진년(1628, 인조6), 대사성이 되어 돌아왔다. 기사년(1629) 가을, 부여(扶餘) 백마강(白馬江) 가에 처음으로 거처를 정하였다. 여러 번 소명을 사양하였고, 이어 이조 참의, 부제학 등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오래 관직에 머물지는 않았다. 경오년(1630) 봄, 부제학으로 재직하면서 부모님 봉양을 위해 지방 고을 관직을 청하여 청주 목사(淸州牧使)가 되었다. 충주(忠州)에 있을 때처럼 한결같이 스스로 단속하고 백성을 사랑하였으며, 고을 백성 또한 충주에서 했던 정사를 평소 들었던 터라 명령하지 않아도 절로 신뢰하였다.
청주는 본래 토호(土豪)가 많아 체납 조세를 때맞춰 갚지 않으므로, 정치를 잘했다고 불리는 전임자는 모두 위엄을 부려 가까스로 처리하였다. 사람들은 더러 공에게 큰 고을이기 때문에 공이 평소 하듯이 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백성이란 힘으로 제어해서는 안 되며, 오직 신뢰로 깨우쳐 나의 정성에 감복하게 할 뿐이다.”라고 하고는, 먼저 고을의 대부(大夫)와 장자(長者)를 시켜 대가(大家)와 호족(豪族)에게 타이르기를 “완고하여 따르지 않는 자에게는 또한 자연 법대로 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징수하는 명이 있을 때는 반드시 세 번 기한을 주고 기일을 넉넉하게 하였고, 기일이 이르기 전에는 백성들이 한 사람의 관리도 보지 않았으며, 기한이 이르면 뒤처진 백성이 없이 모두 묵은 체납분을 충당하였으니, 고을 사람들은 위엄으로 다스리던 전후임에서는 없었던 일이라고 칭찬하였다.
고을 백성들이 가흥(可興 충주에 있는 가흥창)에 조세를 수송하였고, 미처 싣지 못한 것은 모두 강변에 노적하였기 때문에 해마다 항상 곡식이 축나고 도둑질을 당하였다. 공이 처음으로 창고를 설치하여 곡식을 넣어 두고 모집한 지역 주민이 지키면서 때맞추어 내다 싣게 함으로써 한 곡(斛 10말)도 잃어버리지 않아 묵은 폐단이 제거되자, 여러 고을이 모두 본받았다. 공은 관리의 직무에 정통하여 정무가 간략하고 번잡하지 않았으며 사안이 도착하면 잘 판단하여 재결에 법도가 있었으므로 아전이나 백성들이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였다.
신미년(1631, 인조9), 부제학으로 소환되었다. 겨울, 동료들과 차자를 올려 8조를 진달하였다. 첫째는 하늘을 공경하는 일[敬天]이고, 둘째는 백성을 돌보는 일[卹民]이며, 셋째는 의견을 경청하는 일[聽言]이고, 넷째는 인재를 등용하는 일[用人]이며, 다섯째는 검약을 숭상하는 일[崇儉]이고, 여섯째는 종실을 돈독히 하는 일[敦宗]이며, 일곱째는 배움에 나아가는 일[進學]이고, 여덟째는 대궐 안을 바로잡는 일[刑內]이었다.
백성을 돌보는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민심의 향배에 따라 나라가 보존되거나 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담당 관원이 위로 주상의 뜻을 체득하지 못하고 정책 시행을 잘못하여 작은 비용을 아끼다가 큰 신의를 잃는가 하면, 세세한 사무를 먼저하고 원대한 계획은 뒤로 돌리고 있습니다. 조세를 탕감해 준다는 은혜가 도리어 신의를 잃는 결과가 되고, 변통한다는 정책이 끝내 분란의 단서만 만들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훈신(勳臣)들은 각자 자기 생각만 하며 백성들의 농지를 다투어 빼앗고, 내수사(內需司)에 투속(投屬)하는 폐단은 이전 시대의 풍습이 점차 불어나고 있습니다. 각 아문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폐단에 대해서는 안팎에서 원성이 자자한데, 여러 궁가(宮家)에서 빚을 징수하는 것은 이보다 더욱 심합니다. 이웃이나 친족에게까지 침탈하여 징수하는 일이 독처럼 팔도에 만연하고, 온갖 역(役)이 무겁고 번거로워 공사(公私) 간에 모두 힘들게 합니다.
더욱이 어떤 의논은 나라의 일과 백성의 일을 갈라서 두 가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상(慈詳)하고 화락한 사람에 대해서는 백성들을 기쁘게 하여 칭찬을 받으려 한다고 하고, 일이나 잘 처리하고 능력을 자랑하는 무리에 대해서는 마음을 다하여 공무를 집행한다고 합니다. 조정에서 숭상하는 기풍은 원근에서 영향을 받게 마련이니, 전하께서 비록 백성을 사랑하고 물건을 아끼는 마음이 있으나 사방의 백성들이 전하의 어짊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일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오늘부터 백성들과 더불어 새로 시작하십시오.
훈신에게 하사한 것은 감사(監司)가 그 실상을 조사하고 호조가 나누어 균등하게 분배하게 하여, 빼앗긴 것은 모두 돌려주고 많이 점유한 것은 나누어 줌으로써 균등하지 않고 잘못 침탈하는 우환이 없게 하십시오. 내수사에 투속한 자는 담당 관원에게 보내 법에 따라 재단하고, 이조에 신칙하여 관유(關由 관문(關文)을 보냄)하는 문이(文移 문서 시행)는 반드시 그 가부를 살펴서 쓸 것은 취하고 못 쓸 것은 버려서 조종의 옛 제도를 회복하십시오.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각 아문의 정책은 담당하는 사람에게 일체 폐지하도록 명하십시오. 여러 궁가에서 법을 어기는 경우 사헌부에서 적발하여 드러나는 대로 통렬히 다스리십시오.
전하께서 또한 스스로 크게 뉘우치고 깨달아서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차마 하지 못하는 정치를 행하여 덕을 우선으로 삼고 이(利)를 뒤로하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해 주십시오. 일 처리나 잘하는 신하를 지나치게 장려하지 말고 선량한 관리들을 지나치게 깎아내리지 말아서, 가혹한 정치는 억제하고 어질고 보살피는 도를 행하십시오.”
검약을 숭상하는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왕자의 길례(吉禮)에 한껏 사치를 부려 진기한 보화를 중국에서 사사로이 사들였고 노리개로 쓸 도구나 제조 기술에도 상당히 마음을 썼습니다. 또한 대군(大君) 집을 지을 때도 조종조의 옛 규정을 넘었는데, 선조(先朝)의 왕자 중에는 지금도 집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이들에 대하여 먼저 조처해 주지 않으시고 대군을 위하여 먼저 집을 지으셨으니, 이것이야말로 ‘임금의 아우를 봉하지 않고 임금의 아들을 봉하였다’는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종실을 돈독히 하는 데 대해서는, 인성군(仁城君)의 자녀들을 시집, 장가보내 배우자를 찾아 줄 것이며, 광해(光海)의 거처를 넓히고 광해 때의 궁인을 보내어 나머지 인생을 즐겁게 살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대궐 안을 바로잡는 데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임금은 밖에 바르게 위치하고 후비(后妃)는 안에 바르게 위치하여 안의 말은 밖으로 나가지 않으며 밖의 말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게 하여, 안과 밖의 한계를 엄하게 하고 올바르지 못한 지름길을 막아야 합니다. 지금 궁중에 문안을 드리는 종들이 금문(禁門)을 출입하고 사사로이 술과 음식을 바치느라 대궐의 뜰에 뒤섞이는가 하면, 산천에 기도한다고 궁녀들이 공공연히 왕래하면서 잡다한 물품을 운반하느라 사복시(司僕寺)의 말이 도로에 지쳐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위로 자전(慈殿)을 받들면서 진실로 거스르지 않는 도리를 아시겠지만, 한결같이 법도대로 따르지 못한다는 것 또한 전하께서 어찌 모두 알고 계시겠습니까. 그리하여 밖에 소문이 전파되어 남모르게 탄식하는 사람이 많아 신들은 마치 부모의 허물을 듣는 것만 같으니 어찌 군부의 앞에 다 진달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주역(周易)》 〈가인괘(家人卦)〉의 ‘위엄으로 하면 길하다.[威如之吉]’라는 말을 체득하여, 자기 자신에게 돌려 정도를 가지고 궁궐을 맑고 엄숙하게 하십시오. 궁첩은 위엄으로 대하고 궁녀들에게는 장중하게 임하여, 총애를 열어서 모욕을 불러들이지 말며 은혜로 의(義)를 덮어 가리지 말고 사사로움으로 공도(公道)를 해치지 마시고, 좌도(左道 굿, 점 등의 술수)의 종류는 일절 금지하십시오.
왕실의 외척과 인척들도 신하이기는 매한가지인데, 어떻게 감히 사사로이 서로 문안하며 사사로이 물건을 진헌한단 말입니까. 만일 무식하여 이런 일을 저지르는 자가 있거든 담당 관원에게 맡겨 법으로 다스려 공명정대한 도리를 보이십시오.”
학문에 나아가는 일에 대해서는, 더욱 학문에 침잠하여 많이 축적하고 쉬지 않는 공부를 더하며 유신(儒臣)을 자주 접하여 강마한 보탬이 보존되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끝에 다시 희로(喜怒)의 지나침과 공사(公私)의 분별에 대해 간곡하게 경계하였다. 주상이 가상하게 받아들이고 각각 사복시의 말 1필을 하사하며, 말하기를 “옥당이 임금의 어질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기고 장차 나라가 망할까 걱정하여 과인의 잘못과 민생의 병폐를 숨김없이 모두 진술하였으니, 내가 가상하게 여기며 감탄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사양하자, 상이 말하기를 “옛사람은 소중한 말 한마디를 천금에 비유하였다. 그런데 지금 너희들의 약석(藥石)과 같은 말은 수백금에 비할 정도가 아니다. 옛날 당 태종(唐太宗)이 위징(魏徵)에게 은항아리[銀甕]를 하사하였을 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라고 하였다.
10월, 어머니 병환으로 휴가를 청해 부여(扶餘)로 내려간 뒤 글을 올려 사직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지금은 너의 의사를 따르겠지만, 너는 노모를 위로하고 같이 한양으로 데리고 와서 충효(忠孝)가 모두 온전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임신년(1632, 인조10) 가을, 승지로 부르자 한양에 도착했다. 계곡(谿谷) 장공(張公 장유(張維))이 이조 판서가 되어, 공을 옥당으로 옮기기를 청하며 말하기를 “경연의 장관은 책을 읽은 사람이어야 합니다.”라고 하자, 결국 부제학이 되었다. 당시 아직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장례를 치르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침문(寢門)에 조알(朝謁 아침 문안)을 정지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무릇 상례 때 장례를 치르기 전에는 전적으로 살았을 때의 예를 적용합니다. 지금 재궁(梓宮)이 빈전(殯殿)에 있고, 향헌(享獻)과 진선(進膳)의 의례는 평소와 다름없는데 유독 조정의 조알만 폐하였으니 예에 온당치 못합니다.”라고 하며 차자를 올려 논하였고, 결국 조알을 행하게 되었다.
겨울, 궁중에 저주로 인한 옥사가 있었는데, 상이 내옥(內獄)에서 다스리게 했다. 공이 쟁론하기를 “사안이 대역(大逆)에 관계되면 왕옥(王獄)도 오히려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반드시 대신과 양성(兩省)이 함께 참여하여 다스리게 하였으니, 국제(國制)가 그러한 것입니다. 지금 환관에게 주관하여 죄를 다스리게 한 것은 토역(討逆)을 엄격히 하고 궁부(宮府 궁중과 조정)를 하나로 여기는 방도가 아니며, 더욱이 옥사의 판단을 분명하고 신중히 하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궁궐이 엄숙하지 않은 데서 간얼(奸孼)이 생겨나는데, 변고가 이미 싹텄으니, 전하께서도 의당 스스로 반성하며 뉘우쳐야 합니다. 이제부터 궁궐을 엄숙히 하여 화란의 계기를 막으십시오.”라고 하였다.
옥사(獄事)가 내려진 뒤 진술 내용에 또 대비의 궁인과 연루된 말이 많았고 증거가 나오면서 사건이 점차 확대되었다. 공이 뒤에 난처하게 양궁(兩宮 인목대비와 인조)을 손상하게 할까 걱정되어 또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전하께서 만번 죽더라도 한번 사는 것을 돌아보지 않는 계책을 내어 모후(母后)를 위급한 상황에서 구하셨으며 물품을 갖추어 봉양하시면서 성심과 효성에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돌아가신 지 오래지 않아 불행하게도 흉악한 역적이 궁액(宮掖)에서 나왔고, 또 불행하게도 자전(慈殿)의 사람과 연루된 것이 많았습니다.
이 무리들이 혹 욕심을 채우지 못하고 청탁이 행하여지지 않자 점차 원망하는 독심을 키워 스스로 악행을 저질렀지만, 양궁의 자애와 효성은 진실로 여전하였습니다. 안옥(按獄)을 표명하였으니 천심(天心)을 알 수 있고, 단지 사사(賜死)를 명하였으니 성상의 뜻이 더욱 드러났습니다. 지금 의당 마음의 미세한 데까지 돌이켜 구하여 지푸라기처럼 작은 것이라도 그 사이에 막히지 말게 하고 마음을 두 가지로 쓰지 않으면 표리(表裏)가 저절로 통찰되고 효성이 신명(神明)에게 통할 것입니다.
지금 어리석은 백성들이 혹 의혹을 품고 유언비어가 전파되고 있으니, 이는 집집마다 다니며 깨우쳐 줄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또 위엄으로 복종시키거나 힘으로 억제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밝게 융화시켜 진정시키는 방법은, 없는 분을 계신 듯이 섬기고 돌아가신 분을 살아 있는 듯이 섬기며, 그가 사랑했던 바를 사랑하고 그가 공경했던 바를 공경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좋아하고 싫어함과 은택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사람들의 의심이 얼음 녹듯이 풀어질 것이고 주상의 효성은 더욱 드러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마침내 그 옥사를 끝까지 추궁하지 않고 단지 수악(首惡 주동자)만 벌주어 죽였으며 진술에 끌어 댄 사람들 대부분은 불문에 부쳤다.
겨울, 대부인(大夫人)을 뵈러 부여로 갔다가, 그 길에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계유년(1633, 인조11) 봄, 전라 감사(全羅監司)에 임명되었다. 조정에서는 공이 관직에 나올 뜻이 없음을 알고, 호남(湖南)이 어머니 사는 곳과 가까우므로 취임하도록 한 것이다. 공은 경악(經幄)에서 나온 뒤로 더욱 성상의 덕을 펴고 백성들의 고통을 진달하며, 이익을 일으키고 폐해를 제거하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먼저 선정(善政)의 실상이 없는 수령들을 조사하였고 뒷배경을 믿고 법을 지키지 않는 자가 있으면 쫓아냈다.
호남은 풍속이 사나워 큰 부(府)나 큰 고을은 포악한 관리들이 대부분 간교하여 권력과 부를 위해 하호(下戶)를 침탈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공은 그들의 간악한 실상을 두루 알고 행부(行部 감사가 관할 고을을 순시함)하다가 그 고을에 이르면 조사하여 다스렸는데, 죄의 경중에 따라 더러 사형에 이르기도 하였으므로 교활한 관리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고 공을 신명(神明)처럼 두려워하였다. 사안 가운데 유폐(流弊)가 누적되어 고실(故實 관례나 법령처럼 됨)이 된 경우, 큰 사안은 논계하여 조정에 처리를 요청하고, 작은 사안은 그 자리에서 결단하니, 오래지 않아 모두 고쳐졌다. 오랫동안 판결나지 않은 옥사 가운데 간혹 10여 명의 사또를 거친 경우도 있었는데, 도착한 즉시 판결하여 원통한 자들을 모두 풀어 주었다.
역(役)을 낼 때 예전에는 토지의 대소 차이를 고려하지 않아 백성들의 고통이 일정하지 않았는데, 공이 모두 결수(結數)의 많고 적음 및 토지의 생산량으로 다시 결정하였다. 내수사의 차인(差人)이나 궁의 노비, 아문의 예속(隷屬) 중에 공문서를 가지고 고을에 말을 타고 횡행하면서 백성들의 이익을 빼앗는 자는 각 고을에서 잡아 보내 다스리게 했다.
공은 맑고 엄격하게 스스로 규율하여 자신을 엄숙히 하고 다른 사람을 만났으므로 사람들이 공경하지 않음이 없었다. 백성들의 일에 대해서는 마치 자신이 굶주리고 목마른 것처럼 느끼고 형편에 맞게 백성을 구제하였는데 생각지 못한 방략이 많았고, 또 체계적이고 치밀하여 크든 작든 놓치지 않았으며, 법률 외에는 화락함으로 이들을 대하였다. 그래서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에게 대단히 정성 어린 환영을 받았다.
가을, 상이 사방에 구언하였는데, 공이 조목별로 도내(道內)의 이해 수십 조목을 주달하였다. 공안(貢案)이 균등하지 않은 폐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왕자(王者)의 정치는 공부(貢賦)보다 중대한 것이 없는데, 전결(田結)이 많은데도 공물이 적기도 하고 혹은 전결이 적은데 공물이 많기도 하니, 균등히 조정하십시오. 또한 납부하는 관청의 숫자를 합병하여 한 고을이 속한 데가 서너 곳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역을 이웃과 친족에게 부과하는 폐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관할하는 사람에 대해 분명한 법이 없어서 단속이 엄격하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쉽게 도망가는데, 한 사람이 역에서 도피하면 피해가 열 집안에 미칩니다. 오직 호패를 시행하여야 이를 구제할 수 있습니다.”
육군(陸軍)을 주사(舟師 수군(水軍))에 나누어 수자리 서게 하는 폐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배 젓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산읍(山邑) 사람은 각각 포 3필을 내어 관청에 속한 고졸(雇卒)로 보내십시오.”
양민(良民)이 줄어드는 폐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사천(私賤)은 고제(古制)가 아닌데, 우리나라는 한 나라의 백성 가운데 반 이상을 나누어 사사로운 집에 귀속시키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천인이 양녀(良女)를 취하여 낳은 자식은 아울러 어미를 따라 양민으로 삼으십시오.”
해마다 세초(歲抄)하는 폐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생취(生聚)는 반드시 10년을 기다려 하는데, 지금은 해마다 군정(軍丁)을 뽑아 포대기에 쌓인 아이까지도 나이를 속여 번직(番直 수자리 방비)을 맡기므로 백성들의 이산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제한하는 제도를 넉넉하게 세워 3년에 한 번 1초(抄)하고 차례로 결원을 보충하십시오.”
각사(各司) 공물주인(貢物主人)이 간사한 꾀를 써서 물건의 시세를 올리는 폐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진성(陳省)을 빼앗고 자문[尺文]을 조작하여 10배의 가격을 부담 지우고 있습니다. 여러 관청에서 어떤 물건이 얼마의 가격인지 상정(詳定)하게 하여, 마음대로 늘리지 못하게 하십시오.”
여러 궁가(宮家)와 여러 관청의 둔장(屯莊)ㆍ염분(鹽盆)ㆍ어살(魚箭)의 폐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어염(魚鹽)의 이익을 호조에서 관할하지 않으면 나라 재정에 온당치 않은데, 하물며 사문(私門)에서 이익을 취하는 경우이겠습니까. 문서[文移]가 오가면서 관리들이 받들어 시행하는 데 정신이 없고, 위임자가 오가면서 백성들이 침탈을 받아 고생합니다. 더욱이 도망칠 은거지가 넓어지고 불법적인 길이 늘어나니 일체 금지하고 폐지하십시오. 궁가들과 각사에서 법 이외로 빚을 거두는 것을 금지하여 주현(州縣)의 백성들이 매월 내는 이자 때문에 파산하지 않도록 하며, 백성이 죄를 얻고 새로운 창고[新庫]에 예속되는 것을 금지하여 간활한 자를 막으며, 주사(舟師)를 통영(統營)에 파견하여 방어하는 제도를 혁파하여 평상시에 백성들을 먼저 피폐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마지막에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나라를 다스릴 때, 백성들의 힘을 덜어 주려면 대동법(大同法)을 두루 실행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고,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려면 호패법(號牌法)을 다시 실행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대동법은 실제 효과가 이미 기전(畿甸 경기)에서 드러났고, 호패법은 식자들이 모두 쉽게 폐지한 것을 애석해하고 있습니다.
본도(本道)의 일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원용전(元用田)이 12만 결이니, 경기의 사례처럼 결당 16두(斗)를 거둔다면 얻을 수 있는 쌀이 12만 8천 석(石)입니다. 본도에서 진헌하는 방물(方物)ㆍ진선(進膳)ㆍ약품[藥] 및 여러 영(營)에서 쓰는 녹봉(祿俸), 여러 고을의 수요, 장병들의 식량을 계산하면 나머지가 8만 6천 석입니다. 경사(京司)의 공가(貢價)는 1년 계산으로 5만 석이니, 3만 6천 석을 충분히 얻을 수 있어 급할 때 변통할 수 있는 조(調 공납)로 삼을 수 있습니다. 지금의 부역(賦役)으로 보아, 결당 16두를 취하고 다른 공납을 면제해 준다면 백성들의 마음에 무척 기뻐할 것이고, 수만 석을 얻어 여분으로 삼으면 나라에 무척 이득일 것입니다. 재정은 부유해지고 백성은 편해지니, 일거양득입니다.
호패법의 시행은, 당초 사안의 조문이 너무 번거롭고 조절이 너무 급박하여 백성들이 지레 놀라고 두려워하였으며 다른 의견이 마구 생겨났습니다. 지금 만일 향교 유생의 강(講)을 정지하고 군보(軍保)의 확보를 늦추고, 먼저 대소 관리들과 여러 역(役)의 명칭이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전의 호적에 따라 각각 스스로 차게 하면, 백성들은 자기에게 피해가 없음을 알고 동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뒤에 차츰 정돈하여 일반 백성에게 적용해서 호(戶)를 감안하여 통(統)을 짜고 조처에 순서가 있게 하면, 일의 실마리를 풀기 매우 쉬울 것입니다.”
대개 공이 한 말은 한 도(道)의 일을 통하여 국정에서 급히 해야 할 일에 미쳤던 것으로 규획한 바가 모두 방도가 있었으나, 대체로 담당 관리에게 저지되어 대부분 시행되지 못하였다.
갑술년(1634, 인조12), 부제학으로 조정에 돌아왔다. 당시 정전(正殿)에 벼락이 쳤다. 공이 상에게 경계할 것을 진달하였는데, 그 말은 다음과 같았다. “지금 말하는 사람들은, 성덕(聖德)에 비록 빠진 것이 있고 조정에 비록 병폐가 있지만, 지난날 윤기(倫紀)의 변이나 토목(土木)의 역사(役事), 뇌물의 횡행은 모두 없었으므로 필시 갑자기 어지러워져 망하는 일은 없으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상의 생각 또한 분명 이로써 스스로 용서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라의 존망은 사람의 존망과 같습니다. 지금 악질에 걸려 죽는 사람이 있고, 풍병이 들어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원기(元氣)가 이미 손상되기에 이르렀는데 적당히 조섭하지 못하면, 육기(六氣)의 병이 반드시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저 윤기의 변은 악질과 같은 부류이고, 토목과 뇌물은 풍병과 같은 부류입니다. 지금 원기가 예전과 같지 않아 육기가 그 틈을 타서 들어와 두렵지 않음이 없는데, 어찌 나는 악질이나 풍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핑계 대면서, 죽음을 모면했다고 생각하고 망녕되이 오래 살기를 바라며 술과 여자에 탐닉하면서 그 위험을 향해 내달릴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지금은 노대(露臺)를 따로 만들고 있어 식자들이 이미 우려하고 있습니다.
궁궐이 엄숙하지 않고 언로가 열리지 않은 데다, 강포한 외적이 국경을 압박하면서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서 그들의 요구대로 바치고는 고개를 숙이고 가련히 살펴 주기를 구걸하고 있습니다. 목전의 편안함을 구차히 바랄 뿐 상하가 반색하며 서로 경하하는 가운데 터럭만큼도 통분을 참고 수치를 머금고 분발하여 자강(自強)할 의사가 없으니, 이를 만년 갈 종묘사직의 계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어 주상에게 언로를 넓히고, 사사로운 청탁을 막으며, 기강을 세우고, 부역을 너그럽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런 종류로 미루어 말한 것이 지극히 통절하였다. 얼마 안 있어 부여로 돌아왔고, 여러 번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을해년(1635, 인조13), 인열왕후(仁烈王后)가 세상을 떴으므로 공은 국상(國喪)에 달려왔다. 당시 세자(世子)가 상례를 주관하기로 의논을 정하였다. 상은 기년복을 입지 않았고, 세자는 주상 앞에서 반길복(半吉服 평복에 가까운 옷)을 입었다. 공이 승지가 되어, 민응형(閔應亨)과 함께 상소하여 논박하였는데, 말하기를 “예(禮)에 ‘집안에 두 존자(尊者)는 없다.’라고 했고, 또 ‘존자가 상을 주관한다.’라고 했으며, 또 ‘모든 상례에는 아버지가 살아 있으면 아버지가 상주(喪主)가 된다.’라고 했습니다. 상례를 주관하는 예가 이토록 엄격한데, 세자가 어떻게 상례를 주관할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이 말하기를 ‘삼년상에 이미 성복(成服)하고 나서는 그 상복을 벗고 길복을 입는 것은 가한 때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왕세자가 초립(草笠)과 흑대(黑帶) 차림으로 진현의(進見儀)를 하도록 하였는데, 임금이 신하의 상에 임해도 상주가 오히려 최복(衰服)을 벗지 않고 다만 질(絰)과 장(杖)만을 제거하는 것은 참으로 흉복(凶服)을 변경할 수 없고 지극한 정을 빼앗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독 인군(人君)의 부자가 궁궐 사이에서만 억지로 정을 빼앗고 변복(變服)하게 하여 이미 강복(降服)된 기년의 상복마저 다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과연 무슨 의리입니까.
성인(聖人)이 염소 가죽으로 만든 갖옷과 검은 관 차림으로 조문하지 않은 것은 다른 사람이 상을 당했을 때도 오히려 길복으로 임하지 않은 것입니다. 더구나 배필(配匹)의 초상(初喪)이고 함께 살던 사람의 빈소가 차려진 상황에서 전하께서 곧바로 가복(嘉服)을 입어서 스스로 평소와 같게 하고, 신하들이 입시할 때 또한 길복을 입게 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병자년(1636, 인조14), 오랑캐가 일으킬 변란의 조짐이 날로 심각해졌으나, 조정에서는 전쟁에 대한 대비가 매우 소략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모두 장차 화가 다가올 것을 걱정하는데도 감히 주상에게 분명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후일 상이 공경(公卿)을 불러 사안을 의논하였다. 공이 나아가서 “지금 오랑캐는 분명 준동할 형세입니다. 전하께서는 반드시 분발하시고 두려워하시되, 구천(句踐)이 회계산(會稽山)에 대해서 하듯, 문공(文公)이 조읍(漕邑)에서 하듯 그 뜻을 견고히 하시고 일관된 의지로 세금을 거두고 병기를 수선하여 일이 이르기를 기다려 대응하면 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던 대로 하면서 구습이나 따르는 것은 생존을 도모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오늘 재상들을 불러 보시기에 신은 반드시 대단한 조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위에서 묻고 아래에서 대답하는 바가 모두 재이를 그치고 전란을 막으며 나라를 보전하고 적을 제압하기에 충분한 의견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아무리 하루에 세 번 접견하더라도 일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성상께서 혼란을 평정하여 반정(反正)을 하셨으니 영명하기가 고금에 으뜸인데, 사업은 도리어 평범한 군주보다 못하니, 이것이 신민(臣民)들이 통탄하는 이유입니다. 전하께서는 위로 하늘의 노여운 견책을 두렵게 여기시고 아래로 나라가 장차 망하려는 상황을 통탄하시어 두려운 마음으로 생각을 바꾸시어 먼저 큰 뜻을 세우시고, 정사(政事)를 정비하고, 현명한 인재를 등용하며, 군졸과 전차를 조련하고, 무기를 정비하여 대업을 영원히 공고히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오랑캐 사신이 와서 화약(和約 평화협정)을 주장하며 우리나라가 명나라와 절교할 것을 요청하였다. 조정에서 배척하고 허락하지 않았더니, 이윽고 화를 내며 곧바로 떠났다. 조정에서는 두려운 나머지 논의하여 사람을 보내 돌아오도록 요청하고자 하였다. 공이 계(啓)하기를 “오랑캐 사신이 와서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하였으니, 대의(大義)가 달린 일에 위망(危亡)을 어찌 계산하겠습니까. 성상의 뜻을 먼저 결단하시어 후환을 돌아보지 않고 의리에 따라 거절하였으므로 의로운 명성이 이미 드러나 인심이 조금은 복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사람을 보내 억지로 돌아오도록 요청한다면 이는 필부필부(匹夫匹婦)가 사정하고 동정을 바라는 것과 같으니, 천승의 나라로서 차라리 나라가 무너질지언정 어찌 차마 이런 거조를 하겠습니까.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고 우리 또한 우리가 해야 할 바를 스스로 다하는 것만 못합니다. 임금과 신하, 위아래가 아침저녁으로 노력하여 안일에 빠져 경박하고 사치스러운 습관을 한꺼번에 씻어 버리고 단지 수치를 씻고 침략을 막겠다고 마음먹어 수천 리 나라가 좌임(左衽)하게 되는 결과를 면하게 하십시오. 오늘날의 계책은 이 이상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12월, 오랑캐가 과연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침략해 왔다. 공은 주상을 호종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산성이 함락된 뒤, 정축년(1637, 인조15) 4월, 경상 감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나라가 새로 큰 변란을 당하여 사방의 인심이 안정되지 않았는데, 영남(嶺南)이 더욱 심하였기 때문에 묘당(廟堂)에서 특별히 공을 파견했던 것이다. 공은 나라의 어려움 때문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마침내 의종(儀從 의전 시종)을 덜고 주전(廚傳 숙식과 거마)을 간략히 하였으며, 가마도 타지 않고 양산도 펴지 않았다. 음악과 기생, 술자리를 일체 물리치고 오로지 죽은 사람과 고아들을 위문하고 백성들을 보듬고 위로하는 일을 급무로 삼았는데, 군읍(郡邑)을 다니며 살핌에 더위와 비바람을 마다하지 않았다.
영남은 평소 소송 문서가 많았는데, 공이 사안을 처리할 때 항상 서리 오륙 명이 앞에서 읽고 판결을 청하면 그 자리에서 불러 주는 내용을 서리가 미처 다 적지 못하였다. 당시 피난 간 사람들이 영남에 가장 많았는데, 돌아갈 힘이 없어서 굶주림으로 죽어 갔다. 공이 주현(州縣)에서 살게 해 주고, 먼저 감영의 곡식 수천 석을 내어 진휼하였으나 부족하자, 수령들에게 녹봉을 덜도록 설득하고 지역 사람들에게 나누어 쌓아 놓도록 권하였으며 또 조정에 청하면서 1개월 동안 지속적으로 진휼하였다.
죽어서 고향으로 돌아가 묻을 수 없는 경우에는 고을에 명하여 차례대로 일꾼을 주거나 혹 우마차로 보냈고, 가난하여 염습을 할 수 없는 경우에는 관과 수의를 마련해 주었다. ‘영남의 짐꾼을 고생시킨다[嶺傍苦擔夫]’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공이 말하기를 “효자가 부모를 잃고 머나먼 타향에서 곡을 하고 있는데 태연히 보고 구하지 않는 짓을 나는 차마 하지 못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수송하는 길목에 있는 고을의 다른 공물도 크게 견감해 줌으로써 이들을 보상하였다. 이렇게 해서 이에 힘입어 살아나거나, 이에 힘입어 돌아가 묻힌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공은 해안을 방어하다가 전사(戰死)하거나 도고(逃故 도망치거나 사망함)로 인해 그저 빈 장부만 안고 있다고 판단하고, 도내에 있는 수군(水軍)의 군적(軍籍)을 합쳐 열람하여 도망치고 빠진 인원을 모으고 보충하고는 개정하여 나누어 방어를 맡겼다. 이전처럼 포를 거두고 있는 폐질(廢疾), 노인, 시정(侍丁), 출신(出身)을 제외시켜 나라의 큰 신뢰를 보존하고, 수자리 서는 군졸에게 필포(匹布)와 여정(餘丁)을 더 지급하도록 청하였다. 또 좌도(左道)의 양전(量田)한 것이 치우치게 무거웠으므로, 1만 결을 줄여 여러 고을에 고르게 나누어 주도록 청하였다.
중국 백성으로 도망친 자들이 각 도에 흩어져 살고 있었는데, 오랑캐가 사람을 보내 수색하게 하였다. 조정에서는 어길 수가 없어서 각 도로 하여금 잡아 보내도록 했다. 공이 비밀리에 보고하기를 “오늘날 국가는 참으로 면목이 없이 천지(天地)에 서 있는데, 하물며 그 유민(遺民)을 잡아 보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영남에 있던 자들만 모면하였다.
공은 ‘나라가 뒤집어져 수치를 갚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밤낮으로 노력하면서 도망병을 베고 빠진 인원을 보충하였으며, 약한 군사는 도태시키고 정예병을 뽑았으며, 무기를 수리하여 정선(征繕)에 대비하였다. 사람을 만나면 늘 말하기를 “망한 나라의 대부(大夫)는 살아서 숨 쉬는 것 또한 구차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올린 하정(賀正) 전(箋)에 “거(莒) 땅에 있던 마음을 잊지 마십시오. 지난해 오늘입니다. 존주(尊周)의 의리를 더욱 돈독히 하소서. 하(夏)나라 역법으로 새로운 봄입니다. 주상께서 치욕을 당하셨는데 저희는 구차하게 살고 있으니, 신의 죄는 죽어도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세상이 온통 어지러우니 공연히 계절이 여러 번 변하는 데 놀라고, 쓸개를 매다는 일에 여전히 성상의 뜻이 더욱 견고하기를 축원하나이다.”라고 하였으니, 마음속에 보존한 바를 알 수 있다.
공이 전후로 호남과 영남을 다스린 것이 몇 해 동안이었는데, 이 무렵 나라에 일이 많았으므로 영남과 호남의 정치에 공은 최선을 다하였다. 공은 총명하여 서리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고, 복잡한 정무를 처리할 때면 사람들은 홍성민(洪聖民) 뒤로 공에 비할 사람이 없다고 칭찬하였다. 공의 지휘를 거쳐 형편에 맞게 도모한 일은 오래도록 시행해도 폐단이 없었으며 대부분 영남의 고사(故事)가 되었다.
무인년(1638, 인조16) 봄, 모친의 병환으로 면직되어 돌아왔다. 공이 일찍이 전란을 우려하여 영남에 있을 때 어류산성(御留山城)의 형세가 장대하고 견고하여 방어소를 설치할 만하다고 눈여겨보았다가, 이때 이르러 상소하여 다음과 같이 수축하자고 청하였는데, 말하기를 “서북쪽에 사변이 발생하면 어가(御駕)가 머무는 곳으로 삼고, 남쪽 지방에 경보가 있을 경우 관방(關防)하는 곳으로 삼으십시오. 지금은 시세에 따르는 계책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지만, 멀리 내다보는 계획 또한 조금도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이해(利害)의 절박함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지만, 공적인 의리 또한 완전히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신이 지난번 남한산성에서 성상을 모시던 날에, 주상께서는 간곡하게 후일 치욕을 씻고 부흥하는 일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귀에 남아 신이 감히 잊을 수 없어 지금까지도 생각이 미치면 저도 모르게 통곡이 나옵니다. 다시 바라옵건대, 성명께서는 당시의 하교를 저버리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4월, 부제학으로 옥당에 있었는데, 당시 더욱 일시적인 편안함만 추구하고 중심 사업이 없음을 보고 공이 걱정스러워 동료들과 응지(應旨)하여 차자를 올렸다. 말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전하께서는 혼조(昏朝 광해군 대) 때 여항(閭巷)에 계셨을 때는 그저 한 사람의 왕손일 뿐이었지만, 종묘사직과 윤기(倫紀)를 염두에 두고 혼란을 바로잡아 반정(反正)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만번 죽더라도 한 목숨을 돌아보지 않겠다는 계책을 내어 동지들을 규합하고 대의를 밝게 치켜들어 윤리가 다시 밝아지고 종묘사직이 다시 안정되도록 하셨으니, 중흥의 아름다움은 지금까지 어떤 일보다 훌륭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다름아니라 의리(義理)로 마음이 가는 바를 중심 잡아 두려움이나 막힘이 없었고, 이해를 따지는 사사로운 마음이 그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뜻과 기운이 강건하고 과단성이 있어 끝내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으니, 수백 명에 불과한 오합지졸로 하루아침에 온 나라가 청명한 업적을 가져왔습니다.
계해년(1623, 인조 원년) 이후로 전하께서 만일 당일과 같은 마음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천승(千乘)의 존귀함을 즐거움으로 여기지 않으면서, 오직 마음을 바로잡고 덕을 쌓으며,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데 전력하여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조금이라도 태만한 일이 없고,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들을 신임하여 그들의 직언을 즐겨 듣고 사의(私意)를 버리고 공도(公道)를 넓히며, 궁금(宮禁)을 엄하게 다스려 간사한 청탁의 길을 막고 절약을 숭상하여 부역을 줄이시며, 공리(功利)의 설에 현혹되지 않고 세금을 잘 거두는 신하를 높이 치지 않으시며, 기강을 바로잡아 형식적인 것들은 통렬히 개혁하고 군율을 엄히 밝혀 군정(軍政)을 정돈하셨다면, 10년도 안 되어 나랏일이 다스려지고 나라의 근본이 점차 튼튼해져서 형세가 저절로 공고해졌을 것이며, 성상의 어진 마음과 어진 소문이 널리 백성들에게 흡족히 전해졌을 것입니다.
외교 담판을 정밀하고 신묘하게 하여 이웃의 적을 두렵게 할 수 있다면, 비록 오랑캐를 쳐부수어 소굴을 소탕하지 못하더라도, 또한 나라를 보전하고 스스로 굳히기에 충분하였을 것입니다. 사람의 일을 이미 지극히 했다면 하늘의 마음도 돌이킬 수 있는데, 어찌 오늘날과 같은 변고가 있겠습니까. 이미 지나간 일은 탓하지 말라 하였으니 굳이 자세히 따질 것은 없지만, 지난 일을 잊지 않는 것은 뒷일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죄를 얻으면 어찌 변고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앞의 수레가 이미 뒤집혔는데, 어찌 오늘 그대로 다시 전철을 밟아서야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변란을 당하신 뒤에 또한 필시 기왕의 일을 돌아보고 장래에 보탬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지금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마음에 품고 계신 바를 신들이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나랏일에 시행되는 것은 터럭만큼도 이전과 다른 점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끝내 여기에 그치고 마실 생각이십니까? 아니면 장차 기대하는 것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까? 방향이 없는 신령한 조화는 헤아리기 어렵지만 형체가 있는 거친 행적은 쉽게 드러나는 법이니, 원근의 의혹이 괴이할 것이 없으며, 천심(天心)이 기뻐하지 않는 것도 어찌 이상하겠습니까.
남한산성을 나온 거조는 말하자면 기가 막히지만, 그런데도 핑계를 댈 수 있었던 것은 수모를 안고 치욕을 참으며 훗날을 도모하자는 것이었으니, 또한 하나의 부득이한 권도(權道)였습니다. 임금과 신하, 위아래가 사직과 함께 죽는 것 외에, 출성(出城)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지신명이나 조종조의 신령도 반드시 전하를 용서하셨을 것이며, 당시 전하께서도 또한 이로써 스스로 용서하고 이로써 스스로 기약하셨을 것입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전하께서 분명 강건한 뜻을 분발하여 이전의 행위를 한번에 뒤집어 성지(聖志)를 견고히 정하고 실행할 때마다 연(燕)나라 소왕(昭王)과 월(越)나라 구천(句踐)을 본보기로 삼았어야 하거늘, 세월은 쉽게 흘러 1주년이 지났습니다만, 전하께서는 뜻이 기운에 빼앗겼고 기운은 형세로 느슨해져서 목전의 안일을 추구하는 풍습이 아래로 흘러가고 쇠퇴하는 형세가 날로 심해졌습니다. 궁실과 먹고 입는 것이 전과 같으며, 곧은 선비들을 물리치고 아첨하는 무리들을 높이고 신임하는 것도 전과 같으며, 간언을 물리치고 자기 의견만 내세워 언로를 막는 것도 전과 같습니다.
심지어 공적인 의리는 전혀 없고 사사로운 이해에만 현혹되어, 천지의 법도를 하찮고 자잘한 것으로 여기고 사람과 사물의 떳떳한 법칙을 민멸되어 사라지게 내버려두기 때문에 천하의 큰 법도를 유지하고 온 나라의 인심을 위로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대단히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 위로는 하늘이 노하고 아래에서는 백성들의 원망하니, 원근의 인정이 이 때문에 애통하고 답답하여 모두 뿔뿔이 흩어질 마음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한가한 시간에 이 마음을 점검하신다면, 과연 건순오상(健順五常)의 본체를 잃지 않으실 것입니다. 인(仁)은 백성을 사랑하는 것보다 절실한 것이 없고, 의(義)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보다 중대한 것이 없으며, 수오지심(羞惡之心)은 또한 그 하나의 단서입니다. 이 세 가지는 하늘의 이치가 발현되어 작용하는 것으로 민멸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 세 가지에 대해, 만일 하늘이 부여한 본성(本性)을 보전하여 터럭만큼도 허위가 섞이지 않고 자강불식(自強不息)하면서 훗날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면, 삼전도(三田渡) 단 아래에서 절했던 일은 굴욕이 되지 않을 것이고, 표전(表箋)을 올리고 신하라고 칭하는 것도 치욕이 되지 않을 것이고, 말을 낮추고 예물을 후하게 바친 것도 수치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황천(皇天)과 조종(祖宗)께서도 더욱 돈독히 돌보아 주실 것이고, 이 나라 신민(臣民)들도 더욱 간절히 사랑하고 모실 것이며, 천자께서도 밝은 식견으로 또한 반드시 우리를 용서해 주실 것이며, 한때 굽혔다가 만세도록 폄으로써 결국 영웅호걸의 사업이 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일시의 안일만을 훔치고 편안히 고식에 빠져 이적(夷狄)도 결국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대의(大義)도 결국 민멸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마음가짐과 일 처리, 호령을 내고 시행하는 일이 모두 전철을 밟으며 한결같이 구습을 따른다면, 천명이나 인심이 전하에 대해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끝내 전하를 등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전하께서 아무리 치욕을 무릅쓰고 의리를 민멸하면서 구차하게 나라를 보존하려고 해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하늘이 차마 멀리 버리지 못하고 얼굴을 맞대고 명하는 것보다도 더 곡진하게 경계시켜 주니, 이는 성심(聖心)이 성(聖)이 될지 광(狂)이 될지 갈리는 분수령이자, 나라가 존속하느냐 망하느냐가 달린 계기인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분발하여 일어나 나에게 있는 천성(天性)을 닦음으로써 저기에 있는 하늘을 되돌려야 합니다. 성심이 한번 바르게 되면 밝은 지혜가 비추는 바에 만 가지 이치가 밝게 드러나, 이치상 해야 할 것은 반드시 용맹스럽게 가서 힘써 행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반드시 간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칠 것입니다.
신 등이 여론을 듣건대, 성절천추(聖節千秋 황제 황후 생일)와 지원(至元 동지 정월) 두 명절에 전하께서 궁궐 뜰에 신위를 설치하고 예를 행하며 서쪽을 향하여 통곡하셨다고 하니, 신 등은 흠모하고 감탄하고 나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왕자(王者)가 될 수 있는 것이니, 진실로 이러한 마음으로 일을 행하면 무슨 성과인들 이루지 못하겠으며,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치욕을 씻고 혼란을 안정시키는 데 어찌 옛사람만 못하겠습니까.
신 등은 또한 전하께서 칼을 어루만지고 손뼉을 치며 먼저 사람들에게 뭔가 하려는 모습을 보이셨으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전하께서 얼음을 안고 불을 쥐고 있는 마음을 풀지 말기를 바랄 뿐입니다. 언제나 이를 생각하여 성상의 뜻이 정해진 뒤에는 날마다 보필하는 신하들과 내정을 정비하고 외적을 물리칠 방책을 강론하여, 어떻게 하면 인재를 얻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백성을 편하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부세를 줄일 것인가, 어떻게 하면 병사를 훈련시킬 것인가, 하면서 오늘 한 가지 일을 실천하고 내일 또 한 가지 일을 실천하여 오래 축적하면서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정직하고 성실하며 식견이 많은 선비를 얻어 경악(經幄 경연)에 두고, 강직하여 거침없이 직언하는 사람에게 대간(臺諫)을 맡겨, 늘 복심(腹心)과 이목(耳目)에 해당하는 벼슬을 사사로운 사람이 아니라 현명한 사대부에게 맡기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나라의 형세는 저절로 높아질 것이고 조정의 기강은 저절로 정비되어, 조정의 모든 일이 저절로 조치되어 정치의 도가 이룩될 것이니, 이것이 중흥(中興)의 대강이고 자강(自強)의 핵심입니다.”
또 말하였다. “절의(節義)는 천하의 큰 법도입니다. 사람이 이것이 없으면 관을 쓰고 옷을 입었어도 짐승과 다름없고, 중국에 살아도 오랑캐와 같습니다. 옛날의 밝은 임금은 반드시 절의를 부양하고 장려했습니다. 절의에 목숨을 바친 진신(搢紳)과 변란을 당해 절의를 보전한 부인(婦人)에 대해서는 의당 정려(旌閭)하고 포상하는 전례(典禮)가 있어야 합니다. 또한 산성에서 의리를 떨친 신하들이 윤기(倫紀)를 부지한 것은 무너지는 세태를 격려하기에 충분하니, 의당 높이 장려하는 의리를 보여야지 너무 심하게 싫어하거나 야박하게 대하여 중외의 의혹을 불어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난번에 일을 논한 신하를 포박한 것은 비록 형편이 부득이해서 그러했지만, 또한 성스러운 조정의 아름다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도리어 이를 능사로 여겨, 다른 의논을 하는 사람의 입을 위협하여 억제하고자 하셨습니다. 화란이 이미 지나갔는데, 지금 척화(斥和)를 주장한 신하를 뒤미처 죄주고 당시의 논의를 심하게 다스리게 되면, 전날의 의로웠던 명성까지도 아울러 자연 손상될 것이니, 지혜롭다고 하겠습니까.”
공이 전후로 여러 번 중대한 계책을 진달하여, 매번 주상에게 연나라 소왕과 월나라 구천이 했던 일을 스스로 노력하고, 일을 할 때면 관중(管仲)이 내정(內政)을 일으킨 뒤 군령에 맡긴 것처럼 겉으로는 그 모습을 보이지 말고 먼저 스스로 다스리기를 권하였다. 그 말은 항상 인주(人主)의 마음에 근본을 두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주상의 과실과 나라의 득실을 말할 때는 준엄하고 격렬하여 금기하고 피하는 일도 건드렸으니, 남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말들이 많았다. 상은 평소 공의 지극한 정성을 알았기에, 매번 너그럽게 용납하면서 받아들였다. 당시 김공 상헌(金公尙憲)이 국론(國論)을 거슬렀는데, 공격하는 자들이 날로 급격했으므로, 공이 그를 위하여 변론한 것이다.
얼마 있다가 대사헌 겸 예문관 제학으로 옮겼다. 당시 정승이 총재(冢宰 이조 판서)와 문형(文衡 대제학)을 공에게 맡기고자 하였다. 논의가 이미 정해진 뒤 그 의사를 넌지시 보였는데, 공은 평소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고 또 시사(時事)가 크게 떠나는 것을 보고 마침내 시론의 잘못을 극력 배척하고 휴가를 청하고 곧바로 귀향하니, 대신이 그 뜻을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 일을 결국 그만두었다. 김 판서 시양(金判書時讓)이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이 무슨 수를 쓰든 얻으려고 하는 것을 이공은 기미만 보여도 피하니, 공은 요즘 세상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가을,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는데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또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남한산성에 있을 때, 전 판서 김상헌과 전 참판 정온(鄭蘊)이 중대한 의리를 보존하고자 죽으려 하다가 이루지 못한 실상을 목격하고는 마음으로 항상 탄복하면서 스스로 돌아보고 부끄러웠습니다. 일전에 차자 중에서 김상헌에 대한 일을 언급한 것은 실로 성스러운 조정이 절의를 부지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김상헌을 공격하기를 마치 색성 소인(索性小人)을 공격하듯 하고, 김상헌을 구원하는 자는 잇따라 죄를 받고 있습니다. 김상헌의 일은 과불급(過不及)을 논할 것도 없이, 수천 리 예의(禮義)의 나라에서 천조(天朝)를 위하여 의리를 지킨 자는 오직 이 두 신하뿐인데, 또 이어 심하게 죄를 준다면 어떻게 천하 후세에 변명하겠습니까. 만약 김상헌을 구원하는 죄를 논한다면 신이 실로 첫 번째이니, 홀로 모면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기묘년(1639, 인조17) 봄, 부제학에 임명되었고 대사성을 겸직하였다. 근래 일 가운데 부제학이 성균관을 겸직한 사람은 공과 정공 엽(鄭公曄)뿐이었다. 얼마 있다가 이조 참판으로 옮겼다. 공은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누차 사직하며 돌아가 봉양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경이 모친을 서울에서 모시면 충과 효가 둘 다 온전할 것이다. 나랏일이 한창 시급하니, 경이 가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공이 또 사정을 진달하며 굳게 청하자, 상이 이윽고 말하기를 “경은 가서 병환을 돌보라. 모친을 서울에서 봉양할 수 없다면 경이 먼저 올라와서 내 기대에 부응하라.”라고 하였다. 공은 감격하여 몇 달 있다가 돌아왔다.
어전에서 선비를 기르는 방도에 대해 조목조목 진달하면서 옛날 삼과(三科)를 세웠던 것을 모방하여 80명까지 인원을 늘린 뒤, 대략 송나라 유학자처럼 학문을 권면하여 성취시키고, 옛 제도를 상세히 살펴 주현에서 가르칠 만한 수재(秀才)를 미리 선발하여 해마다 보내어 빠진 사람을 보충하도록 청하였다. 상이 그 조목을 국학(國學)에 내리고 이어 공에게 그 직책에 오래 있으면서 가르치라고 하였다.
겨울, 형조 판서에 발탁, 임명되었다. 공은 속리(俗吏)들이 일을 피하고 옥사를 농단하며, 문사(文士)라는 자들 또한 경박하여 직무를 살피지 않는 것을 미워했으므로 사무를 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새벽에 출근하여 저녁에야 일을 마쳤고, 하루 종일 판결하면서도 수고를 꺼리지 않았다. 사정과 법령을 참작하고 고려하여 조금도 실수하지 않으니, 정밀한 능력이 있다고 일컬어지는 문리(文吏)들도 모두 미치지 못하였다.
전례[故事]에 임금의 명을 받들어 진행되는 옥사는 하나같이 모두 주상이 직접 결정에 관여하였고, 명이 있지 않으면 담당 관리가 마음대로 논의할 수 없었다. 공이 앞장서서 그 규례를 깨고 여러 번 죄인에게 적용할 법조문을 논의하여 청하였으며, 반드시 법이 어떠한지 물어보았고 사정이 의심스러운 경우는 의복(議覆 의논하여 다시 주달함)을 두세 번 하였다.
혹 주상과 사사로운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은밀히 부탁한 경우라도 반드시 법에 따라 재판하였다. 궁노(宮奴) 중 법을 범한 자가 있었는데 대군(大君)이 사람을 시켜 청탁하자 공이 그 사람을 잡아 형벌을 주었다. 이 때문에 청탁이 문 앞에 이르지 못하였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대리(大理 의금부)에 적체된 죄수가 없어졌다.
경진년(1640, 인조18) 2월, 대부인(大夫人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당시 어머니 봉양을 위해 고을을 청하여 여주(驪州) 목사가 되었는데 미처 부임하지 못한 상태였다. 공은 6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예법을 더욱 굳게 실천하여 병을 얻어 위태롭게 된 적이 여러 번이었다. 상례가 끝나고는 다리가 말라서 걸을 수 없게 되자 보는 사람이 안타까워하였다.
임오년(1642) 여름, 상례가 끝나고 바로 예조 판서,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모두 병으로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처음에 공이 매번 물러나 쉬려고 하였는데, 비록 상의 예우가 매우 융숭하여 감히 오래 떠나지 못하고 대개 두세 번 부르면 혹 한 번은 관직에 나왔지만, 그 마음은 즐겁지 않았다.
그리고 전후로 올린 상소문에 연호를 쓰지 않았는데, 이계(李烓)라는 자가 노중(虜中 청나라)에 있다가 죄를 얻게 되자, 노인(虜人)들이 잡아다 죽이고자 하였다. 그는 우리나라의 은밀한 일을 고해 바치고 요행히 죽지 않기를 바란 나머지, 공이 즐거이 벼슬에 나오려고 하지 않고 숭덕(崇德) 연호를 쓰지 않으며 마음이 항상 남조(南朝)에 있다고 말하였다. 청나라는 사신을 보내 공을 불러 진술을 받고, 결국 공을 잡아갔다.
12월, 공은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 판서 이명한(李明漢) 등과 함께 심양(瀋陽)에 이르렀다. 몇 달이 지난 뒤, 금(金)으로 면제받고 돌아가도록 허락하니, 계미년(1643, 인조21) 3월에 귀환하였다. 당시 청나라의 사정은 예측할 수가 없어서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는데, 공은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이다.”라고 하였다. 상이 여러 번 백금(白金)을 하사하였고, 심양으로 떠날 때에는 또 겨울 추위를 막을 장비를 주었는데, 귀환하자 바로 부여로 내려갔다.
가을, 상이 편찮으시다는 말을 듣고 서울에 갔다가, 그대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공은 여러 고을의 수포(收布)에 이미 승척(升尺)을 정해 나누어 주었으나 중외의 담당 관리들이 마음대로 더 받고 있어 백성들이 명을 감당할 수 없으니 관리를 죄주고 제도를 다시 엄격히 하라고 청하였다.
또한 상례의 기강이 무너진 데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상기는 자식의 큰 윤리이고, 혼례는 교화의 기반입니다. 옛날의 성왕(聖王)이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룰 때 반드시 이 두 가지를 먼저 하였습니다. 난리를 겪은 이래로 백성들의 풍속이 크게 무너지고 예속(禮俗)은 모두 사라져서, 최복(衰服)을 입고 흙덩이를 베개로 삼는 와중에도 혼례를 하여 아내를 들이면서도 태연하게 괴이한 줄 모르고, 비단과 주옥으로 최질(衰絰)과 대지팡이를 장식하고 술과 고기나 비린 음식, 구운 고기와 채식을 차마 한다면 마음에 편하겠습니까. 청컨대 지금부터 3년 안에 딸을 시집보내거나 아내를 얻는 경우 및 처자(處子)가 상중임에도 성혼(成婚)하는 경우는 제도를 정하여 엄금하십시오.”
또한 여러 궁가와 각 아문에서 둔전(屯田)을 광범위하게 점유하는 폐단을 논하며 일체 혁파하라고 청하였다. 상이 모두 따랐으나, 유독 둔전에 대한 사안은 윤허하지 않았다.
공이 또 아뢰기를 “무릇 천하의 일은 시행에 잘못이 있으면 고치기 어렵지 않고 행해져도 큰 폐해가 없습니다마는, 천심(天心 임금의 마음)이 발동할 때 만약 터럭만큼이라도 치우친 사사로움이 있게 되면 미세한 먼지가 눈에 들어가면 산악도 형체가 보이지 않듯이 그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게 됩니다. 공사(公私)의 구분은 기미가 매우 미미하지만 치란(治亂)의 판가름이 실로 여기에서 나누어집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 등의 말을 소홀히 여기지 마시고 극기(克己)의 용기를 힘써 발휘하시어 그렇게 하겠다는 답변을 쾌히 내려 주십시오.”
얼마 안 있어 승진하여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당시 인조(仁祖)께서 오래 편찮았는데, 의원(醫員) 이형익(李馨益)이 요사스러운 술법을 진달하였고, 상이 그 말을 채용하여 연달아 불침[火鍼]을 시술하였고 또 여러 달 신하들을 접하지 않았다. 위아래가 걱정하고 허둥대었으나 감히 분명히 말하는 이가 없었다. 공이 나아가 아뢰기를 “병을 다스리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같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생민(生民)을 잘살게 하고 방본(邦本)을 공고히 하는 데 있는데, 그 근본은 정심(正心)과 극기(克己)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혹 밤중에 군대가 쳐들어오면 부득이 간과(干戈 군대)를 사용하듯이, 병을 다스리는 방도 또한 그렇습니다. 진원(眞元)을 보호하고 조섭하며 기혈(氣血)을 소중히 배양하며, 기호나 욕심을 절제하고 음식을 신중히 함으로써, 수기(水氣)와 화기(火氣)가 서로 조화케 하고 영위(榮衛)를 소통시켜 모든 혈맥(血脈)이 순조롭고 오기(五氣)가 치우침이 없게 하되, 그 근본은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성상께서 편치 않으신 이래, 근본을 다스리는 지론(至論)을 믿지 않으시고, 잘못된 얕은 술수로 만전의 효험을 거두려고 기대하여 뜨거운 불침을 여러 차례 옥체에 시술하셨습니다. 병환을 앓으신 지 10년, 병은 날로 더욱 심해졌으니, 그자의 실정이 탄로나고 기술이 궁색해져서 더 이상 덮을 수가 없는데도 여전히 그치지 않고 요행을 기대한 나머지 겨울을 지나 봄이 될 때까지 한기를 무릅쓰고 피하지 않았으니 이 또한 어찌 성명(聖明)께서 즐거워한 일이겠습니까. 분명 체울(滯鬱)이 극도에 이르러 사화(邪火)가 상승하고, 의혹이 생긴 나머지 온갖 괴이한 생각이 마음을 잡아매어 정신은 번거롭고 기운은 혼란스러워지자 일시의 괴로움을 감당하지 못하여 이 같은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원컨대 성명께서 명석함을 견지하여 사리를 밝히시며 정도(正道)에 거하고 사악함을 물리치시어 어서 불침을 정지하고 신이 말한 대로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는 것으로 병을 다스리는 근본을 삼으십시오. 그런 뒤에 널리 명의(名醫)를 모아 치료 방법을 상의하여 장기적인 효과를 거두십시오.
또한 기운이 울결하면 화(火)가 치솟고, 마음이 번잡하면 혈(血)이 타들어 가는 법입니다. 깊은 궁궐 겹겹이 쌓인 방에서 거의 사람을 접하지 않으시고, 좌우에서 모시는 사람들은 오직 시중드는 자들이기 때문에 강건한 양기가 왕성하지 못하고 나쁜 기운이 쉽게 타게 됩니다. 게다가 경기(驚氣)와 근심이 기운을 꺾고 번뇌가 마음을 녹이는데, 기혈(氣血)이 어떻게 손상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진원(眞元)이 어떻게 병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봄기운이 바야흐로 형통하고 날씨가 점차 화창해지고 있으니, 편전(便殿)에서 한가로이 계시면서 유신(儒臣)을 불러와서 번잡한 글을 제거하고 마음 가시는 대로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혹 경사(經史)를 토론하기도 하고 혹 치도(治道)를 묻기도 하신다면, 반드시 지기(志氣)가 개발되고 성정(性情)이 활짝 펴져 몸의 울체가 소통되고 쇠약했던 의욕이 진작되어, 질병을 제거할 수 있고 치도에도 또한 힘이 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안일하지 않음을 처소로 삼는다’, ‘한가히 여겨 향락에 빠지지 말라’는 말이 나라를 오래 누리게 하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이 가상하게 받아들이고 그날로 불침을 정지하였다.
갑신년(1644, 인조22) 2월, 사신(使臣)이 되어 심양에 이르렀는데, 청나라가 공이 전에 죄를 지은 사람이고 비록 사면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정승으로 승진할 수는 없다고 하고, 마침내 다시 공을 동관(東館)에 가두었다. 물과 불을 며칠 동안 공급하지 않더니, 이윽고 부사(副使) 홍무적(洪茂績) 등에게 본국으로 돌아가 사신의 일을 보고하게 하고, 이어 뒤에 인질이 있는 관사로 옮기고서야 조금 너그럽게 대했다. 당시 김공 상헌(金公尙憲), 최공 명길(崔公鳴吉)이 모두 먼저 잡혀왔었는데, 공이 그들과 같은 관사에 머물렀다.
을유년(1645, 인조23), 청나라가 중국을 평정한 뒤에 연경(燕京)으로 천도하고, 대사면을 내린 뒤 인질을 돌려보내니, 세자(世子) 및 공경(公卿)의 인질과, 구류되었던 두세 명의 재신(宰臣)이 모두 귀환하였다. 3월, 공이 세자를 수행하여 서울에 도착하였다. 상이 인견하고 위로한 뒤 영중추부사에 임명하였다.
공은 두 차례나 이역(異域)에 구금되어 온갖 위험과 모욕을 겪었으나 얼굴빛과 말씨가 흔들리지 않았고 행동거지가 평일과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어려운 경지라고 여겼다.
그해 7월에, 상이 갑자기 대신과 여러 재신을 내전(內殿)으로 불렀다. 당시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이미 세상을 떴고, 원손(元孫)이 아직 성장하지 않았는데, 강 서인(姜庶人)은 과실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고, 상도 편찮아서 오래 조회를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하루는 재상을 불러 보았는데, 공이 부름을 받고 여러 공경과 함께 들어갔다.
상이 하교하기를 “원손은 어리고 나라는 이처럼 위태로우니, 내가 장성한 사람을 택하여 후사로 세우려고 한다.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하였다. 대신들이 차례로 대답하고, 공의 차례가 되었다. 공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기를 “세자인 적자가 정통을 잇는 것은 고금의 떳떳한 법도입니다. 법도를 지키면 아무리 어려운 위험에 처하더라도 유지할 수 있겠지만, 가벼이 임시방편을 쓰면 일이 크게 차서를 잃어 대부분 이 때문에 환난을 초래합니다. 이 때문에 신하의 의리는 상도[經]를 지키는 것을 정도로 삼고, 군주 또한 가볍게 권도(權道)를 논해서는 안 됩니다.
원손은 사람들이 기대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하루아침에 바꾸어 버린다면 인심이 요동칠까 두렵습니다. 성상의 의도가 아무리 나랏일이 위급하다고 해서 장성한 후사(後嗣)를 택하고자 하시지만, 옛날부터 어린 나이에 후사를 이어 덕을 이루고 나라를 보전한 경우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원손이 비록 어리지만 이미 취부(就傅)할 나이가 지났으니, 그 자질이 밝은지 어두운지에 대해서 밝으신 성상께서 어찌 모르시겠습니까. 원손이 만약 정말 불초(不肖)하다면 전하께서 의당 그 안 되는 실상을 말씀하시어 중외의 신료로 하여금 다 같이 성상의 종묘사직을 위한 계책을 알게 하신 뒤에 장성하고 현명한 사람을 골라 후사로 삼으면 될 것입니다.
지금 성상의 하교는 그 현부(賢否)는 언급하지 않으시고 단지 ‘어리다[幼小]’고만 말씀하시니, 어리다고 어찌 다 불가하겠습니까. 오늘 신하들은 오직 세자인 적자가 승계할 것이라는 것만 알고 바삐 등대하였거니와 떳떳한 법도 외에는 다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이공 식(李公植)이 보양관(輔養官)이었다. 상이 이식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원손의 현부는 보양관이 알 것이다.”라고 하였다. 논의가 거의 정해져 갈 때, 공이 말하기를 “전하의 이번 거조가 만약 사사로운 총애 때문이거나 혹 참소로 폐치(廢置)하는 것이라면, 신이 아무리 병들고 보잘것없는 몸이지만 대신의 뒤를 따르고 있으니 어찌 죽음으로 쟁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 종묘사직을 위해 후사를 택하고자 하시니, 이는 신이 감히 애써 쟁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병술년(1646, 인조24) 봄, 강 서인(姜庶人)의 옥사가 일어났다. 처음에 임금이 드실 반찬에 독이 들어 있어서 상이 내옥(內獄)에서 다스리게 했다가, 나중에 그 옥사를 의금부에 내렸다. 공이 대신으로서 국옥(鞫獄)에 참여했는데, 진술이 조 서인(趙庶人)과 연루된 것은 추국청(推鞫廳)에서 모두 삭제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추국청의 고사(故事)에 죄인의 진술은 보태거나 삭제할 수 없다.”라고 하였으나, 중론(衆論)이 듣지 않았다.
옥사가 갖추어진 뒤, 상이 대신과 공경을 빈청으로 다 불러 엄한 유지(諭旨)를 내리고 이어 강씨의 죄를 바로잡으라고 재촉하였다. 공이 대신들과 은혜를 온전히 하라는 말로 계를 올리며, 당 태종(唐太宗)이 승건(承乾)을 처리한 일을 인용하여 세 번 계를 올렸으나, 상의 비답은 더욱 준엄하였다. 영의정 김공 류(金公瑬)가 먼저 엄한 유지로 배척받고 떠났고 공은 다른 대신과 궐문 밖에서 대죄하였다. 상이 더욱 진노하여, 비답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대궐문으로 물러난 대신 등에게 죄를 묻고 그때 반수(班首)가 누구인지 물었다. 당시 공은 위차(位次)가 제일 높았으므로, 결국 공의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출송(門外黜送)하라고 명하였다.
공이 한강 밖으로 나가 명을 기다렸는데 10여 일 있다가 이전 일을 가지고 절도(絶島)에 유배시키라고 명하여, 결국 진도(珍島)에 귀양 갔다. 3월, 바다를 건넜는데 또 위리안치를 명하였다. 당시 상의 분노를 예측할 수 없어 신하들 가운데 감히 공을 위해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공은 귀양 간 뒤에도 환란을 걱정하지 않고 매번 말하기를 “임금을 섬길 때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되지, 화복(禍福)은 운명이다.”라고 하면서, 서적을 보거나 자제들을 가르치는 일로 낙을 삼았다.
무자년(1648, 인조26) 3월, 북쪽 땅으로 옮기라고 명하니, 처음에 경성(鏡城)에 유배시키려고 했다가 특명으로 삼수(三水)로 옮겼다. 공이 3년간 귀양살이를 했고, 또 남쪽에서 북쪽으로 옮겼지만, 비록 집안사람들도 공이 감정을 내색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 뒤, 매번 상이 구언(求言)할 때면 공이 충성을 다하다가 죄를 얻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김 상공 상헌(金相公尙憲) 또한 차자를 올렸는데, 말하기를 “이모(李某)는 지성으로 임금을 사랑합니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대신은 전하의 고굉(股肱)인데, 전하께서 의심하십니다.”라고 하였는데, 상이 모두 살피지 않았다.
기축년(1649, 인조27) 5월, 인조대왕이 승하하였다. 공이 귀양지에서 소식을 접하고 놀라 통곡하기를 아침저녁으로 여러 날 하다가 병을 얻어 위독해지니, 감사가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공은 매번 진덕수(眞德秀)의 〈사상표(謝上表)〉 가운데 “아직도 선실(宣室)의 자리에서 앞으로 나가기를 바랐건마는, 홀연 정호(鼎湖)의 활이 떨어짐을 애통해합니다.”라는 글을 외우면서, 문득 오열하며 눈물을 흘렸다.
효종(孝宗)이 처음 즉위하여 비로소 위리안치에서 풀렸는데, 이는 선왕(先王)의 유언이었다고 한다. 7월, 김공 상헌(金公尙憲)이 말하기를 “공은 죄도 없이 오래 귀양 가 있었으니, 급히 소환하여 인심을 수습하고 선비들의 기대를 위로하고 또 하늘의 노여움을 풀어야 합니다.”라고 하니, 상이 아산(牙山)으로 양이(量移 벌을 낮추어 이배(移配)함)하였다.
경인년(1650, 효종1) 1월, 대신의 계로 풀려 돌아왔다. 당시 김 상공(金相公 김상헌)이 주상 앞에서 있다가, 일어나 절하고 하례하기를 “주상께서 장차 사직을 부지할 사람을 기용하여 오게 하였으니, 신이 감히 경하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공이 서울에 와서 곡하고, 장차 백강(白江) 옛집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당초 조정에서 성지(城池)가 정비되지 않아 비상시에 믿을 데가 없는 것을 우려하다가, 동래 부사(東萊府使)가 보고한 왜(倭)의 소식을 이유로 성지를 정비하고 무기를 수선하게 해 줄 것을 청(淸)나라에 요청하였다. 당시 후계 임금이 새로 즉위하여 사태가 전날과 달라지자, 청나라 사람들이 원래부터 의심하고 있다가 이런 보고를 받자 마침내 우리나라에 다른 뜻이 있다고 의심하였으므로 사신을 몇 명 보내와 그 단서를 문책하였다. 조정에서는 놀랍고 두려워 장차 대군이 쳐들어오리라고 생각했다.
상이 영의정 이공 경석(李公景奭)을 파견하여 의주(義州)에서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여 사죄하게 하였다. 영의정이 나간 뒤 도성 사람들은 더욱 술렁거렸다. 우의정 조공 익(趙公翼)이 계(啓)하기를 “시사가 한창 위급하니 이모(李某)를 기용하십시오.”라고 하니, 상이 허락하고 그날로 영중추부사에 임명하고 서둘러 오라고 전지(傳旨)를 내렸다.
공이 양근(楊根 경기도 양평(楊平))에 도착했을 때 부름을 받고 들어와 사은하였다. 상이 바로 인견하여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오늘 경을 기용한 것은 선왕의 뜻이다. 나랏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공은 날마다 조정에 나와 함께 시국의 어려움을 구제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울면서 사은하였고, 입시한 신하들 모두 감동하였다.
3월, 이공 경석을 대신하여 영의정이 되었다. 처음에 상이 즉위하자 권력을 장악했던 옛 정승이 죄를 입고 쫓겨났다. 김공 상헌이 정승이 되어 맨 먼저 남다른 예우를 받았고, 김공 집(金公集)은 이조 판서가 되었으며, 그 나머지 두세 명의 초야에 있던 현자들이 대각(臺閣)에서 벼슬하게 되자 사림(士林)들이 서로 경축하며 훌륭한 정치가 이루어지기를 모두 기대하였다. 공은 당시 귀양 중에 있었으므로 시의(時議)가 공을 기용하는 것이 급하다고 말했기 때문에 진언하는 대소 신하들이 모두 공을 언급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사태가 중도에 변하여 비상한 기미가 은근히 발동하자 사류(士類)가 서로 잇달아 물러가고, 공이 들어가 정승이 되었다.
공이 정승이 된 뒤 청나라 사신이 관사에 머물면서 성지(城池)에 대해 힐문하며 한창 다그쳤고 또 왕녀(王女)나 왕의 누이와 혼인을 맺으려고 하였다. 전후로 찾아온 사신 10여 무리가 또 유언비어를 퍼트렸고 간혹 사류를 얽었으므로 온 나라가 소란스러웠는데, 응접하고 처리하는 것이 하나같이 공의 손에 달린 상황이었다. 공이 조용히 처리하면서 성색(聲色)이 동요하지 않았고 행동거지가 안정되었으므로, 상하가 믿고 편안하였다. 한창 극성인 적의 노여움을 미봉하고 안으로는 한창 야기되는 국론(國論)을 진정시키니, 이로써 인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공은 ‘주상이 새로 즉위하였고 춘추(春秋)가 한창이신데 나라는 다사다난하고 조정의 의논은 화합되지 않으니, 먼저 상의 마음을 바로잡되 지극한 말과 핵심적인 도를 말씀드려 그 근본을 바로잡고 사류(士類)와 협력하여 함께 나라를 구제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매번 진대할 때마다 강학하여 이치를 밝히고, 현자를 가까이하고 간언을 받아들이며, 성심을 다해 아랫사람을 거느리고 백성들을 다친 사람처럼 보며, 절약을 숭상하고 사사로운 청탁을 막으며, 좋아하고 싫어함을 공정히 하고 시비를 밝히라는 등의 말을 지성으로 알려 드렸다. 나와서 신료들과 말할 때는 함께 힘쓰고 공손함을 합하는 것이 임금을 섬기는 첫 번째 의리라고 하였으니, 위아래가 모두 공의 미더운 성의를 신뢰하였다.
공은 백성을 구제하는 정치를 더욱 급선무로 여겼다. 당시 기근이 든 데다 청나라 사신이 자주 왔기 때문에 주현(州縣)의 능력이 고갈되었고 백성들은 살아갈 희망이 없었다. 공이 상께 청하여 재곡(財穀)을 상평청(常平廳)에 모으고 고관에게 주관하게 하여, 청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기일에 앞서 고을에서 맡아 제공할 비용이 얼마인지 계산하여 그에 해당하는 값을 지급하고, 닭 한 마리, 물고기 한 마리도 관에서 스스로 마련하고 백성에게서 걷지 않는 것을 상례로 삼고자 하였다.
또한 강도(江都)와 남한산성(南漢山城)의 곡식 수천 곡(斛)을 풀어 경기 백성의 종자(種資)로 지급하고, 지부(地部 호조)의 상평금(常平金) 수천 냥을 내어 시민(市民)에게 혜택을 주며, 관서(關西)의 군포(軍布) 수만 필을 내어 양서(兩西 평안도와 황해도)의 참역(站役 역참에서 하는 부역)에 나누어 보조하고, 경기 역참의 사례처럼 해서(海西)에서 관향미(管餉米) 수만 곡을 내어 5년 한도로 계산하여 역참에 비용을 지불하기를 청하였다.
가을이 되어 양서 지방에 흉년이 들자 그 세금을 견감하였다. 도망쳐 떠도는 백성이나 노약자의 가족과 이웃에게 징수하는 행위를 제거하고, 군보(軍保)가 해야 하는 역포(役布) 중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을 줄였으며, 내구마(內廐馬)와 공장(工匠)의 숫자를 줄였다. 호남(湖南)의 전선(戰舡)을 통영(統營)에 보태어 방어하게 하는 것이 온 도에 큰 폐단이 되었으므로 또한 강력히 청하여 혁파하였다. 이로 인해 이해에 극심한 기근이 들었으나 각 도의 백성들이 모두 소생할 수 있었다.
당시 중외에 적체된 옥사가 많았다. 공이 차자를 올려 “바야흐로 봄이라 생명이 피어나고 양덕(陽德)이 한창 형통합니다. 천의(天意)와 인심은 본디 하나의 이치이니 하늘을 몸 받고 계절에 순응하는 것이 왕정(王政)에서 우선 할 일입니다. 근래 듣건대, 의금부에 잡혀온 죄수가 감옥에 넘쳐나고, 지방의 옥송(獄訟) 또한 많이 적체되었다고 합니다. 중외의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속히 재결하십시오. 이어 생각건대 덕을 밝게 하고 형벌을 신중히 하여, 서옥(庶獄)과 서신(庶愼)에 대해 감히 알려고 하지 않은 것은 문왕(文王)이었습니다. 만일 삼척(三尺 형벌)이 나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고 천하의 평온을 사사로운 희로(喜怒 감정)로 한번에 기울어지게 한다면, 백성들은 손발을 둘 곳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은 또한 나라에서 재물을 모을 때 경로가 다양한데도 산림과 천택에까지 모두 취하는 것을 우려하여, 아뢰기를 “지금 나랏일이 매우 위급하고 평소 비축한 것은 거의 고갈되었는데, 담당 관리는 단지 경비만 걱정할 뿐 선왕의 차마 하지 못하는 정치에는 생각이 미칠 겨를이 없습니다. 임시로 설치한 아문(衙門)까지 제각각 의견을 내어 재곡(財穀)을 모으는 데 힘써 산림과 천택에서 작은 이익까지 모조리 취하니 사방의 백성들이 생업을 잃어 원성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나라의 존망이 기계나 재화의 부족에 달려있다고 보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주현(州縣)의 조적(糶穀 환곡 운영)에서 모곡(耗穀)을 아울러 수취하는 것을 우려하여 대계(臺啓)를 계기로 파할 것을 강력히 청하며 말하기를 “나라에서 정치를 하는 요체는 주현에 반드시 여력을 갖추게 한 뒤에야 마비되는 근심을 면할 수 있고, 시의에 맞는 방도를 시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부세의 정공(正供)도 오히려 100% 다 채우도록 독촉하지 않고 100%에서 10%를 줄이는 법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대(五代)의 어지러운 시대에 전적으로 부국강병을 숭상하였으면서도 이를 시행한 일이 있었고, 송(宋)나라에 와서 모두 이 법을 준수하였으나, 나라에 일이 많아진 남송(南宋) 이래 법도가 모두 무너졌고 이 법 또한 폐지되자 주자(朱子)는 회복하자고 청하였습니다. 사간원에서 모곡을 포기하자는 논계는 손익(損益)의 의리에 맞습니다. 다만 조정에서 견감한다고 해도 수령이 제멋대로 낭비한다면, 나라에는 창고에 손실이 나는 폐단이 있을 것이고 백성들은 혜택을 입는 실질이 없을 것입니다. 모곡은 별역(別役)을 보완하고 포흠을 채우며 흉년을 구제하게 하고, 연말에 감사로 하여금 그 문서를 비교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공은 또 관사(官司)가 크고 작은 일로 서로 구애되어 체통이 크게 문란해지는 것을 우려하였다. 이에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반드시 먼저 체통을 세운 뒤에 강목(綱目)에 질서가 잡혀 이윽고 업적들이 이루어집니다. 삼공(三公)이 육경(六卿)을 통솔하듯이, 육경은 백사(百司)를 통솔하며, 백집사(百執事)는 분주히 직무를 수행하고, 승정원은 봉박(封駁)의 직임을 맡고 대간은 규정(糾正)의 책임을 주관합니다. 임금은 대공지정(大公至正)한 도로 위에서 비추어보면서 대소 신하들이 각각 그 직무를 다하고 서로 침탈하지 않게 해야 치화(治化)가 흥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임금은 건극(建極)의 자리에 있으므로 반드시 거조가 마땅함을 얻어야 하며 형벌과 상이 지나침이 없어야 하고, 궁궐을 엄격하게 다스리고 사사로운 청탁을 막으며, 언로를 활짝 열고 인심을 감복시켜, 터럭만큼도 그 사이에 사사로운 의도가 끼어들게 해서는 안 됩니다. 또 통상적인 규례는 걷어치우고 번거로운 형식은 쓸어버리며, 성실을 힘써 쌓아 이를 견지하여 용맹히 나아가는 것이 새로운 정치의 급선무입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조정의 의논이 안정되지 못한데 상이 적절한 방도로 대처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여, 상에게 공명정대함으로 붕당(朋黨)을 타파하는 방도로 삼을 것을 권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붕당이 나라를 병들게 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오늘날 사대부 중 누가 붕당이 나쁘다는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모두 색목(色目)으로 귀결됨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은 반드시 그들이 모두 당론(黨論)을 숭상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혹은 부형(父兄)의 영향에 따라, 혹은 친구와의 교유로 인해 한번 구별되고 나면 그 틀에서 몸을 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는 모두 70년간 대대로 전해 온 여론(餘論)을 계승한 것이기 때문에 옛날 군자는 붕(朋)이 되고 소인은 당(黨)이 되었던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부형과 자손의 현불초가 반드시 다 같지는 않은데, 논의만은 대대로 똑같으니, 이 어찌 그 사이에 묵은 원한이나 깊은 분노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신은 늘 요즘의 붕당은 바로 투기하는 부인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가장(家長)이 수신(修身)ㆍ제가(齊家)의 근본을 다할 수 있다면, 집안의 도리가 바르게 되고 서로 다투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신하를 부리는 도리에도 솔선수범의 방도를 다하게 할 수 있다면, 백관들이 서로 본받아 공경하며 양보하는 풍조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옳은 것을 옳게 여기고 그른 것은 그르게 여기며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고 악한 이를 미워하며, 훌륭한 사람을 올리고 악한 사람을 쫓아내기를 한결같이 하늘의 법칙에 따르며, 좋아하고 싫어하며 주고 빼앗음에 있어 자기의 사심을 참여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당이나 붕을 둘 다 잊는 것이 최선이니, 양쪽을 다 잊으면 마음에 매이는 바가 없게 되고, 기뻐하고 노여워할 때 사물의 특성에 맞게 대하는 것이 제일이니, 사물의 특성에 맞게 대하면 나의 선입관이 개입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어진 이를 천거하면 당(黨)이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 아닌가 의심을 가지게 되고, 악한 이를 탄핵하면 자기와 당을 달리하기 때문에 공격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가지게 되어, 속이고 있지나 않나 하는 생각이 미리부터 성상의 마음을 얽매게 됩니다. 마음속의 본체(本體)가 일단 가리게 되면 어떻게 느슨하고 급한 것을 재결하고 처리하여 과(過)와 불급(不及)의 차이가 없을 수 있겠으며 거조마다 마땅함을 얻어 사방 백성의 마음을 열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틈을 엿보는 자들이 교묘한 수를 부리고 임금의 뜻에 영합하는 자들이 자기의 편리를 도모하여, 조용히 하려고 하면 더욱 시끄럽고 제거하려 하면 더욱 치성하게 되는 것이 요즘에 이미 나타난 현상입니다. 머리를 돌려 궤도를 바꾸지 않으면 그치게 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천도(天道)는 지극히 참되기 때문에 만물이 모두 형통하고, 임금이 지극히 공평하게 하기 때문에 만민이 법으로 삼는 것입니다. 《서경》에 ‘백성들이 사사로운 무리를 짓지 않고 관원들은 아첨하고 빌붙는 악덕이 있지 않은 것은 오직 임금이 표준을 세우기 때문이다.[民無有淫朋, 人無有比德, 惟皇作極.]’라고 하였는데,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당시 관학(館學) 선비들이 문성공(文成公)과 문간공(文簡公)의 문묘종사를 청하였다. 상이 엄한 전지를 내려 배척하였고, 그 사이에 의견을 달리하며 공격하는 자도 있어서 선비들이 모두 성균관을 비우고[空館] 떠났다. 공은 선비들의 원기를 꺾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옛날 성제(聖帝)와 명왕(明王) 및 우리 조종조의 열성(列聖)께서 선비를 대하는 도리는 늘 너그럽게 용납하였고 자신을 굽히는 것을 욕이라고 여기지 않았으니, 어찌 장보관(章甫冠)을 쓰고 공씨(孔氏 공자)를 외우는 자들이라고 해서 자연스럽게 도에 맞는 사람들이었겠습니까. 그 사이에도 분명 뜻만 크고 지나친 무리들이 있었지만, 오늘날 하듯이 엄한 말로 배척하고 문을 닫아 거절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전하의 넓은 도량으로 이 무리들을 용납하는 것이 어찌 백 명, 천 명에 그치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조종조의 고사에 따라 특별히 근신(近臣)을 보내 그들이 생각을 고치도록 타이르십시오.”라고 하니, 상이 공의 말에 감명을 받아,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유생들을 타이르니, 유생들이 모두 성균관으로 나왔다.
공이 전후로 건의한 일이 매우 많았는데, 기강(紀綱)과 본원(本原)의 영역을 더욱 시급하게 여기고 아래로 세도(世道)를 우려한 것이 모두 이런 종류였다. 또 인재는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므로 더욱 사랑하고 아껴 불러 모아야 한다고 여겨, 상에게 반드시 재야에 있는 현사(賢士)를 초치하여 좌우에 둘 것을 권하였다.
유계(兪棨) 등이 시호를 논하다가 죄를 얻었을 때 공은 글을 올려 구원하였다. 그 뒤 상이 또 국문하려고 했을 때, 공은 면대하여 죄상이 없음을 아뢰었으나, 상이 오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아뢰기를 “신이 재상(宰相)으로 있으면서 무고한 사람 하나 구할 수 없으니, 또한 무슨 면목으로 다시 조정에 들어오겠습니까.”라고 하니, 상이 비로소 허락하였다.
대사헌 조석윤(趙錫胤)이 상의 뜻을 거슬러 파직되었을 때, 공은 ‘조석윤은 충직하고 강직하며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이 있으니, 한마디 말이 전하의 뜻을 거슬렀다는 이유로 꺾어 파직시켜 물러나게 하고 간쟁하는 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라고 생각하고, 계를 올리니, 그의 관직을 돌려주었다.
당시 김 상공 상헌(金相公尙憲)이 지방에 있었다. 공이 상에게 청하여 노공(潞公)의 고사에 따라 중대한 논의가 있을 때는 반드시 자문을 구하라고 하였다.
일찍이 입대(入對)하였을 때, 대사간 민공 응형(閔公應亨), 대사헌 이공 후원(李公厚源)과 함께 입시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이 두 신하는 모두 조정에서 기대하는 인물로 양사(兩司)의 장관으로 있으니, 성명께서 가까이 믿으시고 의견을 들으십시오.”라고 하였다.
원공 두표(元公斗杓)와 이공 시방(李公時昉)은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때 같이 주상 앞에 있게 되었다. 공이 또 상에게 말하기를 “두 사람은 모두 공신(功臣)이니 나랏일을 함께 구제해야 하는 사람입니다만, 작은 틈 때문에 공적인 의리에 지장을 주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원컨대 상께서 염인(廉藺)의 의리로 책망하시어 유감을 풀고 한마음이 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홍공 무적(洪公茂績)은 평소 공과 친한 친구였는데, 사헌부에 재직하면서 어떤 일 때문에 공을 비판하게 되었다. 공이 상소하여 대죄하면서 아뢰기를 “풍상을 겪어 꺾인 뒤에도 지조를 변치 않고 일을 만나면 거침없이 처리하는 것은 당개(唐介)도 어려운 일인데, 이 사람은 하고 있으니, 어찌 가상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상이 공의 의견을 훌륭하게 여기고, 홍공을 잘 예우하였다.
조 상국 익(趙相國翼)은 당초 공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함께 상부(相府 의정부)에 있으면서 공이 하는 일을 보고 기뻐하더니 뒤에는 성심으로 심복하여 결국 서로 흔연히 나랏일에 협력하였고 왕실을 함께 도왔으므로, 세상에서는 이 때문에 두 공을 함께 칭찬하였다.
또 이응시(李應蓍)와 장응일(張應一)은 직언을 한다는 이유로 맨 먼저 극선(極選)에 선발하였다. 하나의 재주와 선행이라도 있는 인물이면 또한 반드시 서둘러 천거하여 관직에 진출시켰다. 공이 천거하여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전후로 수십 명이었다.
공은 매번 ‘보상(輔相 정승)의 직임은 의당 행해야 할 일을 진헌(進獻)하고 행해서는 안 되는 일을 폐지하도록 임금에게 건의함을 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사안이 아무리 적어도 시정(時政)과 군덕(君德)에 관련된 것은 반드시 의견을 다 아뢰었는데, 은밀히 쟁론하여 간언하기도 하고 내놓고 글을 올려 공개적으로 논의하기도 하였다.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얼굴에 근심이 서리고, 수십 번이라도 청하여 마지않았다.
상이 평소 공을 중시하여 매우 의지하고 신뢰하였기에 진달하는 말은 모두 굽히고 따르며 말하기를 “성심과 충애의 말을 신중히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남을 구원할 때에, 상이 대단히 분노하여 다른 사람이 간곡하게 간해도 들어주지 않던 일이라도 공이 한 번 말하면 풀어졌다.
이해 겨울, 일이 있어서 해직을 청하였는데, 10여 차례를 아뢰었다. 상이 공을 매우 지극히 위로하면서 처음에는 “나의 기대는 시구(蓍龜)나 주석(柱石) 정도일 뿐만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그 뒤에 또 말하기를 “설사 나라가 편안하여 상서로운 조짐이 매일 나타날 때라도 경의 숙덕과 중망으로 재주와 학문을 겸비하였으니 반드시 정승이라는 중요한 자리에 두어 성취를 기다려야 할 터인데, 하물며 오늘날 천재(天災)와 나랏일이 어떠하며, 크게 위임하는 정성이 또한 어떠한가. 이는 진실로 이른바 나라가 혼란할 때 훌륭한 재상을 생각하는 상황인 것이다.”라고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병이 나자 의원과 약물을 계속 보내 주었고 때로 사람을 보내 기거를 물었다. 일은 모두 집으로 와서 자문을 받아 결정하였으니, 은혜와 예우가 다른 정승에게 했던 바와 달랐다.
당시 청나라가 사신을 보내 이공 경석(李公景奭) 및 조공 경(趙公絅)에게 죄를 더하고자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대신으로 나랏일을 도모하면서 적국 사람들이 생사여탈을 마음대로 하는데도 내가 힐난하지 못한다면 어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사신을 보내 변론을 진달했다. 변론한 글이 도착하자 청나라의 섭정하는 자가 과연 화가 나서 말하기를 “이 주문(奏文)을 주도해서 만든 자가 누구냐?”라고 하였다.
당시 항복한 포로로 용사(用事)하는 자가 우리나라 설인(舌人 역관)과 서로 표리가 되어 청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함께 일을 하였다. 대소 신하들은 그가 마음대로 전단하면서 많은 뇌물을 요구하는 것을 보았고 묘당에서도 모두 은밀히 후대하여 서로 결탁하였는데, 공이 의정부에 있고부터 사사로이 안부를 묻지 않자 그 사람이 깊은 한을 품었다. 이로 인해 공이 전에 심양에 구속되었던 사실을 들어 정승 직임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사신을 보내 공을 금고(禁錮)시켰다.
신묘년(1651, 효종2) 봄, 공이 결국 자리를 떠났다. 상이 공을 소견(召見)하고 눈물을 흘리니, 좌우에서 감읍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뒤 상이 조석윤(趙錫胤) 등에게 말하기를 “시사(時事)가 이 지경인데 영의정도 떠났으니, 이른바 좌우의 손을 잃은 듯하다는 것이다. 예부터 나라의 치란은 인재에게 달렸지만, 그 인재를 쓰고 버릴 때는 운명이 아닌 것이 없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장씨(臧氏)라는 사람이 어찌 나를 만나지 못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내가 지금 정승 한 사람을 등용하지 못한 것이, 또한 어찌 그들이 그렇게 만든 일이겠는가. 하늘이 나로 하여금 우리나라를 잘 다스리게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차자를 올려 서추(西樞 중추부) 및 총재(摠裁), 여러 제조(提調)를 해직해 달라고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재해를 만나 돌아보며 삼가는 데는 덕을 닦는 것만 한 일이 없고, 인심은 복종시키는 데는 성의를 다하는 것만 한 일이 없으며, 우환을 막고 어려움을 구하는 데는 시책이 시의에 맞는 것만 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 아니하여 하찮은 공리(功利)에 마음이 빠지고 거칠고 험한 환경에 뜻이 매여 오로지 방어적이고 신중함만 가지고 수없이 억측하고 의심하면서 총명을 과시하려는 생각으로 남의 은밀한 부분을 꼬집어 내어 아랫사람을 부리고 혼란을 그치게 하는 방도로 삼는다면, 마음만 수고롭게 날로 졸렬해져 일의 공적은 이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실과 거짓이 난무하고 병폐가 수없이 발생할 것입니다. 임금의 마음이 제자리를 옮김에 따라 부정한 길이 잇달아 열려 마침내 어지러워 망하기에 이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주상이 자못 총명함을 과신하여 많은 신하들이 사실이 아닌데도 죄를 얻은 경우가 있었다. 공이 이를 매우 우려하여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오히려 이렇게 언급한 것이다. 상이 답하기를 “경의 상소 내용을 살펴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도다. 상소 가운데 권면하고 경계한 말은 모두가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내 어찌 차마 경의 말을 저버리겠는가.”라고 하였다. 상이 이미 강포한 적에게 구애를 받는 상태여서 공을 끝까지 등용하지는 못했지만 권우(眷遇)가 시들지 않아 기회가 되면 불러 보아 득실에 대해 자문을 받았다.
계사년(1653, 효종4) 여름, 강릉(江陵)에서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는 이변이 일어나자, 상이 신하들을 불러 재이를 막을 대책을 물었다. 공이 부름을 받고 입대하여 다스림의 요체를 힘써 진달하고, 또 공사를 일으켜 백성들을 동요시키는 폐단을 언급하였다. 물러난 뒤에 급하게 들어와 뵙느라 미처 다 아뢰지 못한 것을 마침내 수천 글자의 차자를 올려 조목조목 진달하였다. 내용은 성심(聖心)ㆍ성학(聖學)ㆍ제가(齊家)ㆍ효우(孝友), 종친을 도탑게 하는 일[惇宗], 정승의 임명[任相], 간언을 받아들이는 일[納諫], 성심을 확장하는 일[推誠], 아랫사람을 예로 대하는 일[禮下], 애민(愛民), 정무에 근면할 것[勤政]과 기강을 세우고[立紀網] 명기를 중히 여기고[重名器] 붕당을 없애고[去朋黨] 아첨을 멀리하고[遠讒佞] 형옥을 삼가고[恤刑獄] 교화를 밝히고[明敎化] 인재를 양성하고[養人才] 병정을 닦고[修兵政] 절검을 숭상하고[崇節儉] 신의를 중히 여기는 것[重信義]이었다.
그 내용은 천리와 인욕의 구분을 밝히는 것으로 정심(正心)을 삼고, 몸을 반성하여 의리의 당연함을 구하고 사안을 참고하여 득실의 계기를 징험하는 것을 강학(講學)의 요체로 삼았다. 제가(齊家)는 절검을 숭상하고 궁궐 안팎을 엄히 다스리려는 것이며, 종친을 도탑게 하는 일은 은혜와 의리를 돈독히 하되 사치하고 횡포를 부리는 습관을 방지하려는 것이었으며, 간언을 받아들이고 성심을 다해야 한다고 말한 부분에서 더욱 정성을 쏟아 피력하였다.
애민(愛民)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은혜를 베푸는 정사는 위에서 하는 것이기는 하나 봉행하는 책임은 실로 백성을 기르는 수령에게 달려 있습니다. 한 선제(漢宣帝)는 2천 석(二千石)이 나와 함께 다스린다 하였고 당 태종(唐太宗)은 영장(令長)의 이름을 병풍에 써 두고 늘 보았으니, 백성을 사랑하는 요체를 알았다 하겠습니다. 더구나 대읍(大邑)과 대도(大都)는 나라를 보호하는 곳입니다. 이를테면 호남(湖南)의 전주(全州)ㆍ나주(羅州)ㆍ영암(靈巖)ㆍ남원(南原)과, 호서(湖西)의 충주(忠州)ㆍ청주(淸州)ㆍ공주(公州)ㆍ홍주(洪州)와, 영남(嶺南)의 경주(慶州)ㆍ상주(尙州)ㆍ진주(晉州)ㆍ안동(安東)과, 기타 여러 도에는 각각 사무가 많은 요충지가 있으니, 적임자가 아니면 백성이 피해를 받을 뿐더러 불행히 변란이 있을 경우 어디를 의지하고 믿겠습니까. 이는 더욱 신중히 선임해야 할 것입니다.”
정무를 근면히 할 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늘의 운행은 씩씩하여 쉬지 않는데 이를 체득해야 하는 임금이 조금이라도 끊어짐이 있으면 모든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 문왕(周文王)은 해가 기울 때까지 밥 먹을 겨를이 없었고, 상 탕왕(商湯王)은 어둑한 새벽에서부터 덕을 크게 밝힌 것이 어찌 의미 없는 일이겠습니까. 조무(趙武)가 진(晉)나라의 경(卿)인데도 해 그림자를 보며 안일을 탐하니, 군자(君子)는 그가 잘 마무리하지 못할 것을 알았습니다. 더구나 존귀한 임금이겠습니까. 《예기(禮記)》에 ‘장엄하고 공경하면 날로 강해지고, 안일하고 방자하면 날로 경박해진다.[莊敬日強, 安肆日偸]’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은 궁궐 깊고 엄숙한 곳에 거처하며 부귀의 봉양을 극진히 받으니, 스스로 힘쓰지 않으면 안일함에 중독되지 않는 이가 드물 것입니다. 조종(祖宗)의 번성한 시대에는 임금이 종일 납시어 승지들이 번갈아 들어가 일을 아뢰고 공경(公卿)ㆍ근시(近侍)가 수시로 뵈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기(志氣)가 점점 강해지고 총명이 날로 나아질 뿐 아니라, 또한 인재를 익히 알고 이해(利害)에 더욱 밝아질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견문이 넓은 학자에게 힘입어 지혜를 더하고, 정직한 사람을 가까이하여 덕성(德性)을 도왔으니, 그 효과가 어찌 얕고 적었겠습니까.”
기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기강이 서는 것은 다른 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군주의 마음이 공평하고 정대하여 조금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나의 바른 법을 해치게 하지 않고 충현(忠賢)을 널리 선발하고 진심으로 맡겨서 크고 작은 일에 직무를 다하게 하여 이 법을 유지하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한 무제(漢武帝)는 형벌을 엄하게 하였으나 해내(海內)가 소란하였고, 수 문제(隋文帝)는 엄하게 다스리는 것을 숭상하였으나 천하가 더욱 어지러워졌습니다.
세상에서는 더러 법을 엄하게 하는 것을 가지고 기강을 논하기도 하지만, 고식적인 것을 가지고 인(仁)을 논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배도(裴度)가 당 헌종(唐憲宗)에게 말하기를 ‘한홍(韓弘)이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나가 적을 토벌하고 왕승종(王承宗)이 손을 거두어 땅을 바친 것은, 어찌 조정의 힘이 그들의 생사를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겠습니까. 단지 조처가 마땅하여 그들의 마음을 감복시켰을 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조치가 마땅하다면 어찌 기강이 서지 않을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제갈 무후(諸葛武侯)가 말하기를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은 모두 일체이니 선악을 상벌하는 것이 다르지 않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여기에 이어 말하기를 ‘작은 촉(蜀)나라로도 그 가운데에서 스스로 공사(公私)를 분별하였으니, 이 때문에 양주(梁州)ㆍ익주(益州)의 반을 차지한 나라로서 오(吳)나라와 위(魏)나라 전역을 도모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요즈음에는 궁중과 부중의 구분이 판연히 둘로 갈라져, 사안이 궁액(宮掖)에 관계되고 옥사가 내간(內間 왕비나 후궁)에 관련된 것은 하나도 담당 관원에게 맡기지 못하니, 이것은 사사로운 뜻이 멋대로 행해질 조짐이고 인심이 복종하지 않는 큰 까닭입니다. 전하께서 성지(聖志)를 견고히 정하고 강단을 발휘하여 사사로운 은혜와 작은 어짊에 흔들리지 말고 구습과 잘못된 관례에 구애되지 않으시어, 먼저 내옥(內獄)을 파하시어 옥송(獄訟)을 한결같이 사구(司寇 옥송을 다루는 관원)에게 돌아가게 하고 궁척(宮戚)을 일제히 방헌(邦憲 나라의 법령)에 맡긴다면 기강이 엄숙해질 것입니다.”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기재예장(杞梓豫章) 같은 아름드리 재목들은 하루아침에 자라는 것이 아닌데 높은 산봉우리에는 소나무, 잣나무가 많은데 근교에는 아름다운 나무가 없으니, 일찍 기르지 않으면 어떻게 성취하겠습니까. 동량이 될 재목은 갑자기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닌데 큰 집이 무너지려 할 때에 버틸 만한 나무가 없고 썩은 그루와 약한 기둥이 번번이 나랏일을 망치니, 사직을 위하여 멀리 염려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미리 인재를 길러서 이 일을 담당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 송 태종(宋太宗)은 장제현(張齊賢)을 얻을 때 같은 방(榜)에 속한 사람 모두를 급제시켰으며, 한기(韓琦)는 소식(蘇軾)이 병이 났다는 이유로 시험 날짜를 미루었습니다. 옛날 현명한 군주와 위대한 신하가 인재를 아끼는 것이 으레 이와 같았습니다.
또 선조(宣祖) 시대에 이항복(李恒福)ㆍ이덕형(李德馨)ㆍ신흠(申欽)ㆍ이정귀(李廷龜) 등은 모두 성상께서 간택하여 낭서(郞署)에서 발탁하였습니다. 김우옹(金宇顒)ㆍ유성룡(柳成龍)은 다 영남의 선비이고, 박순(朴淳)ㆍ정철(鄭澈)은 다 호중(湖中)에서 나왔습니다. 그 나머지는 이루 다 적을 수 없으나, 모두 초야의 소원한 선비로서 모두 한 시대의 으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호남과 영남의 선비가 조정에서 현달한 자리에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어찌 장구령(張九齡)이 소석(韶石) 출신이라 하여 도리어 중원에서 태어난 우선객(牛仙客)보다 못하겠습니까. 명문(名門)이나 우족(右族)이라고 하여 반드시 다 현명하다고 할 수 없으며, 초야의 소원하고 미천한 자라고 하여 어찌 다 재능이 없겠습니까. 현명한 자를 등용할 때는 부류를 따지지 않는데, 어찌 원근을 가리겠습니까. 예전과 지금을 견주어 볼 때 매우 한숨이 나옵니다.”
병정(兵政)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주 세종(周世宗)이 일찍이 ‘농부 백 사람이 전사(戰士) 한 사람을 기르지 못한다. 내가 이 쓸데없는 것을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하고 드디어 쓸데없는 인원을 도태하고 정병(正兵)을 가리니 군대의 위세가 드디어 떨쳐졌습니다. 그러니 군대가 강하고 약한 것은 군사의 많고 적은 데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각 도 속오군(束伍軍)을 대규모로 모아 훈국(訓局 훈련도감(訓鍊都監))과 어영청(御營廳)의 군사를 합치면 통틀어 10만의 숫자가 되니, 그 나머지 쓸데없는 군졸을 모두 없애어 어린아이까지 함께 군적(軍籍)에 포함되는 걱정이 없게 하십시오. 무재(武才)가 뛰어나거나 활을 명중시킬 수 있는 자가 아니면 다 화수(火手)로 삼고, 또 출신(出身)ㆍ무학(武學)에서도 정예하고 용맹한 자를 가려 한 대(隊)를 만들어야 합니다.
훈련도감의 병사 또한 노약자를 제거하고 정예병을 뽑아 거기에 들어갈 곡식을 어영청(御營廳)에 주둔하고 있는 군졸에게 옮기고 보인(保人)에게서 쌀을 거두는 것은 면제해 줌으로써 병장(兵仗 병기나 군장)의 자급에만 전념하게 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병사는 정예화하고 식량은 충분할 것입니다.
또한 양민이 점차 줄어드는 것은 사천(私賤)이 날로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임금의 보배는 백성인데, 나라의 반이 사천이고 집에서 기르는 수가 천 명을 헤아리고 있습니다. 종모법(從母法)을 시행하여 백성을 잃는 단서를 막아야 합니다.
기조(騎曹 병조)의 정병(正兵)은 모두 적을 막는 데 쓸 수 있는 자들입니다. 조종조의 제도에 각 관청에 복역시켰을 뿐 아니었으니, 또한 시의에 맞게 강구하여 옛 제도를 회복하십시오.”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번에 암탉이 수탉으로 변한 것은 더욱 음(陰)이 자라날 조짐입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별빛이 낮에 빛나고 간사한 무지개가 해를 가렸으니, 음이 성하고 양이 쇠퇴하는 형상 또한 매우 밝게 드러났습니다. 예전에 소옹(邵雍)이 말하기를 ‘나라가 흥할 때에는 반드시 임금의 도(道)가 성하고 아버지의 도가 성하고 남편의 도가 성하고 군자의 도가 성하나, 망할 때에는 반드시 신하의 도가 성하고 자식의 도가 성하고 아내의 도가 성하고 소인의 도가 성한다. 이 때문에 〈구괘(姤卦)〉의 초육(初六)에서 여장(女壯)을 미리 경계하였으니, 성인(聖人)이 양을 돕고 음을 누른 그 뜻이 깊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선을 들어 쓰고 악을 막으며, 옳은 것을 옳게 여기고 그른 것을 그르게 여겨 군자의 도가 자라나고 소인의 도가 소멸되게 하며, 부시(婦寺 부녀자와 내시)를 물리치고 충직한 자가 무리 지어 나오게 하며, 덕의(德義)를 먼저 힘쓰고 공리(功利)를 뒤로하며, 명분(名分)을 삼가고 백성의 마음을 안정시켜 양강(陽剛)의 정치를 밝히십시오.”
상이 공의 말을 가납하고 공과 대신들을 불러들여 주상 앞에서 회의한 뒤 대부분 시행하였다.
당시 의논하는 사람이 호서(湖西)의 어공(御供) 규례를 변통하고자 하였는데, 상은 중국의 제도처럼 따로 태관(太官)을 설치하여 가미(價米 값으로 치르는 쌀)를 모두 걷어 물건을 사서 진공(進供)하고 내관(內官)으로 하여금 그 일을 주관하게 하려고 했다. 논의가 정해진 뒤 장차 명령을 반포하려는데, 공이 차자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정공법(正供法)은 토산에 맞게 한다[任土]는 의의에 가장 적합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법이 오래되어 폐단이 생겼으니 개혁해야 합니다. 지금 따로 태관(太官)을 설치하는 것은 대체로 중국의 구제(舊制)를 모방하여 공물로 농간을 부리는 방납(防納) 등의 폐단을 구제하고자 하는 것이니,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신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기강을 정돈하고 중외를 엄숙하게 할 적에, 일월(日月) 같은 전하의 살핌은 무엇보다도 먼저 지극히 가까운 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안으로 액정(掖庭)에서부터 밖으로 이서(吏胥)에 이르기까지 은밀한 소굴을 완전히 두드려 부수고 표리를 이루는 세력을 엄히 단절시키는 것이 근본입니다. 만일 일마다 땜질하면서 법을 바꾸어 간사한 짓을 막으려 한다면, 하나는 구제할 수 있겠지만 어떻게 둘을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조처가 혹시 잘못되면 틀림없이 시장에 피해를 입힐 것이고, 이것이 점차 만연하여 혹 궁시(宮市)까지 생긴다면,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중관(中官 내관)이 주관하도록 명하셨는데, 신은 결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을 계획할 때는 반드시 그 시초를 삼가야 하는 것이고, 우환을 염려한다면 조짐을 막아야 합니다. 원(原) 땅의 수령을 선발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당초 사람을 잃은 것은 아니었으나 결국은 후세에 기롱을 남기게 되었고, 3품의 제배(除拜)가 일을 맡긴 것은 아니었으나 끝내는 화(禍)의 계단을 이루었습니다. 전하께서 뒷날을 생각하신다면 이런 거조를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상이 즉시 파하라고 명하였다.
당시 나라에서 강도(江都)를 보장(保障)으로 삼았고, 수신(守臣)이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세를 거두었으므로 백성들이 고통을 감당할 수 없었다. 저축한 곡식이 수만 석에 이르렀는데도 해마다 이자를 늘려 섬 백성이 파산하고도 갚을 수가 없었다. 이에 구언(求言)을 통해 이해득실을 극력 진달하고, 이어 제치(制置)의 방도를 논하였다. 그 내용에, “이른바 보장(保障)은 세금을 관대하게 하고 부역을 줄여서 먼저 그곳 민심을 얻어 근본을 깊고 두텁게 하여 변란이 있을 때 믿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일을 맡은 신하가 공을 세우는 데 힘써 부세를 거두는 정책이라면 안 하는 것이 없어, 강도 전체가 공사(工事)에 동원되느라 민력이 피폐하고, 환곡을 내고 들이는 사이에 백성의 경제는 탕갈되었습니다. 편호(編戶)는 생업을 잃고 원망이 도로에 가득하니, 진양(晉陽)의 보장은 아마 이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모은 곡식은 비록 흩어 버릴 수 없지만, 오늘부터는 증가시켜 쌓아 놓지 말고, 실어 올 곡식이 있어도 연해(沿海)의 형편이 되는 지역에 나란히 배치하고 급할 때 배로 운반하도록 대비하십시오. 따로 수신에게 칙유하여 호별 부세를 줄여 주는 정책을 실시하여 민력이 두터워지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갑오년(1654, 효종5) 겨울, 청나라 사신이 도착하여 질책하는 소리가 자자하니, 공이 충주(忠州) 시골집으로 피해 가게 되었다. 공이 입궐하여 사직하니, 상이 내려가는 길에 진선(珍膳)과 내온(內醞)을 노자(路資)로 주었고, 충주에 도착한 뒤 또 쌀과 콩을 내렸다.
을미년(1655) 봄, 사단이 풀린 뒤 상이 전지(傳旨)를 내려 서둘러 불렀다. 공이 사양하며 “신은 나이가 이미 70이니, 의리상 물러나 쉬어야 하는데, 어찌 나갔다가 다시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극력 치사(致仕)를 청하였다. 상이 누차 전지를 내려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지금이 어찌 원로대신이 시골에 물러가 있을 때인가.”라고 하였다. 공은 당초 거기서 생애를 마칠 계획이었는데, 엄한 부름에 어쩔 수 없어 억지로 도성에 들어왔다. 상이 즉시 인견하여 선온(宣醞 술자리를 베품)하고 조용히 위로하면서 이어 시골 상황을 물었다. 당시 추쇄(推刷)가 한창 급박하여 지방에 소요가 심했는데, 공이 힘써 그 폐단을 진달하였다.
정유년(1657, 효종8) 여름, 큰 가뭄이 들었다. 상이 중외에 구언(求言)하였다. 공은 봄부터 병에 걸려 여러 번 위독하였는데, 이때 다소 차도가 있자 마침내 병을 무릅쓰고 다음과 같이 차자를 올렸다.
“전하께서 즉위한 이래, 예사롭지 않아 두려워할 만한 재해가 적지 않은데, 그 가운데 매년 근심거리가 되어 매번 곡식이 자랄 계절에 백성들의 명맥을 끊어 주상의 마음을 괴롭힌 것은 가뭄이 가장 심했습니다. 생각건대, 음양의 기운은 교섭하지 않으면 막히고 고르지 않으면 답답하니, 이것이 가뭄이 일어나는 이유입니다. 전하의 총명과 예지를 가지고 만일 맑고 한가로운 틈에 돌이켜 반성하며 스스로 관찰하면 마음에서 일어나 정치에 해가 되는 것들은 그 득실을 징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일을 한번 보겠습니다. 안으로는 군도(君道)가 날로 경직되고 세도(世道)는 날로 떨어져, 예의(禮義)가 펼쳐지지 않고 형벌은 질서가 없으며, 언로는 막혀 사람들의 마음은 통하지 않고, 준걸 또한 등용되지 않아 군자의 도가 소멸하고 있습니다. 밖으로는 민생이 물에 빠진 듯하여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 갑니다. 정령은 번거롭고 가혹하여 세금은 갖가지 방법으로 거두며, 벌인 공사는 날로 번잡하여 국력은 날로 위축되고 있습니다. 피폐한 백성들은 곤궁해져 눈을 치켜뜨고 원망하고 있는데, 홍수와 가뭄에 기근까지 겹쳐 유망(流亡)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으니 안으로는 교섭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고, 밖으로는 고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생(董生)이 말하기를 ‘금슬(琴瑟)이 심히 조화롭지 않을 때, 반드시 풀어서 다시 고쳐 매야 연주할 수 있고, 정치를 하는데 심히 시행되지 않으면 반드시 변혁하여 다시 교화해야 다스릴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전하께서 정신을 가다듬고 치세를 도모한 지가 지금 9년이 되었는데, 전하께서 가지고 계신 방도가 무엇이고, 시행하신 일이 무엇이기에 정치의 효과가 이와 같은지 모르겠습니다.
천하의 일은 선악의 득실이 완전히 상반됩니다. 선하다고 생각했으면 실천하고, 불선(不善)한 것을 알면 한 일을 반성할 뿐입니다. 관대한 것과 가혹한 것, 간언을 채용하는 것과 간언을 막는 것, 아첨하는 신하를 좋아하는 것과 곧은 신하를 좋아하는 것, 백성을 사랑하는 것과 백성을 동요시키는 것, 검약과 사치, 이치를 살피는 것과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 덕을 숭상하는 것과 형벌을 숭상하는 것, 근본을 다스리는 것과 말단을 다스리는 것은 완전히 상대되고 상반된 것입니다.
전하께서 여러 해 시행하셨는데 거기서 이미 얻은 것이 없었다면, 오늘날 인심을 위로하고 하늘의 노여움을 돌리고 국맥을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다른 방법이 아니라 그동안 한 일을 잘 반성하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감히 바라건대 전하께서 이번 두려움의 단서를 통해 결연히 뉘우치는 뜻을 보이고, 성상의 뜻을 견고히 정하여 전에 한 일을 단숨에 반성하십시오. 번거롭고 가혹한 정책을 혁파하고 관대한 정령을 시행하며, 공리에 대한 논의는 물리치고 덕의의 다스림을 앞세우며, 치우치고 사사로운 것을 끊고 공도(公道)를 열며, 참소하고 아첨하는 자들을 멀리하고 충직한 사람을 가까이하십시오. 널리 언로를 열고 준걸을 등용하여 높이며, 모든 옥사를 신중히 하고 백성들의 힘을 아끼십시오. 번거롭고 소요를 일으키며 편안하지 못하여 백성들에게 폐해가 되고 재정을 손상시키는 모든 전후의 정사(政事)는 전부 파하십시오. 안으로 궁금(宮禁)에서부터 밖으로 군국(軍國)의 온갖 수요 중에서 쓰임에 절실하지 않고 정법(正法)에 해가 있는 경우는 일체 견감하여 백성들의 화목을 유도하고 하늘이 내리는 아름다움을 맞으십시오.”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정의 거조가 옳은데 백성들도 옳다고 하는 경우가 치세(治世)이며, 조정의 거조가 그른데 백성들이 그르다고 하는 것 또한 치세입니다. 조정의 거조에 대해 스스로 옳다고 하지만 보통 백성들은 감히 의논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점이 자사(子思)가 위(衛)나라 임금을 위해 걱정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남달리 총명하시며, 기쁘거나 노한 감정을 절제하지 않습니다. 남달리 총명하면 아랫사람을 대할 때 경시하는 병통이 있으며, 기쁘거나 노한 감정을 절제하지 않으면 상벌에 당연히 시행해야 할 원칙을 잃게 됩니다. 이 때문에 신하들이 기가 죽어 물러나 나약하게 되어 잘못된 것을 과감하게 바로잡지 못하니, 설사 중대한 안위와 이해가 걸려 있더라도 또한 장차 입을 다물 것이니, 어찌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조정에서는 매양 인재가 없다고 탄식하는데 이 또한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신의 생각에 인재의 출현은 임금이 좋아하고 싫어함, 등용하고 버림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을 보면 민첩하고 예리한 인사가 노성한 사람보다 많고, 재간 있는 신하가 경학(經學)을 공부한 신하보다 많습니다. 강개하게 감히 말하는 자는 적고, 시세에 부침하며 용납되는 자는 많습니다. 이는 성상께서 일 처리를 잘하는 신하는 좋아하고 장려하면서 강직한 선비는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바람이 불면 풀이 쓸리는 습성이 길들여져서 점점 이처럼 된 것입니다. 전하께서 만일 경학을 진심으로 좋아하신다면 경학을 하는 무리들이 진출할 것이고, 강직함을 진실로 좋아하신다면 강직한 사람들이 또 이를 것입니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육지(陸贄)의 말에 ‘지금 급한 일은 사람들의 마음을 자세히 살피는 데에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매우 갈망하는 것을 먼저 시행하시고, 사람들의 마음이 심히 싫어하는 것은 먼저 제거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생각하기에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이 심히 싫어하는 것은 추쇄(推刷)만 한 것이 없습니다. 백년간 폐지되었던 법을 갑자기 거행하여, 감춰지고 누락되었던 수만 명을 모두 수색하느라 팔도가 소란스러워진 지 지금까지 3년이 되었습니다.
이미 입법이 엄한 데다 위아래가 서로 받들면서 그 뜻을 얻어내는 데 있으므로 원통한 일이 있어도 펼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길거리에 나돌고 관가에 호소하고,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리면서 살아 있는 것을 괴로워하는 것을 눈과 귀로 보고 들을 때마다 마음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제왕의 정치는 천심을 얻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없고 또한 인심을 얻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하늘과 사람은 둘이 아니니, 사람을 얻는 것이 하늘을 얻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리를 잃고 원통함을 호소하는 자가 이렇게 많은데, 어찌 위로 하늘의 조화를 범하기에 부족하겠습니까. 지금은 일이 거의 실마리를 찾았는데 곡직(曲直)이 서로 반반이니, 이장(弛張)하고 변통하는 것은 바로 이때에 달려 있습니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이 듣건대, 선왕(先王)이 군대를 다스리는 법은 모두 세 계절에는 농사에 힘쓰고 한 계절에만 무예를 강습하게 했고,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에 와서도 고친 적이 없습니다. 이포진(李抱眞)이 택로(澤潞)에 있을 때에도 여전히 이런 뜻을 준수하였으니, 이는 군대가 농사를 짓고 있었기 때문에 형세가 본디 그러했던 것입니다.
성상께서 군대 일에 유의하여 영(營)을 설치하고 단속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법규가 있으니 뜻이 매우 훌륭합니다. 다만 지금 창을 잡은 군졸들은 모두 보습을 잡는 백성인데, 한창 농사를 지을 계절에 양식을 준비하고 기계를 갖추어 날마다 공문(公門)에 모이게 하여 백성들의 농사철을 빼앗으면 피해가 심각하니, 겨울철에 조련하고 나머지 계절에는 농사를 짓게 해야 할 것입니다.”
당시 상이 나라의 형편이 떨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여 엄격하게 국정을 이끄는 것을 높이 쳤다. 일을 맡은 자 또한 다투어 어지러이 바꾸었지만, 한 일에 효과는 없었다. 공이 매번 ‘왕자(王者)의 정치는 반드시 먼저 백성을 얻어야 하고, 부강을 위한 사업 또한 근본에 힘쓰는 데 달려 있으며, 온 세상이 지금 내닫고 있는 것은 다만 나라를 병들게 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였기에, 재이를 계기로 극언하였다.
끝에 다시 말하기를 “빈 문서만 조금 갖추는 것이 하늘을 섬기는 방도는 아닙니다. 어리석은 신은 피전(避殿)이 궁궐을 엄하게 하고 사사로운 길을 막는 것보다 못하고, 감찬(減饌)이 검소한 덕을 숭상하고 부비(浮費)를 절약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해마다 구언 하교를 내려보내는 것이 한 가지 일을 실제로 행하는 것만 못하고, 조정에서 애통해하는 것이 밤낮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하면서 실질에 힘쓰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니, 상이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차자에서 논의한 것은 흉금에서 우러나온 지극한 정성이 아닌 것이 없도다. 만약 임금을 사랑하는 경의 충심이 아니라면 여러 달 앓으며 병석에 있던 상황에서 어찌 이렇게까지 말하겠는가. 성실하고 간곡한 뜻이 저절로 마음을 감동시키니, 어찌 변폭(邊幅)을 꾸며 빈말을 하였겠는가.
아, 과인이 욕심을 끊고 밤낮으로 몸 달아 하면서 조그마한 효과라도 보고자 하는 것은 공리(功利)가 말단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진실로 지극한 비통함이 가슴에 서려 있는데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과인이 어리석어 어긋난 일이 많으니, 대인 선생(大人先生)이 우려하여 잊지 못할 만도 하도다. 스스로 반성하여 가슴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차자 중에 재간 있는 신하가 경학을 익힌 신하보다 많다고 한 말이 있지만, 언제 재간 있는 신하가 있었는가. 진실로 아직 보지 못했도다. 근래 대각의 신하가 대부분 스스로 안정되지 못하고 매양 당론을 가지고 서로 이기고자 하므로 과인이 이들을 미워하고 있는데, 점점 격해져서 혹 지나친 거조를 면치 못하기도 하니 매우 한탄스럽도다. 선생이나 어른들이 이끌고 권면하여 이런 악습을 없앨 수는 없겠는가.”
7월, 학질을 앓다가 설사까지 얻어 10여 일을 고생하다가, 8월 8일에 정침(正寢)에서 돌아가니, 춘추 73세였다. 하루 전날 밤, 자제들에게 부축하게 하여 앉아 유소(遺疏)를 불러 주었다. 임종하던 자식들이 울면서 유언을 청하였다. 공이 눈을 뜨고 바라보면서 “백강(白江)으로 돌아가지 못한 것이 나의 한이다.”라고 하고 절명하였으니, 아, 애통하도다!
유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나 조금도 보답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병이 이미 위독하여 미약한 숨마저 끊어지려고 하니, 주상을 다시 뵙지 못하고 밝은 세상과 영결하게 된 것이 제가 땅속에 들어가면서 갖는 구구한 한입니다. 오직 밝으신 성상께서 기뻐하거나 성내는 것을 경계하고 편벽됨을 끊으며, 선한 사람과 친하시고 백성의 힘을 길러 원대한 사업을 공고히 하여 죽음에 임하는 저의 소원에 부응하여 주십시오.”
상소가 들어가자 상이 깊이 애도하시며 승정원에 하유하기를 “이제 막 원로를 잃어 내가 애통하였는데, 이어 유소가 들어오니 경계하는 말이 지극히 절실하고 말뜻이 깊고 멀다. 간곡한 충성과 그리워하는 정성이 말 밖에 넘치니 더욱 비통하여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 허리띠에 쓰고 가슴에 담아 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떠난 사람은 따르기 어려우니, 내 마음을 어떻게 형언하겠는가만, 심정을 보여 좌우에게 알게 하노라.”라고 하였다.
그 뒤 경연에 임하여 또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영중추부사가 비록 질병이 많았다고는 하지만, 내가 항상 그의 강건함을 믿었는데 어찌 갑자기 이렇게 될 줄 생각했겠는가.”라고 하고, 공의 집안이 평소 가난하니 상을 준비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하여, 이어 장례 전에 과록(科祿 관직에 해당하는 녹봉)을 지급하게 했으니, 여기서 공의 군신(君臣) 관계를 볼 수 있다. 아, 애통하도다!
그해 10월에 교하(交河)에 장례 지냈다가 그 뒤 무오년(1678, 숙종4)에 포천(抱川)으로 이장(移葬)하였다.
공은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워서 안으로 강건하고 밖으로는 따뜻하였는데, 정순(精純)한 기(氣)가 커서 안팎으로 맑게 빛났으며 화락하고 순조로운 기운이 용모에까지 이르렀다. 어렸을 때부터 다투거나 화를 내는 기색이 없었다. 남들과 말을 할 때는 마음이 평안하고 정신이 안정되어 말을 하면 사람들이 신뢰하였다. 평소에는 즐거웠고 시원하여 자연스러웠지만 일을 당해서는 오로지 떳떳한 도리로 처리하였고 의리상 마땅히 해야 할 일에는 과감히 힘썼으니, 늠름하여 뜻을 빼앗을 수 없었다.
일찍이 옛사람의 마음을 잡아 보존하고 성찰하는 방도에 마음을 다하고 경사(經史)를 참고하여 의리의 깊은 근원을 훤히 알았다. 일상생활에서는 차근차근 법도가 있었으며, 규문(閨門) 안에서는 엄숙하면서 화목하였고 조리가 지성스러워 엄격하지 않았는데도 집안이 다스려졌다.
책 읽기를 좋아하여 날마다 정해 놓고 공부를 했으며 앉으나 누우나 반드시 책을 손에 들고 있었고 드나들 때도 가지고 다녔으며 질병에 걸렸을 때에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특히 밤이나 아침에 책 읽기를 즐겨 나이가 고령이 되고 관직이 높아졌을 때에도 여전히 그만두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밤기운은 고요하고 아침 기운은 맑아서, 공효는 배나 되고 쉽게 스스로 습득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송 정언 몽석(宋正言夢錫)과 밤에 앉아 책을 읽는데, 송공(宋公)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이러한 때에 마음의 본체를 묵묵히 살피는가. 옛사람이 말한 광풍제월(光風霽月)이란 것을 더욱 징험할 수 있네. 사람이 이때의 광경을 늘 보전할 수 있으면 성현(聖賢)의 마음일세.”라고 하였다.
상을 당했을 때 책을 읽고 있었는데 흔연히 마음에 깨달은 데가 있자,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슬픔을 잊는 경지에 가깝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이어 책 읽기를 그만두려다가, 이윽고 다시 생각하고 말하기를 “상중에 책 읽기는 성인(聖人)께서 금한 적이 없으니, 이는 분명 마음을 바로 하는 데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효우(孝友)에 돈독하였다. 부모를 모실 때 좌우로 어김이 없었고 힘을 다하여 터럭만큼도 유감이 없도록 하였다. 내 증조모 정 부인(鄭夫人)은 연세가 근 백 세였는데, 삭망(朔望)이면 공은 반드시 집안사람들을 모아 술자리를 마련하였고 매번 형제들이 즐겁게 모였고 어린 자손들은 재롱을 피웠다. 공은 윗사람을 받들고 아랫사람을 돌보는 가운데, 정 부인을 즐겁게 하려는 의도로 우스갯소리를 지어냈으니 모두 지극한 사랑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공 때문에 집안사람들이 더욱 친해졌고 술자리가 파한 뒤 정 부인은 기쁜 마음으로 공을 칭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선왕부(先王父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만년에 세상에 분노하다 술병이 들어 행동을 마음대로 하였고, 혹 어두운 밤에 홀로 외출하여 집안사람들이 간 곳을 알지 못했다. 공이 매번 울면서 달려 나가 걸어서 그 뒤를 따라가다가 여러 날 돌아오지 못하고 다리에 피를 흘린 적도 있었다. 병환을 앓은 지 10년 동안 공은 옷에 허리띠를 풀지 않았고 약물은 공이 직접 짓고 맛보지 않으면 함부로 올리지 않았으며, 돌아눕거나 부축할 때는 다른 사람에게 대신 시키지 않았다.
정묘년(1627, 인조5) 이후, 선왕모(先王母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연세가 더욱 높아져 공이 마침내 백마강 가로 모시고 돌아갔다. 이에 사방으로 다니며 벼슬하려는 뜻을 접고 봉양에 전심하니, 아무리 자주 상께서 불러도 피할 수 없을 때만 한번 취임하고는 오래 밖에 있던 적은 없었다.
공의 동생 생원공(生員公)이 일찍 세상을 뜨자 공은 가까운 곳에 집을 짓고 홀로된 제수씨를 거처하게 하고 옷과 음식을 함께 나누었다. 가난하게 사는 누이 한 명이 있었는데, 공은 그 집안일을 보살피고 조카들을 자기 자식처럼 돌보아 모두 가르치고 키워서 시집, 장가보냈다.
형제가 적은 것을 스스로 상심하여 제종(諸從 사촌 형제)에게 우애를 더하였으니, 내제(內弟) 송공 몽석(宋公夢錫)과 집은 따로 살면서도 재산을 함께 나누었고 은혜가 동기간 같았으며, 송공이 세상을 떠나자 과부가 된 제수씨와 남은 자식을 매우 독실하게 보살폈다. 원근의 집안사람들 중에 의탁할 데가 없는 사람은 모두 공에게 귀의하였고, 음식과 의복을 구제해 주어 그 뜻과 생업을 이루어 주었다.
다른 사람과 교유할 때는 내내 변치 않았으며, 오랜 벗의 생사, 가난과 질병, 곤궁에 대해서는 곡진하게 은혜로운 마음을 가졌다. 사람을 만날 때는 현우(賢愚)나 귀천(貴賤)이 없었고, 한결같이 성의로 대하였으므로 다른 사람들도 다 마음을 씻고 성의를 바쳤으며, 아무리 불초한 사람도 오직 그의 허물을 드러낼까 근심하였으니, 공이 사람을 사랑함에 인자하기가 끝이 없었다.
성품이 진기한 완구를 좋아하지 않았고, 사치스러운 그릇과 용구를 더욱 싫어했다. 공은 물건에 대해 담백하여 남달리 좋아하는 기호가 없었으며, 자신의 생활은 매우 검약하여 떨어진 옷과 거친 밥을 평소 습관처럼 편안해했다. 평생 살림에 관한 일은 언급하지 않았으며, 정승의 귀한 자리에 이르러서도 처자식이 집에서 고생하였고 간혹 죽도 넉넉하지 못하였다.
괴이하고 특별한 행위를 하지 않았지만 취하고 버리는 일이나 사양하고 받는 데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반드시 변별하였고, 자신을 바르게 견지하였으므로 남들이 감히 사사롭게 청탁하지 못하였다.
평소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여 한적하게 속세를 떠날 마음이 있었다. 소년 시절에 여강(驪江)을 오간 것이 또한 10년이었고, 늘그막에 백강을 알게 되어 호산(湖山)의 절경을 감상하면서 백강 가에 살 터를 잡았다. 좌우에 도서를 쌓아 두고 한가로이 거닐면서 즐겁게 지냈다. 또 산마루에 서실을 지었는데 깎아지른 절벽에 둘러싸여 큰 강을 내려다보고 있어 간혹 손님이나 교유하는 인사들이 오지 못하였다. 매번 한겨울에 눈이 쌓이거나 봄가을로 달이 차면 더욱 즐겨 거처하였다. 공이 그 사이에 이를 때마다 문을 닫아걸고 꼿꼿이 앉아 정신을 모으고 조용히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이렇게 한 것이 여러 해였는데, 그 가운데 깨달은 바는 엿볼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조정에 벼슬한 지 50년 동안 물러난 적이 많고 나아간 적은 적었다. 모든 권세와 이록(利祿)에 대해서는 마치 겁 많은 필부처럼 피하였다. 늘 명절(名節)을 스스로 조심하였으며 비록 위험하거나 욕을 당하는 상황이라도 지조를 변한 적이 없었다. 두 번이나 심양(瀋陽)에 갇혔을 때는 호랑이 입에 들어간 듯 위태로웠고, 남쪽 지방으로 귀양 갔을 때는 상이 진노하여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경우를 당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낯빛이 변하고 슬퍼하게 마련인데, 공은 홀로 걱정하는 기미가 없이 만번 죽을 처지에서도 온화하였으니, 또한 공의 큰 절개는 깊이 길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공은 시무를 처리하는 능력도 넉넉하여 청단(聽斷 송사를 판단함)은 몇 사람 몫을 하였으므로, 관직에 있을 때 사안의 대소에 상관없이 모두 직접 처리하였다. 또 인정을 살펴 호오와 고통이 있는 데를 파악하여 지성으로 보호하였다. 봉직할 때는 근면하였고 일 처리는 민첩하였으므로, 서울과 지방의 관직을 역임하는 동안 모두 위대한 업적이 있었다.
조용히 재단하여 처리하는 일마다 상황에 맞았으므로 법이 바로 서고 백성이 편안해했으며 공효는 이루어지고 자취는 요란하지 않았다. 지휘하는 동안에 풍속이 바로 변하였고, 보고 듣는 것 외에도 정신이 두루 미쳤으니, 이것은 오직 공만이 그러할 수 있었다.
정축년(1637, 인조15) 이후, 집에 거처할 때는 사죽(絲竹 음악)을 듣지 않았다. 관직에 나가 상에게 권할 때는 늘 대의는 멸실해서는 안 되며, 나라의 치욕은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간곡히 말하면서 혹 눈물을 흘리기도 했는데, 그 말이 참으로 귀신을 감동시키는 점이 있었다. 그밖에 조정에서 벼슬할 때의 언론은 모두 온전한 충성의 절조로 정대한 말을 하였고, 고금(古今)을 참작하고 의리(義利)를 판별한 것은 언제나 근본적이고 장구한 계책에 대한 것이었다.
귀양에서 등용되어 다시 정승으로 들어왔을 때, 시세는 갈수록 어려워지는데 더욱 전적으로 위임하였다. 대개 임금의 덕을 바로 하여 교화의 근원을 맑게 하고 폐정을 혁신하여 민력을 두텁게 하며, 언로를 열고 아랫사람들의 심정을 통하게 하며, 인재를 거두고 경제(經制 떳떳한 제도)를 정하여, 일시의 비루한 속된 논의를 씻고 백년 된 무너진 기강을 떨치며, 나라가 거듭 쇠퇴한 시기에 사기(士氣)를 북돋우고 내정(內政)의 편에서 나라의 정책을 구하여, 나라 형세가 장중해지고 왕조의 위엄을 떨치게 함으로써 중흥하여 크게 일어설 뜻을 돕기를 바란 것이다.
공은 늘 말하기를 “임금이 바른 뒤에 나라가 다스려지며, 스스로 다스리고 난 뒤에 남을 도모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니, 그 자임(自任)을 무겁게 하고 계획을 이루는 세심함은 결단코 바꿀 수 없을 것이다. 비록 국정을 맡은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아 그 뜻을 끝까지 펴서 성공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경륜과 경략은 대개 살펴볼 수 있다. 관직을 떠나 집에 있을 때에도 오히려 사안에 따라 의견을 올렸으니, 누차 대계(大計)를 진달하고 간곡하게 되풀이하면서 평생을 마쳤다.
아! 우리 효종대왕(孝宗大王)께서 나라를 부흥시키려는 계획에 힘써 현자를 애타게 구하시어, 원년(元年)에 맨 먼저 쫓겨난 와중에서 공을 등용하여 국정을 보좌하고 국난을 구제하는 자리로 승진시켜 마치 훌륭한 성과를 이룰 수 있을 듯하였다. 그러나 관직에 1년을 있지 못하여 충분히 행할 조짐이 있었는데도 그치고 말아서 성상께서는 조정에서 기쁘지 못하였고 뜻있는 선비는 시운을 돌아보며 한탄하였으니, 하늘의 뜻인가, 사람의 뜻인가? 아마도 성고(聖考 효종(孝宗))의 말씀처럼 용사(用捨 등용하고 버림)에 명이 있어서,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인가. 아, 애통하도다!
공은 문장을 지을 때, 어렵거나 모방하는 표현을 쓴 적이 없었다. 쌓은 것이 두터웠기 때문에 그 발현을 막을 수 없었으며, 경학에 근본을 두고 사리를 끝까지 탐구하였다. 보기 어려운 실정을 드러내면서도 정기와 광채가 빛나고 조리가 명백하여 절로 법도를 이루었다. 시(詩) 또한 정경(情境)을 위주로 하면서 고결하고 전아하게 뜻을 깃들였는데, 연고가 있지 않으면 짓지 않았기 때문에 저작이 많지 않다. 공이 지은 시문(詩文) 약간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공의 초취(初娶)는 해평 윤씨(海平尹氏)로, 영의정(領議政) 윤승훈(尹承勳)의 딸이며, 자녀가 없다. 후취는 풍천 임씨(豐川任氏)로 별좌(別坐) 임경신(任景莘)의 딸이며, 4남 2녀를 낳았다. 큰아들은 민장(敏章)으로 부사(府使)이고, 다음은 민적(敏廸)으로 대사헌(大司憲)이며, 다음은 민서(敏叙)로 참판이고, 다음은 민채(敏采)로 지평(持平)이다. 큰딸은 현감(縣監) 이준(李懏)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사인(士人) 박세격(朴世格)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 소생으로 2남 1녀가 있는데, 큰아들은 민철(敏哲)로 첨사(僉使)이고, 다음은 민계(敏啓)이며, 딸은 만호(萬戶) 이후필(李後泌)에게 시집갔다.
민장은 도정(都正) 이초로(李楚老)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3녀를 낳았다. 큰아들은 정명(鼎命)으로 현령(縣令)이고, 다음은 진명(晉命), 다음은 태명(泰命)이며, 큰딸은 사인 송주석(宋疇錫)에게 시집갔고, 다음 딸은 정자(正字) 신계화(申啓華)에게 시집갔고, 다음 딸은 사인 김진규(金鎭圭)에게 시집갔다.
민적은 참지(參知) 황일호(黃一皓)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2녀를 낳았다. 큰아들은 사명(師命)으로 참판이며, 다음은 부명(孚命), 다음은 이명(頤命)으로 정자이며, 다음은 익명(益命)이다. 큰딸은 사인 김만견(金萬堅)에게 시집갔고, 다음 딸은 사인 김도제(金道濟)에게 시집갔다.
민서는 좌의정 원두표(元斗杓)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낳았다. 큰아들은 관명(觀命), 다음은 건명(健命)이다. 큰딸은 진사 홍중기(洪重箕)에게 시집갔고, 다음 딸은 사인 남학명(南鶴鳴)에게 시집갔으며, 다음 딸은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민채는 판서 박장원(朴長遠)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후사가 없어서 이명을 양자로 삼았다.
이준은 2남 1녀를 낳았다. 큰아들은 겸저(謙著)이고, 다음은 아직 어리다. 딸은 사인 김진옥(金鎭玉)에게 시집갔다.
박세격(朴世格)은 2남을 낳았다. 큰아들은 태승(泰升)이고, 다음은 태겸(泰謙)이다.
민철은 군수 송영윤(宋永胤)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2남 1녀를 두었는데, 항명(恒命)과 승명(升命)이고, 딸은 어리다.
민계(敏啓)는 동지(同知) 김엽(金曄)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3남 2녀를 두었는데, 항명(咸命)과 수명(需命)이고 다음은 어리다. 큰딸은 무인(武人) 홍하적(洪夏績)에게 시집갔고, 다음 딸은 어리다.
이후필은 2남 1녀를 두었다. 큰아들은 유경이고, 다음은 어리다. 딸은 무인 이성웅(李成雄)에게 시집갔다.
선군자께서 돌아가신 지 지금 이미 25년이 되었지만, 시호를 내리는 은전이 여전히 없었다. 불초자식들이 부여잡고 울부짖어 보아도 소용없어 밤낮으로 편치 못하였고, 세월이 가면 갈수록 잊혀져 그 아름다운 덕을 드러낼 수 없을까 크게 두려웠기 때문에 이에 감히 울면서 뜻과 행실, 사업 가운데 더욱 드러난 바를 대략 나열하였다. 당세에 시장(諡狀)을 써 줄 군자의 손을 빌려 태상(太常 시호를 담당하는 봉상시(奉常寺))에 청하기를 바라니, 삼가 생각건대, 일을 담당하는 사람이 은혜롭게 살펴보고 드러내 주리라.
[주-D001] 선원(璿源) : 조선 시대 국왕과 그 친족을 가리킨다. 왕실의 족보를 《선원록(璿源錄)》이라고 한다. 이경여는 세종(世宗)의 7대손으로, 세종의 열세 번째 아들 밀성군(密城君) 침(琛)의 후손이다.
[주-D002] 밀성군(密城君) 휘 침(琛) : 이침이 밀성군이 된 시기가 1436년(세종18)이라는 기록과 1442년이라는 기록이 있다. 《국역 세종실록 24년 7월 3일》 《국역 성종실록 10년 1월 1일》
[주-D003] 당시 …… 있다 : 1403년(태종3)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두었는데, 1466년(세조12)에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로 개편하였다. 이침은 1467년 도총관을 겸하였다. 1468년(예종 즉위년) 남이(南怡)의 반역 사건을 다스린 공으로 2등 공신인 수충보사정난 익대 공신(輸忠保社定難翊戴功臣)에 책봉되었다. 좌리 공신이 된 것은 성종이 즉위할 때 좌리 2등 공신에 책봉된 일을 말한다. 《국역 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13년 1월 2일》 《국역 예종실록 즉위년 10월 28일》 《국역 성종실록 2년 3월 27일》
[주-D004] 운산군(雲山君) …… 책봉되었다 : 정국 공신은 연산군(燕山君)을 쫓아내고 폭정을 끝낸 중종반정 때 공을 세운 사람들을 공신으로 책봉한 것이다. 운산군은 정국 공신이 되었다가 1519년(중종14) 위훈 삭제(僞勳削除)로 공신에서 빠졌다. 《국역 중종실록 14년 11월 11일》
[주-D005] 언관(言官)이나 …… 때 : 이유록(1564~1620)이 언관인 사간원 정언이나 홍문관 부수찬, 교리 등으로 있을 때는 1601년(선조34) 무렵이다. 《국역 선조실록 34년 1월 6일, 7월 17일》
[주-D006] 당시 …… 사랑하였다 : 1602년(선조35) 이유록은 대동 찰방(大同察訪)으로 나갔다가, 다시 광주 목사(廣州牧使)로 2년 가까이 근무하였는데, 외직으로 나간 구체적인 이유는 미상이다. 《국역 선조실록 35년 4월 25일, 37년 4월 17일》 어버이의 봉양을 위하여 외직으로 나가 서산 군수(瑞山郡守)가 되었을 때, 백성들을 위해 창고의 곡식을 모두 풀어 구휼하고 둔전(屯田)을 개설하고 농사를 권장하여 백성들의 신임을 얻은 적이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 중인 1593년 이후의 일이므로 시기가 맞지 않는다. 《국역 청음집 제26권 영의정에 추증된 행 여주 목사(行驪州牧使) 이공 수록(李公綏祿)의 신도비명》
[주-D007] 공이 …… 흘리며 : 이유록은 이이첨이 권세를 잡아 조정의 정사가 날로 문란해지자, 세상의 도를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벼슬살이의 뜻을 끊고 언행을 미치광이처럼 행동하며 숨어 살았다.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가솔을 이끌고 양근(楊根)의 강가로 돌아가 완평(完平) 이원익(李元翼)과 수몽(守夢) 정엽(鄭曄) 등과 시골에서 어울려 지냈다. 《국역 청음집 제26권 영의정에 추증된 행 여주 목사 이공 수록의 신도비명》
[주-D008] 굴평(屈平)이 …… 마음 : 굴평은 초(楚)나라 굴원(屈原)이다. 〈회사〉는 굴원이 한을 품고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죽을 때에 지었다는 시 제목으로, 차라리 물에 빠져 죽어 송장을 모래사장에 드러내려고 하였다는 데서 이런 제목을 붙였다. 《楚辭章句 卷4》. 이유록은 〈회사〉 외에도,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와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담암(澹庵)의 상소문 등을 벽에 걸어 놓고 매일 읽었다고 한다.
[주-D009] 일찍이 …… 있었다 : 어떤 사안인지 미상이나, 유사한 사건으로는 몇 가지가 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이유록이 이조 좌랑 임연(任兗)을 두고 어리석고 비루한 행실이 있으므로 낭관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탄핵한 일이 있다. 임연은 후일 인목대비 폐출 때 찬성하는 입장을 취하였기 때문에 적신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이첨이 종매부(從妹夫)였는데, 늘 달콤한 말로 관직에 나오라고 유혹했으나 응하지 않았다고 하며, 친척 한찬남(韓纘男)을 두고 머리가 위태롭다고 말하여 곤혹스럽게 한 일이 있었다. 다만 본문의 일화는 미상이다. 《국역 광해군일기 즉위년 12월 19일》 《국역 청음집 제26권 영의정에 추증된 행 여주 목사(行驪州牧使) 이공 수록(李公綏祿)의 신도비명》
[주-D010] 공의 …… 있다 : 김상헌은 명(銘)에서 “자식 교육에는 절의가 중함을 우선하였으며 집안 바로잡아 순정한 덕 빛냈네. 경연에선 임금 깨우치기에 정성 다했고 대각에선 바른말을 올렸다네.[敎兒則先節義之重, 刑家則彰順正之德. 處講筵而竭啓沃, 秉臺憲而殫謇諤.]”라고 덕을 기렸다.
[주-D011] 강서(姜緖) : 1538~1589.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원경(遠卿)이며, 호는 난곡(蘭谷)이다. 할아버지는 사인(舍人) 강온(姜溫)이고, 아버지는 우의정 강사상(姜士尙)이다. 조충남(趙忠男), 이원익(李元翼)과 교유가 깊었다. 《국역 기언 제38권 강 승지(姜承旨) 유사》 위의 일화는 전한(典翰)으로 있다가 우부승지로 옮겼던 1586년(선조19)의 일로 보인다. 《국역 선조수정실록 19년 3월 1일》
[주-D012] 기해년 …… 있었다 : 1599년 도체찰사는 이원익(李元翼)이었다. 이원익이 서북면 체찰사(西北面體察使)로 갈 때 이유록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다. 《국역 선조실록 32년 9월 12일》 《국역 청음집, 제26권, 영의정에 추증된 행 여주 목사(行驪州牧使) 이공 수록(李公綏祿)의 신도비명》
[주-D013] 이이첨(李爾瞻)이 …… 종고모부(從姑母夫)였다 : 이이첨(1560~1623)의 자는 득여(得與)이고, 호는 관송(觀松)ㆍ쌍리(雙里)이며,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부인은 이응록(李應祿)의 딸 이씨로, 이유록의 사촌 누이의 남편이었기 때문에 이이첨이 이경여에게는 종고모부가 된다.
[주-D014] 이이첨이 …… 협박하였다 : 조선 시대 예문관 사관은 정9품 검열(檢閱)이 승진하게 되면 후임을 검열을 위시한 대교(정8품), 봉교(정7품)를 뽑고, 통상적인 이조(吏曹)의 전선법(銓選法)을 따르지 않았다. 이는 역사 기록의 직필을 보장하려는 조치였다. 이 때문에 봉교인 이경여에게 이이첨이 자신의 아들을 사관으로 천거해 달라고 청탁한 것이다. 《오항녕, 여말선초 사관 자천제의 성립과 운영, 역사와현실30, 1998》
[주-D015] 이이첨은 …… 파직시켰다 : 이 부분은 기록에 따라 시기 기술이 다르다. 위 본문과는 달리,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장유가 검열에 임명된 것은 1611년(광해군3)이었고, 당시 이경여도 대교로 승진하였다. 이경여가 봉교가 된 것은 위 본문에서 보이듯 이듬해인 임자년(1612)의 일인데, 이때 장유도 서용되었고, 둘 다 파직되었다가 복직된 것이다. 그러므로 《광해군일기》의 기록대로 이경여는 1611년 대교일 때 장유와 함께 파직되었다가, 1612년 봉교로 복귀하는 것으로 보는 편이 타당할 듯하다. 《광해군일기 3년 12월 25일, 4년 8월 29일》
[주-D016] 공이 …… 바뀌었다 : 충원은 충주(忠州)이다. 이경여는 이천 현감으로 제수되었으나, 곧 아내 윤씨의 장례 때문에 영동(嶺東)에 가 있었으므로 부임하지 못하고 충원 현감으로 나갔다. 강원도 통천(通川)에 유배되었던 윤공(尹珙)의 유배지에 불이 났는데, 따라갔던 윤공의 여동생 윤씨가 변을 당했던 것이다. 《국역 광해군일기 9년 3월 24일ㆍ26일, 4월 13일ㆍ25일》 윤공은 윤승훈(尹承勳)의 아들이며, 이경여의 첫째 부인인 윤씨는 이때 세상을 떠서 후사가 없었다. 이경여는 이듬해 부인 상이 끝난 뒤 임경신(任景莘)의 딸을 둘째 부인으로 맞았다.
[주-D017] 당시 …… 없었다 : 백성들에게 추가로 전세(田稅)를 거둠으로써 세 부담이 늘어난 것을 말한다. 광해군은 궁궐을 여러 채 짓기 위해 결(結)당 4두씩 거두던 전세에서 1두를 추가로 거두었다. 이는 임진왜란으로 전세를 거둘 수 있는 토지 결수가 전전(戰前) 150만 결에서 전후(戰後) 50만 결 이하로 떨어졌고, 부유하거나 권력층의 토지가 은결(隱結)로 남아 탈세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고스란히 백성들의 부담으로 떨어졌다. 《국역 광해군일기 9년 4월 20일》
[주-D018] 궁궐도감(宮闕都監)에서 …… 편안하였다 : 광해군 대 궁궐 공사는 1608년(광해군 즉위년) 창덕궁이 완성된 뒤에도 재위 기간 내내 이어졌다. 궁궐 공사에 사용되는 돌, 목재, 철, 염료, 끈 등이 공물로 징수되면서 공물 개혁을 위해 선조 때부터 추진되었던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은 흐지부지되었고, 전국적으로 세금의 추가 징수와 공물 및 부역 동원이 상시화되었다. 조정에서는 조도관(調度官)을 파견하여 고혈을 짬으로써 백성들의 삶은 곤궁해지고 재정은 피폐해졌다. 이는 광해군 폐위의 중요한 이유였다. 《오항녕, 광해군-그 위험한 거울, 6장 과대소비의 소용돌이, 너머북스, 2012》
[주-D019] 도감에서 …… 형편이었다 : 도감은 영건도감(營建都監)이다. 궁궐 공사에 사용될 아름드리 대목(大木)들은 서해 도서(島嶼) 지방이나 강원도 산간지대에서 조달되었다. 이를 위해 백성들은 경제적 궁핍과 신체적 고역에 시달렸다. 이 과정에서 조도관들은 방납(防納) 관행을 되살려 정작 궁궐을 짓는 영건도감에는 보내지 않고 착복하여 방납을 통해 이득을 취하였다. 1618년(광해군10) 궁궐 공사에 쓴 대목 2만 5720조, 중목(中木) 2만 8060개 정도를 산정하였는데, 그해 말 영건도감에 들어온 목재는 대목 4590조뿐이었다. 《김성우, 光海君 치세 3기(1618~1623) 국가재정 수요의 급증과 농민경제의 붕괴, 대구사학118, 2015》
[주-D020] 공은 …… 하였다 : 북산은 어디인지 미상이다. 이경여가 상인들에게 재목의 반을 주는 대가로 대납을 시켜 백성들에게는 부담이 돌아오지 않게 한 것이다. 《息庵集 卷22 領議政白江李公諡狀, 韓國文集叢刊 145輯》
[주-D021] 도둑을 …… 보냈는데 : 1617년, 경상도와 공홍도(公洪道)에 도적이 많아져서 토포관 조찬한(趙纘韓)을 보내 체포하게 하였는데, 이듬해까지도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국역 광해군일기 중초본 9년 11월 16일, 10년 3월 9일》
[주-D022] 윤 숙의(尹淑儀) : 윤홍업(尹弘業)의 딸 후궁 윤씨는 1617년(광해군9) 종2품 숙의로 간택되었고, 이듬해 정2품 소의(昭儀)가 되었는데, 회임(懷妊)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윤홍업은 1년 만에 6품으로 승진하였다. 《국역 광해군일기 중초본 9년 8월 8일, 10년 7월 8일, 11년 3월 2일ㆍ4월 8일》
[주-D023] 이이첨은 …… 했고 : 이이첨은 지방관을 그만두고 은거해 있던 이경여 등을 후진 양성의 명목으로 광해군에게 천거하기도 하였다. 사관은 “이때 이이첨이 공론에 용납되지 않는 줄을 스스로 알고 사람들의 분노를 잠재우고 자기의 사욕을 이루려고 이러한 계사가 있었으니, 계획이 역시 졸렬하다.”라고 평하였다. 《국역 광해군일기 중초본 11년 6월 19일》
[주-D024] 한찬남(韓纘男) …… 친척이었으며 : 한찬남(1560~1623)의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경서(景緖)이다. 1605년(선조38) 문과에 급제하여 1613년(광해군5) 계축옥사에서 김제남(金悌男)의 처벌을 주장하였고 이어 폐모론을 주장하였다. 이이첨과 권력을 전횡하면서 도승지ㆍ형조 판서를 지냈는데, 인조반정으로 복주(伏誅)되었다. 이경여의 여동생이 한무(韓楙)에게 시집갔고, 한무의 본관이 청주이므로 한찬남과 인척 관계가 될지 모르겠으나 미상이다. 《국역 인조실록 1년 3월 14일》
[주-D025] 박정길(朴鼎吉) : 1583~1623.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양이(養而)이다. 광해군 때 급제하여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관원 등 청요직을 역임하였다. 윤선도(尹善道)는 그를 이이첨의 골육과 같다고 지목했을 정도였다. 폐모론, 궁궐 공사에 앞장섰으며 인조반정 뒤에 죽임을 당하였다. 《국역 광해군일기 중초본 8년 12월 21일》 《국역 인조실록 1년 4월 29일》
[주-D026] 정광성(鄭廣成) : 1576~1654.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자는 수백(壽伯)이며, 호는 제곡(濟谷)이다. 할아버지는 정유길(鄭惟吉)이고, 아버지는 좌의정 정창연(鄭昌衍)이다. 현종 때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아버지이다. 광해군의 왕비 유씨가 생질녀여서 광해군 초기에 이조 판서로 등용되기도 했으나 폐모론에 반대하여 관직을 사퇴하였다. 《국역 광해군일기 중초본 즉위년 3월 7일, 9년 11월 26일, 10년 2월 6일》 정광성은 이 무렵 판서가 아니었고, 효종 때 나이 80세가 넘었다 하여 형조 판서에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承政院日記 孝宗 5年 2月 25日》
[주-D027] 인조대왕(仁祖大王)이 …… 불렀다 : 1623년 인조가 이서(李曙), 신경진(申景禛), 김류(金瑬), 이귀(李貴)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왕대비(王大妃)를 복위시킨 다음 대비의 명으로 경운궁(慶運宮)에서 즉위한 계해반정을 말한다. 광해군을 폐위시켜 강화(江華)로 내쫓고 이이첨(李爾瞻) 등을 처형한 다음 전국에 사면령을 내렸다. 이후 이경여가 경연 검토관(檢討官)으로 강론하는 기사가 나온다. 곧 사간원 헌납으로 옮겼다가 홍문관 부교리가 되었다. 《국역 인조실록 1년 3월 13일ㆍ25일, 10월 25일》
[주-D028] 당시 …… 있었다 : 계해반정에서 병자호란 전까지 23건의 반역 사건이 이어졌고, 반정공신으로 흔히 4대장이라고 불리는 이귀(李貴), 김류(金瑬), 장만(張晩), 신경진(申景禛) 등도 수시로 옥사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이는 반정 이후 정치 기반이 불안정했음을 의미한다. 정묘호란을 전후 해서도 박응성(朴應晟), 유효립(柳孝立) 등의 옥사가 터졌고, 병자호란을 코앞에 두고도 이기안(李基安), 박천건(朴天建) 등의 옥사가 있었다. 《국역 추안급국안, 4~10,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2014》 특히 인조 초반은 국제 정세마저 좋지 않았다. 서북의 근심거리는 후금(後金)을 말한다. 광해군 대 내정(內政) 파탄으로 외교와 국방을 돌아보지 못하는 동안, 후금이 만주를 거점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주-D029] 하루는 …… 언급하였다 : 이서는 무관(武官)이었지만 문장을 잘하고 정책 능력이 있어서 반정 후 호조 판서를 맡았다. 1624년(인조2)에 호조 판서가 심열(沈說)로 교체되는데, 위의 내용은 미상이다. 《국역 인조실록 1년 3월 17일, 2년 3월 16일》
[주-D030] 무왕(武王)은 …… 풀었거니와 : 거교는 은나라 주왕(紂王)의 곡식 창고가 있던 지명이다. 주 무왕(周武王)이 주왕을 공격하고 거교의 곡식을 꺼내어 은나라의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했다. 거교는 광평부(廣平府) 곡주현(曲周縣) 동북쪽에 있다고 한다. 《史記 卷3 殷本紀》[주-D031] 관중(管仲)과 상앙(商鞅)의 치세 : 관중은 춘추 시대 정치가로 관경중(管敬仲)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이오(夷吾), 자는 중(仲)이며, 영상(穎上) 사람이다. 친구인 포숙아(鮑叔牙)의 추천으로 제 환공(齊桓公)의 재상이 되어 부국강병에 힘썼다. 사마천(司馬遷)은 “관중이 없었으면 제 환공의 패업이 없었고 중원의 평화도 유지되지 않았을 것이다.” 했다. 《史記 卷62 管晏列傳》 상앙은 전국 시대에 진 효공(秦孝公)에게 발탁된 뒤 천맥(阡陌)을 고쳐 경지 정리를 통해 토지 면적을 늘리고 새로운 세법을 적용하여 국가재정을 증대시켰다. 법가(法家) 사상가로 알려졌고, 법을 가혹하게 시행하다가 미움을 받아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다. 《史記 卷68 商君列傳》
[주-D032] 하루는 …… 논의하였다 :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 때 피폐해진 군정(軍政)을 수습하기 위해 군적(軍籍)을 정비하는 방안으로 호패법이 논의되었다. 호패법을 시행하기 위해 관청을 설치하고 사목(事目)을 심사했는데, 이때 수해(水害)가 참혹하자 이재민을 구하는 일이 급하게 되어 다음 해에 시행하기로 하였다. 《국역 인조실록 1년 4월 25일, 7월 9일》
[주-D033] 방 모퉁이 : 《시경》 〈억(抑)〉에, “네 거실에 있음을 보건대 거의 옥루(屋漏)에 부끄럽지 않게 할지니.[相在爾室, 尙不愧于屋漏.]”라고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주(注)에 “옥루는 방의 서북쪽 모퉁이이다.” 하였다. 《중용장구》 33장에 “군자는 움직이지 않고도 존경받고 말하지 않고서도 믿게 한다.[君子不動而敬, 不言而信.]”라는 구절을 말할 때 이 시 구절을 인용하였다. 이는 공경을 돈독히 하여 천하가 평안해지는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주-D034] 김공 류(金公瑬) : 1571~1648. 본관은 순천(順天)이고, 자는 관옥(冠玉)이며, 호는 북저(北渚)이다. 인조반정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고, 외교와 군정에 능력을 보였다. 위 일화는 미상이다. 《국역 송자대전 제160권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공(金公) 신도비명》
[주-D035] 이 연평 귀(李延平貴)가 …… 하였다 : 이귀(1557~1633)의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는 옥여(玉汝)이며, 호는 묵재(默齋)이다. 세조조의 문신 석형(石亨)의 5대손이다. 인조반정을 주도하여 정사 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되어, 연평부원군에 봉해졌다. 1623년(인조 원년) 대사헌이었던 이귀가 훈신(勳臣)들이 강화로 유배 간 광해군을 죽이려고 한다는 여론이 일자, 이를 해명하는 일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귀는 “이경여가 애초에 정경세(鄭經世)의 의견에 따랐다가, 곧 그 말을 뒤집었는데, 근신이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정경세의 의견이란 공신이라도 처벌할 것은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시독관 이경여는 의견이 대립하였기 때문에 대의에 따르자고 했던 것이지 정경세에게 부화뇌동한 것이 아니라고 해명하였는데, 이귀가 이어 욕을 한 일이 있었고, 인조가 나서서 진정시켰다. 《국역 포저집, 제31권,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시(諡) 충정(忠定) 이공(李公) 신도비명(神道碑銘)》 《국역 인조실록 1년 7월 8일》
[주-D036] 9월, 헌납(獻納)으로 옮겼다 : 실록에는 1623년(인조 원년) 8월 18일에 이경여를 헌납에 제수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조금 차이가 있다. 《국역 인조실록 1년 8월 18일》
[주-D037] 원악(元惡) : 원흉(元兇)과 같은 말로, 광해군 때 나라를 어지럽힌 이이첨(李爾瞻)ㆍ박승종(朴承宗)ㆍ유희분(柳希奮) 등을 처형한 것을 말한다. 이 외에 상궁, 나인(內人)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조사와 신문이 이어졌고, 한찬남(韓纘男)ㆍ이위경(李偉卿)ㆍ정몽필(鄭夢弼)ㆍ백대형(白大珩) 등은 종루(鐘樓) 동쪽 저자에서 목을 베었고, 평안 감사 박엽(朴燁), 평안 병사 한희길(韓希吉), 의주 부윤 정준(鄭遵)은 각각 그 임소에서 베었다. 《국역 인조실록 1년 3월 13일》 《국역 추안급국안 권4 계해년 3월 이후 범죄사건, 전주대학교 고전국역총서2, 2014》[주-D038] 그해 …… 임명되었다 : 1623년 8월 헌납으로 임명된 뒤, 홍문관 부교리를 거쳐 윤10월에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국역 인조실록 1년 윤10월 9일》
[주-D039] 오 상국 윤겸(吳相國允謙) : 오윤겸(1559~1636)의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자는 여익(汝益)이고, 호는 추탄(楸灘) 또는 토당(土塘)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617년(광해군9) 일본에 가서 포로를 송환해 왔으나, 폐모론이 제기되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반정 이후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가, 곧 이조 판서가 되었다. 《국역 광해군일기 중초본 9년 5월 28일》 《국역 인조실록 1년 9월 1일》
[주-D040] 평안도 …… 갔다 : 이괄은 광해군 대에 촉망받던 무관이었고, 반정 전에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계해반정의 주축이기도 했다. 반정 이후 북방 방어가 시급했던 까닭에 조정에서는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 휘하의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에 이괄을 임명하여 영변에 주둔하게 했다. 이괄이 논공행상과 북변 부임으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차에, 1624년(인조2) 1월 문회(文晦), 이우(李佑) 등이 이괄과 그의 아들 이전(李旃)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했다. 위기를 느낀 이괄은 반란을 일으켰고 서울에 입성하여 경복궁 옛터에 주둔하며 선조의 아들 흥안군(興安君) 제(瑅)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당시 인조는 공주로 피난하였다. 2월 15일 이천(利川)에서 부하 장수인 기익헌과 이수백에게 이괄이 죽임을 당함으로써 반란은 막을 내렸다. 《국역 추안급국안 권4~7, 역적 이괄 사건 문서, 전주대학교 고전국역총서2, 2014》
[주-D041] 인조(仁祖)께서는 …… 하였다 : 이경여는 “영천 군수(榮川郡守) 이중길(李重吉)은 법을 신중하게 쓰지 않아 온 지역에 폐해를 끼치고 있고, 상주 목사(尙州牧使) 이호신(李好信)은 품계가 높고 노쇠하여 고을의 일을 내팽개치고 있으니, 조정에서 처치하십시오.”라고 치계하여, 이조에서 이들을 파직시켰다. 이외에도 과중한 역과 징포(徵布), 내수사(內需司)의 노비 추쇄에 대해 보고하여 바로잡고자 하였다. 《국역 인조실록 3년 2월 18일, 3월 17일》
[주-D042] 오랑캐 방비 : 원문의 ‘추방(秋防)’은 변방의 오랑캐에 대한 방비를 말한다. 이경여는 도체찰사 장만(張晩)의 종사관으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가서 축성의 형편을 살피고, 이어 김시양(金時讓)과 함께 관서와 해서의 군비와 진영을 순시하였다. 《국역 인조실록 3년 7월 19일》
[주-D043] 묘당(廟堂)에서 …… 패배하였다 : 1627년(인조5) 정묘호란 때 이완이 최몽량(崔夢亮)과 싸우다 죽고, 수만의 민병(民兵)들도 남김없이 도륙당한 일을 말한다. 《국역 인조실록 5년 4월 1일》
[주-D044] 죄인 …… 하였다 : 1624년에 문회(文晦)가 이우(李佑)ㆍ김광숙(金光肅) 등이 인성군 이공을 추대하려고 역적모의를 꾸몄다고 고변하였다. 1625년 2월에 이공은 강원도 간성(杆城)으로 유배를 갔다. 그런데 이해 10월 18일에 검열(檢閱)이었던 목성선과 승문원 부정자 유석(柳碩) 등이 상소하여 “공의 이름이 자주 역적의 입에서 나왔으나 공에게는 서로 응한 자취가 없으니 공에게는 죄가 없는 것입니다.……국가의 원기를 꺾고 신민의 소망을 잃게 한 것은 그 화가 자못 역적 이괄(李适)의 변보다도 심하다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때 인조는 목성선을 두고 충성스럽고 정직한 선비라고 칭찬하였다. 《국역 인조실록 3년 10월 18일》
[주-D045] 공이 …… 체직되었다 : 이경여와 함께 논계한 동료는 대사간 이성구(李聖求), 정언 이시직(李時稷)ㆍ김설(金卨) 등이다. 《국역 인조실록 3년 10월 19일, 21일》
[주-D046] 계운궁(啓運宮)의 …… 되었다 : 계운궁은 인조의 생모 구씨(具氏)이다. 봉작(封爵)인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의 칭호를 쓰기로 했으나, 상례를 왕후의 예로 하려는 인조와, 반대하는 김장생(金長生) 등의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 사안은 나중에 인조의 생부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숭(追崇)하는 논의로 이어졌다. 《국역 인조실록 4년 1월 14일, 24일》 《이영춘, 潛冶 朴知誡의 禮學과 元宗追崇論, 청계사학7, 1990》 《오항녕, 17세기 전반 서인 산림의 사상-김장생ㆍ김상헌을 중심으로, 역사와현실8, 1992》
[주-D047] 폐군(廢君) …… 되었다 : 폐군은 광해군이며, 일록은 ‘광해군일기’를 말한다. 실록을 편찬해야 했지만, 광해군이 폐위되었기 때문에 연산군(燕山君)의 사례에 따라 실록이 아닌 일기라고 불렀다. 1624년(인조2)부터 시작하였지만, 광해군 대의 재정 파탄 및 두 차례의 호란으로 간행하지 못하고 중초본, 정초본으로 남게 되었다. 《纂修廳儀軌, 奎14157, 1634》 《임승표, 光海君日記의 編纂經緯와 國譯過程, 민족문화18, 1995》
[주-D048] 이서(李曙)가 …… 하였다 : 처음 호패가 실시될 때 호조 판서였던 이서는 “호패법(號牌法)은 실로 양법(良法)이니, 먼저 3조(條)의 영을 세운 뒤 팔도에 행회(行會)해야 하겠습니다. 소위 3조의 영이란, 첫째 양민을 억압하여 천인으로 만든[壓良爲賤] 율을 신명하고, 둘째 유민들을 각자 고향에 돌아가게 하되 그대로 남아 있겠다는 사람은 들어주고, 셋째 경외의 모든 한량(閑良)들을 대상으로 각각 알아서 처신케 하여 그에 상당한 군역에 속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호패청이 설치된 뒤 이서는 당상을 맡았는데, 호패법과 군적을 아울러 시행하고자 하여 논란이 일었다. 《국역 인조실록 1년 5월 7일, 4년 10월 3일》
[주-D049] 이인거(李仁居)가 …… 도착하였고 : 강원도 횡성에 사는 유학(幼學) 진극일(陳克一)이 “현에 사는 전 익찬(翊贊) 이인거가 지난달 27일 본도 감사를 만나 상소를 올리고 나서 29일 무단히 군사를 일으켜 현의 군기(軍器)를 탈취하여 ‘창의 중흥 대장(倡義中興大將)’이라 자칭하였습니다. 횡성 현감이 원주(原州)로 피신하였습니다.”라고 고변하였다. 이인거는 조정에 노적(奴賊)과 화친을 주장하는 신하의 머리를 베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고 평안도로 가서 적을 토벌하겠다고 감사를 통해 상소하고자 하였다. 이인거는 닷새 만에 잡혀왔다. 《국역 인조실록 5년 10월 1일, 5일》
[주-D050] 충청 감사의 …… 숙연해졌다 : 충청 감사 이경여가 “심기성은 경솔하고 교만하여 맡은 일은 태만하게 버려두고,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미복으로 출입하여 관원의 체모를 잃었습니다. 관아의 물건을 낭비하여 창고에 남은 물건이 없으며, 죄인을 다스림에 규정을 어기고 곤장 대신 몽둥이를 사용하며, 고을의 계집종을 간통하고는 나라에서 내려 준 것이라고 말하고 조금도 거리낌 없이 관아에서 데리고 살았으니, 파직하십시오.” 하니, 인조가 따랐다. 《국역 인조실록 5년 12월 4일》
[주-D051] 대부인(大夫人) : 이경여의 어머니 진천 송씨(鎭川宋氏)를 말한다.
[주-D052] 세 번 기한 : 원문의 ‘삼한(三限)’은 원래 여름ㆍ가을ㆍ겨울의 세 철에 나누어 거두는 것을 말한다. 여름에는 지역에 따라 수확 철이 다르므로 납부 기한이 두 번이며, 여기에 납부 기한이 한 번인 가을 조세를 합하여 삼한이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여기서는 형편이 어려워 제때 내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납부 기한을 세 번 둔다는 의미로 보인다.
[주-D053] 동료들과 …… 진달하였다 : 1631년(인조9)에 이경여가 교리 이경증(李景曾), 부교리 오전(吳竱), 수찬 강대수(姜大遂) 등과 함께 올린 차자이다. 《국역 인조실록 9년 10월 3일》[주-D054] 차마 …… 행하여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사람마다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선왕이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차마 해치지 못하는 정치를 하셨으니,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으로 차마 해치지 못하는 정치를 한다면 천하를 다스림은 손바닥 위에 놓고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人皆有不忍人之心, 先王有不忍人之心, 斯有不忍人之政矣, 以不忍人之心, 行不忍人之政, 治天下可運於掌上.]” 하였다.
[주-D055] 위를 …… 주십시오 : 부세를 줄여 백성의 부담을 줄인다는 뜻이다. 《주역》 〈풍뢰익괘(風雷益卦) 단전(彖傳)〉에 “익은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해 주니 백성의 기뻐함이 무궁하고, 위로부터 아래에 낮추니 그 도가 크게 빛난다.[益, 損上益下, 民說无疆, 自上下下, 其道大光.]” 하였다.
[주-D056] 대군(大君) …… 넘었는데 : 당시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집을 영건하는 중이었는데, 규모가 법전의 규정을 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호조에서 “재목 값으로 포(布) 2천 7백 60필을 써야 하겠는데, 이 밖에 들어가야 할 것이 매우 많습니다. 철물은 벌써 수송한 것이 3천 8백 근입니다.” 하니, 인조는 “철물 같은 것은 이미 사용한 뒤에는 해사(該司)로 돌려보낼 것이니 비용이 많이 든다고 염려하지 말라.” 한 적이 있었다. 《국역 인조실록 9년 7월 22일》 집의 규모에 대해서는 《경국대전(經國大典)》 〈공전(工典) 잡령(雜令)〉에 “가사(家舍)는 대군(大君)은 60칸[間], 왕자군(王子君)과 공주(公主)는 50칸, 옹주(翁主) 및 종친(宗親)ㆍ문무관(文武官) 2품(品) 이상은 40칸, 3품(品) 이하는 30칸, 서인(庶人)은 10칸이다.” 하였다.
[주-D057] 임금의 …… 봉하였다 : 전국 시대에 위 문후(魏文侯)가 중산(中山)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아들 격(擊)을 봉하자, 신하 임좌(任座)가 “임금의 아우를 봉하지 않고 아들을 봉하였으니 어진 임금이라 할 수 없다.” 하였다. 《資治通鑑 周紀 威列王 23年》
[주-D058] 인성군(仁城君)의 …… 것이며 : 인성군 이공(李珙, 1588~1628)은 선조와 정빈(靜嬪) 민씨(閔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광해군 때 폐모론에 참여한 데다가, 인조 초반 반역 사건이 터질 때마다 공초(供招)에 등장함으로써 정국의 불씨가 되었다. 1625년(인조3) 강원도 간성(杆城)에 위리안치된 뒤, 1628년 유효립(柳孝立) 반역 사건 때 다시 옹립한다는 설이 제기되어 진도에 유배 가서 자결하라는 명을 받고 죽었다. 이공의 자녀를 혼인시키자는 논의는 이후 1636년 생원 이광길(李光吉)의 상소로 이어졌고, 인조는 관가에서 정혼하여 주라고 명하였다. 이듬해에는 이공의 관작을 회복하고 아들들에게 직위를 주었다. 《국역 인조실록 3년 2월 25일, 6년 5월 15일, 14년 6월 16일, 15년 3월 23일》 《국역 추안급국안 9~10, 유효립 옥사 문서,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2014》
[주-D059] 광해(光海)의 …… 청하였다 : 광해군은 인조반정 이후 강화로 안치되었는데, 소원(昭媛) 임씨(林氏)가 수발을 들었다. 병자호란 이후 제주에 광해군을 위리안치하였고 거기서 살다가 1641년에 죽었다. 《국역 인조실록 19년 7월 10일》 《국역 연려실기술 제23권 광해군 안치》
[주-D060] 옛날 …… 때 : 당 태종이 위징에게 준 것은 은항아리가 아니라 금항아리로 나온다. 당 태종이 나라의 제도를 무시하고 20세 미만의 남자인 중남(中男)을 뽑아 군대에 보내고 18세라도 신체가 크면 징발하라고 명하자, 위징이 서명하지 않았다. 당 태종은 화가 나서 위징을 꾸짖자, 위징은 중남을 징발하면 부세는 어디서 걷느냐며 그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당 태종이 자신의 과오를 크게 뉘우치고 중남을 군대에 보내는 일을 중지하고 위징에게 금항아리 하나를 하사했다. 《魏鄭公諫錄 卷1 諫簡點中男入軍》
[주-D061]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장례 : 선조(宣祖)의 계비인 인목왕후 김씨를 말한다. 광해군 때 계축옥사(1613, 광해군5)로 친정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희생되었고, 이듬해 아들 영창대군 역시 피살되었으며, 인목왕후에 대한 폐모론이 전개되었다. 인조반정으로 복위되었다가 1632년(인조10) 6월에 세상을 떴다. 시호를 인목이라고 한 것은 7월의 일이다. 능호는 혜릉(惠陵)이다. 《국역 인조실록 10년 6월 28일, 7월 7일》
[주-D062] 공이 …… 논하였고 : 이 차자는 《백강집》에 보인다. 《白江集 卷6 玉堂請行殯殿朝謁箚, 韓國文集叢刊 87輯》
[주-D063] 궁중에 …… 있었는데 : 1632년(인조10) 10월 궁인(宮人) 옥지(玉只) 등이 궁벽한 곳에서 제사를 지내며 흉측한 물건을 묻었다는 말이 돌았다. 상궁(尙宮) 주숙(朱淑)ㆍ백숙(白淑) 등이 연루되어 국문을 당하였다. 《국역 인조실록 10년 10월 23일》
[주-D064] 내옥(內獄) : 조정에서 옥사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국왕이 환관을 통해 옥을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내옥은 ‘환관에게 치죄하도록 하는 것’이고, ‘액정(掖庭)에 옥을 두는 것’이라 하였다. 뜰[庭]이 액문(掖門) 안에 있기 때문에 액정이라 하며, 액문이라 함은 궁중의 소문(小門)이 정문(正門) 옆에 있어서 마치 사람의 주액겨드랑이[掖]와 같다는 뜻이다. 《경국대전주해(經國大典註解),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국역 기언 제40권 용주(龍洲) 신도비(神道碑)》
[주-D065] 사안이 …… 것입니다 : 양성은 사헌부와 사간원인데, 형조를 합쳐 삼성(三省)이라고 부른다. 대역은 율(律), 즉 형률에 따라 의정(議政)을 위관(委官)으로 하는 추국청(推鞫廳)을 설치하여 다스리거나 삼성추국 등의 방식으로 다스리는데, 조선 시대 형률은 《대명률(大明律)》을 채용하였다. 《대명률》은 중국 명나라 형법전(刑法典)으로 당률(唐律)을 계승하여 수정한 뒤 1397년에 공포한 법전이다. 《경국대전》 〈형전(刑典) 용률(用律)〉에 “《대명률》을 쓴다.”고 명시되어 있다.
[주-D066] 없는 …… 공경하는 : 이 말은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9장에 나온다.
[주-D067] 공이 …… 주달하였다 : 1633년(인조11)에 22개조의 폐단을 지목하여 개혁을 요청하였다. 《국역 인조실록 11년 7월 24일》
[주-D068] 공안(貢案)이 …… 폐단 : 각 고을에 호 단위로 분정하여 거둘 공물(貢物)의 품목과 수량을 기록한 문서대장이다. 공물은 전세(田稅)의 세 배 정도 되는 재정수입으로, 방납(防納) 등 공납제의 문란은 백성들에게 큰 고통이었다. 이이(李珥)가 1574년(선조7) 올린 〈만언봉사〉에서 연산군(燕山君) 때 공물의 책정이 늘어난 데다 각 고을에서 바치는 공물이 그곳 산물이 아닌 것이 대부분이어서 하급 관리나 상인들이 백성을 대신해 공물을 사서 나라에 바치고 백성에게서 높은 대가를 받음에 따라 백성이 갈수록 궁핍하게 된 사정을 지적한 다음 연산군 때 더 책정한 공물을 줄이고 각 고을의 물산 유무, 전결(田結)의 다소, 민호(民戶)의 잔성(殘盛) 등을 조사하고 조절해서 한결같이 고르게 하고 반드시 본색(本色)을 각 관사(官司)에 바치도록 하여 그 폐단을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이래 조선 조정에서는 대동법(大同法)을 통해 공납제를 개혁하려고 했으나 광해군 때 흐지부지되었다가, 인조반정 이후 다시 공납제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정철, 대동법-조선 최대의 개혁, 역사비평사, 2010》
[주-D069] 천인이 …… 삼으십시오 : 조선 초기 이래 천인이 양인 아내를 얻어 자식을 낳을 경우 천인이 됨으로써 양인의 숫자가 늘지 않았다. 이경여의 주장은 양인을 늘리고 군역을 확보하는 방안이 될 수 있었지만, 노비 소유주의 반발을 가져올 수 있었다. 이후 송시열(宋時烈)도 노양처종량법(奴良妻從良法)을 주장했으나 시행되지 못하고, 영조 때 이르러 모든 종[奴]의 양처(良妻) 소생은 공천(公賤)ㆍ사천(私賤)을 막론하고 모역(母役)에 따르게 하여 양민으로 삼음으로써 양정(良丁)의 수효를 늘릴 것을 법제화하였다. 《국역 영조실록 6년 12월 26일》 《국역 송자대전 제62권 민지숙(閔持叔)에게 답함 - 기유년(1669) 1월》
[주-D070] 세초(歲抄)하는 폐단 : 매년 6월과 12월에 사망 또는 도망하거나 질병에 걸린 군병(軍兵)을 보충하는 것을 말한다. 각 읍진(邑鎭)에서 후임을 대신 충정한 뒤에 군적(軍籍)을 작성해서 절도사에게 보내고 절도사는 정리하여 계문한다. 《大典條例 兵典 軍籍》
[주-D071] 생취(生聚)는 …… 하는데 : 생취교훈(生聚敎訓)의 준말로, 인구를 증가시키고 재물을 비축하며 백성을 교육시킴으로써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일을 말한다. 춘추 시대 오왕(吳王) 부차(夫差)가 월왕 구천을 부초(夫椒)에서 패망시킨 뒤에 월왕이 보낸 대부 종(種)의 이야기를 듣고 강화(講和)를 허락하자, 오운(伍員)이 사람들에게 “월나라가 10년 안에 인구를 불리고 재력을 축적할 것이며, 또 10년 안에 백성을 훈련시켜 강병(強兵)을 양성할 것이니, 20년만 지나면 오나라는 그들에 의해 쑥밭이 되고 말 것이다.” 하였다. 《春秋左氏傳 哀公元年》
[주-D072] 진성(陳省)을 …… 조작하여 : 진성은 지방 관아에서 중앙 관아에 올리는 각종 보고서인데, 여기서는 지방에서 서울로 보내는 공물의 명세서를 의미한다. 공물의 수량, 납부할 관사 이름, 길을 출발하는 날짜, 공물 상납을 담당하는 아전의 성명 등을 기록한다. 자문은 관아에서 조세 따위를 받아들이고 발급하는 영수증이다.
[주-D073] 주사(舟師)를 …… 제도 : 통영에는 삼도수군통제사영(三道水軍統制使營)이 있었다. 지원군 형식으로 전라도에서 통영에 파견된 수군을 말한다. 이 부분은 원래 22조목 가운데 궁가에서 어염 등을 설치하는 폐단과는 별도로, 통제사 영에 전라도 수군을 파견할 때의 폐단을 논한 조목에 속하였으나, 행장을 지으면서 생략한 듯하다. 《국역 인조실록 11년 7월 24일》
[주-D074] 지난날 …… 없었으므로 : 광해군 때와 같이 폐모론, 궁궐 공사, 매관매직 등은 없었다는 말이다.
[주-D075] 육기(六氣) : 한의학에서 풍(風)ㆍ한(寒)ㆍ서(暑)ㆍ습(濕)ㆍ조(燥)ㆍ화(火)의 여섯 가지 요소를 가리킨다.
[주-D076] 노대(露臺)를 …… 있어 : 노대는 임금이 천상(天象)을 관찰하는 장소를 말하는데, 한 문제가 일찍이 이 노대를 지으려고 기술자를 불러 견적을 빼 본 결과 백금(百金)이 들게 되므로, 문제가 이르기를 “백금은 중산층 십 호(十戶)의 재산에 해당되니, 어찌 이 대를 만들겠는가.” 하고, 그만두었다. 《史記 卷10 文帝紀》
[주-D077] 인열왕후(仁烈王后)가 세상을 떴으므로 : 인열왕후(1594~1635)는 청주(淸州) 한씨로, 한준겸(韓浚謙)의 딸이다. 산실청(産室廳)에서 세상을 뜬 것은 1635년(인조13) 12월이다. 《국역 인조실록 13년 12월 9일》 《승정원일기》에는 1636년에 실려 있다. 《국역 승정원일기 인조 14년 1월 21일》
[주-D078] 예(禮)에 …… 했고 : 《예기대전(禮記大全)》 권30 〈상복(喪服)〉에 “아버지를 섬기는 도를 바탕으로 어머니를 섬겨 사랑함이 똑같으니,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땅에는 두 왕이 없고 나라에는 두 군주가 없고 집안에는 두 높은 분이 없어서 하나로써 다스린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살아 계시면 어머니를 위하여 자최 기년복을 입으니, 이는 집안에 두 높은 분이 없음을 보이는 것이다.[資於事父以事母, 而愛同, 天無二日, 土無二王, 國無二君, 家無二尊, 以一治之也. 故父在, 為母齊衰期者, 見無二尊也.]” 하였다.[주-D079] 존자가 …… 했으며 : 출처가 미상이다.
[주-D080] 모든 …… 했습니다 : 《예기》 〈분상(奔喪)〉 정의(正義)에 나온다.
[주-D081] 옛사람이 …… 했습니다 : 《서경》 〈강왕지고(康王之誥)〉 채침(蔡沈)의 주에 소식(蘇軾)의 말을 인용하여 나온다.
[주-D082] 성인(聖人)이 …… 것 : 《논어》 〈향당(鄕黨)〉에 나온다. 주희(朱熹)는 이에 대해 “초상에는 흰 것을 주로 하고, 길사(吉事)에는 검은 것을 주로 한다. 조문할 때에 반드시 옷의 색깔을 바꾸는 것은 죽은 사람을 슬퍼하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주-D083] 구천(句踐)이 …… 하듯 : 월(越)나라 왕 구천이 오(吳)나라 왕 부차(夫差)에게 패하여, 구천은 신하가 되고 처는 첩이 되겠다는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하고 회계산(會稽山)에서 강화하였다가, 섶에서 자고 쓸개를 핥으며 스스로 회계산의 치욕을 잊지 않으려 했다. 《史記 卷41 越王句踐世家》
[주-D084] 문공(文公)이 조읍(漕邑)에서 하듯 : 전국 시대 때 위(衛)나라가 적(狄)에 멸망당하여 문공이 조읍에 거처하고 있었다. 문공은 거친 베로 만든 옷을 입고 거친 비단으로 만든 관을 쓰고 지내는 등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재정을 모으고 백성들을 가르쳐 위나라를 부강하게 하였다. 《春秋左氏傳 閔公2年》
[주-D085] 좌임(左衽) : 오른쪽 옷섶을 왼쪽 옷섶 위로 여미는 것으로, 오랑캐의 풍속을 가리키는 말이다. 《논어》 〈헌문(憲問)〉에 “관중(管仲)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게 되었을 것이다.[微管仲, 吾其被髮左袵矣.]” 하였다.
[주-D086] 정선(征繕) : 세금을 거두고 무기를 수선하는 것을 말한다. 《春秋左氏傳 僖公 15年》
[주-D087] 거(莒) …… 마십시오 : 복수심(復讐心)을 가리킨다. 제 환공(齊桓公)이 거 땅에 있을 때 자규(子糾)가 노(魯)나라로부터 군대를 징발해 와서 환공과 대전(對戰)하였다. 자규는 환공의 형(兄)으로서 노나라에 도망가 있었다. 이때 자규의 부하인 관중(管仲)이 거 땅의 길을 차단하고서 활을 쏘아 환공의 혁대에 장식한 쇠붙이를 맞힘으로써, 환공이 거의 죽을 뻔하였다. 《史記 卷32 齊太公世家》
[주-D088] 쓸개를 매다는 일 : 월(越)나라 왕 구천(句踐)은 오(吳)나라에 복수할 것을 잊지 않기 위하여 쓸개를 매달아 놓고 핥았다. 《史記 卷42 越王勾踐世家》
[주-D089] 홍성민(洪聖民) : 1536~1594.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자는 시가(時可)이며, 호는 졸옹(拙翁)이다. 1580년(선조13) 및 1590년 경상 감사에 제수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신진사류의 영수 격이었고, 윤두수(尹斗壽)와 함께 서인으로 촉망받는 학자 관료였다. 저서로는 《졸옹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국역 선조수정실록 13년 2월 1일》
[주-D090] 공이 …… 청하였는데 : 1638년(인조16), 이경여는 문경(聞慶) 북쪽 조령(鳥嶺) 남쪽에 있는 어류산성을 지목하여 수축할 것을 청하였다. 산성에는 4, 5만 명의 군사를 수용할 수 있고, 1, 2만 호를 둘 수 있으며, 남한산성보다 방어에 적합하다고 주장하였다. 《국역 인조실록 16년 3월 5일》 《白江集 卷7 請設御留山城疏, 韓國文集叢刊 87輯》
[주-D091] 4월 …… 올렸다 : 응지는 임금이 신하들의 의견을 구하는 뜻에 부응하여 현안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1638년 5월, 이경여가 교리 심동귀(沈東龜)ㆍ성이성(成以性), 수찬 최유해(崔有海) 등과 올린 차자이다. 《국역 인조실록 16년 5월 1일》 《白江集 卷7 玉堂應旨箚, 韓國文集叢刊 87輯》
[주-D092] 수백 …… 가져왔습니다 : 인조반정을 일으키던 날을 말한다. 매가 하늘로 솟구치듯 무위(武威)를 자랑하는 장수라는 말이다. 《시경》 〈대명(大明)〉에 “이때 태사(太師) 상보(尙父)가 마치 매가 날 듯하여, 저 무왕을 도와서 상나라를 정벌하니, 하루아침에 아침처럼 청명했도다.[維師尙父, 時維鷹揚, 涼彼武王, 肆伐大商, 會朝淸明.]” 하였다. 상보는 바로 70세에 문왕(文王)을 따라 나선 여상(呂尙)을 가리킨다.
[주-D093] 외교 담판 : 원문의 ‘준조(樽俎)’는 연회(宴會)에 차리는 술병과 고기 담은 도마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외적과 연회 석상에서 담판을 하여 침략을 막고 외교 협상을 벌이는 것을 뜻한다.
[주-D094] 오랑캐를 …… 소탕하지 : 원문의 ‘이정(犁庭)’은 뜰을 갈아서 밭으로 만든다는 말이고, ‘소혈(掃穴)’은 소굴을 쓸어버린다는 말이다. 적의 근거지나 세력을 철저히 때려부순다는 뜻으로, 원래 흉노를 멸망시킨다는 말로 썼다. 《漢書 卷94 匈奴傳》
[주-D095] 방향이 …… 조화 : 《주역》 〈익괘(益卦)〉에 “하늘이 베풀고 땅이 낳으니, 보탬에 방향이 없다.[天施地生, 其益無方.]” 하였다.
[주-D096] 연(燕)나라 소왕(昭王) : 인재를 모아 원수를 갚은 인물로 제시한 것이다. 전국 시대 연나라는 제(齊)나라에게 패하여 피폐하였다. 연 소왕(燕昭王)이 현사(賢士)를 구하려고 하자, 곽외(郭隗)가 옛날 어느 임금이 1000금을 주어 천리마를 구해 오게 하였는데 천리마가 죽고 없어 500금을 주고 죽은 말의 뼈를 사 왔더니 그 후 너도나도 말을 가져와 1년도 채 못 가서 천리마를 얻게 되었다는 고사를 말하였다. 소왕이 대(臺)를 짓고 황금을 그 위에 비치한 다음 천하의 선비들을 맞이하였는데, 추연(鄒衍)이 제나라에서 오고, 악의(樂毅)가 위(魏)나라에서 오고, 극신(劇辛)이 조(趙)나라에서 와 결국 국력이 크게 강성하여 마침내 제나라를 격파하였다. 《史記 卷34 燕昭公世家》
[주-D097] 월(越)나라 구천(句踐) : 춘추 시대 월나라의 제2대 왕 구천이 오(吳)나라 왕 부차(夫差)와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회계산(會稽山)에서 굴욕적인 화의(和議)를 체결하고 귀국하였다. 뒤에 20년 동안 섶나무 위에 눕고 쓸개를 맛보는 ‘와신상담(臥薪嘗膽)’ 한 끝에 부차를 죽이고 오나라를 멸망시켜 회계의 치욕을 씻었다. 《史記 卷41 越王句踐世家》
[주-D098] 건순오상(健順五常) : 건순은 《주역》 〈건괘(乾卦)〉의 덕인 건과 곤괘(坤卦)의 덕인 순이며, 오상은 인간이 하늘에서 받은 다섯 가지 덕 즉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말한다. 주희는 《중용장구》 제1장 “하늘이 명한 것이 성(性)이다.[天命之謂性]”라는 말을 두고 “성은 바로 이(理)이다. 하늘이 음양오행으로 만물을 생성할 때 기(氣)로 형체를 이루고 이(理) 또한 부여하였다. 이는 마치 명령하는 것과 같다. 이에 사람과 물건이 태어날 때 각기 부여받은 바의 이(理)를 얻음으로 인하여 건순과 오상의 덕을 삼으니, 이른바 성이라는 것이다.” 하였다.
[주-D099] 삼전도(三田渡) : 광주(廣州) 한강 연안에 있는 나루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 태종(淸太宗)이 인조(仁祖)의 항복을 받고, 자기의 공덕(功德)을 자랑하기 위해 조선에 강제로 송덕비(頌德碑)를 세우게 하니, 마지못해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를 송파리(松坡里) 삼전도에 세웠다.
[주-D100] 성심(聖心)이 …… 될지 : 《서경》 〈다방(多方)〉에 “성인이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광인이 되고, 광인이라도 생각할 수 있으면 성인이 된다.[惟聖, 罔念作狂; 惟狂, 克念作聖.]” 하였다.
[주-D101] 신 등은 …… 아닙니다 : 겉으로 호기를 부리며 장담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다. 송(宋)나라 주희(朱熹)가 〈무신봉사(戊申封事)〉에서 “역을 잘 아는 사람은 역을 말하지 않는 법입니다. 정말로 나라를 회복하는 데 뜻을 둔 사람은 칼을 어루만지거나 손뼉을 치지 않습니다.” 하였다. 《晦庵集 卷11 戊申封事》
[주-D102] 얼음을 …… 마음 :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吳)나라에게 당했던 치욕을 씻기 위해 여름에는 화로를 끼고 겨울에는 얼음을 품고서 복수를 다짐했다. 《吳越春秋 句踐歸國外傳》
[주-D103] 지난번에 …… 것 : ‘일을 논한 신하[論事之臣]’란 척화신(斥和臣)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척화신은 병자호란 때에 청(淸)나라에 항복을 반대하고 항전을 주장한 신하를 말한다. 1637년(인조15) 조선에서 청나라로 척화신을 압송할 때 군졸들이 ‘임금을 협박하고 강화를 배척한 신하’들을 묶어 보냈다. 삼학사(三學士)로 불리는 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ㆍ홍익한(洪翼漢)은 끌려가 절의를 굽히지 않다가 살해당하였다. 《국역 인조실록 15년 6월 8일, 16년 3월 14일》 한편, 《백강집(白江集)》 권7 〈옥당응지차(玉堂應旨箚)〉에는 앞의 절의에 대한 언급이 이 부분 뒤에 실려 있다.
[주-D104] 전하께서는 …… 하셨습니다 : 인조는 척화를 주장한 사람들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주장한 사람은 마땅히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라는 비답을 내렸다. 이에 성이성(成以性), 이경여 등이 인조를 비판하는 논계를 올렸다. 《국역 인조실록 16년 4월 27일》
[주-D105] 관중(管仲)이 …… 것처럼 : 《관자(管子)》 〈소광(小匡)〉 가운데 관중이 제 환공(齊桓公)에게 “내정을 진작시키고 군령을 붙이십시오.[作內政, 而寓軍令.]”라고 하였는데, 내정은 국정을 가리키니, 군령을 국정에 맡긴다는 것은 이웃 나라가 모르게 준비한다는 뜻이다.
[주-D106] 남들이 …… 많았다 : 사관의 논평에는 “이경여는 사람됨이 민첩하고 재주가 있어 작은 일을 당하면 비록 권세와 부귀가 관련되었더라도 탄핵을 꺼리지 않고 큰일을 당하면 조짐을 살펴 일이 발생하기 전에 잘 피했는데, 알지 못하는 자는 강직한 신하라고 말하고 아는 자는 그래도 단정한 선비라고 한다.” 하였다. 《국역 인조실록 16년 9월 3일》
[주-D107] 당시 …… 것이다 : 김상헌(1570~1652)의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숙도(叔度)이며, 호는 청음(淸陰)ㆍ석실산인(石室山人)이다. 병자호란 당시 이조 참판 정온(鄭蘊)과 함께 화의를 반대하고 항전을 주장하였다. 이 무렵 장령 박계영(朴啓榮)과 유석(柳碩) 등이 “임금이 위급할 때 버리고 갔으며 화복(禍福)을 시종 전하와 함께 해야 하는데……일이 대충 안정되었는데도 끝내 성상을 찾아와 뵙지 않았습니다.……몸을 깨끗이 하고 절의를 지키며 더러운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론(異論)을 고취시켜 국가의 잘못을 드러내고 사람들의 뜻을 혼란시켰으니, 아, 신하의 의리가 이에 하나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논계하였다. 《국역 인조실록 15년 1월 28일》
[주-D108] 정온(鄭蘊) : 1569~1641. 본관은 초계(草溪)이고, 자는 휘원(輝遠)이며, 호는 동계(桐溪)ㆍ고고자(鼓鼓子)이다. 임해군 옥사에 대해 ‘은혜를 베풀라’고 주장했고, 영창대군이 강화 부사 정항(鄭沆)에 의해서 피살되자 상소를 올려 정항의 처벌을 주장하여 정인홍(鄭仁弘)과 사이가 멀어졌다. 폐모론을 반대하다 제주에 위리안치되었다. 병자호란 당시 이조 참판으로 화의에 반대하여 칼로 자결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국역 인조실록 15년 1월 28일》 《오수창, 인조대 정치세력의 동향, 한국사론13, 1984》
[주-D109] 색성 소인(索性小人) : 직선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자기 마음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소인을 말한다.
[주-D110] 또 말하기를 …… 하였다 : 《인조실록》에는 이때 이경여가 병조 참판이었던 것으로 나온다. 이 상소가 올라가자 인조는 이경여를 체직시켰다. 《국역 인조실록 16년 9월 6일》 《白江集 卷8 辭兵曹參判疏》
[주-D111] 정공 엽(鄭公曄) : 정엽(1563~1625)의 본관은 초계(草溪)이며, 자는 시회(時晦)이고, 호는 수몽(守夢)이다. 이이(李珥)와 정유길(鄭惟吉)로부터 신동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이지함(李之菡)의 주선으로 송익필(宋翼弼), 성혼(成渾)에게 배웠다.
[주-D112] 옛날 …… 것 : 이경여는 경연에 참찬관으로 입시하여 “옛날에는 구인재(求仁齋)ㆍ지도재(志道齋)ㆍ양몽재(養蒙齋)를 두어 과(科)를 나누어 선비를 가르치는 규식으로 삼았다 합니다. 지금도 이 규식을 대충 모방하여, 3과(科)에 각각 20인씩을 정액으로 하고 사학(四學)에 각각 5인씩을 두면 모두 80인이 됩니다. 그들로 하여금 모두 관학(館學)에 모여 3재(齋)에 나누어 거처하게 하되, 거처를 편안하게 하고 늠식(廩食)을 풍족하게 하면 선비를 기르는 방도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국역 인조실록 17년 2월 4일》 삼과의 유래에 대해서는 미상이다. 셋이 따로 전거는 있지만 같이 삼과로 불린 일은 확인하지 못하였다. 구인재는 《주례(周禮)》를 강의하는 학관으로, 《주역》을 전문으로 강의하는 이택재(麗澤齋), 《상서》를 강의하는 대빙재(待聘齋), 《시경》을 강의하는 경덕재(經德齋), 《예기(禮記)》를 강의하는 복응재(服膺齋), 《춘추(春秋)》를 강의하는 양정재(養正齋), 병서(兵書)를 강의하는 강예재(講藝齋)와 함께 국학(國學)에 설치한 ‘칠관(七管)’이라 하는 7가지 전문 강좌에 포함되어 있었다. 지도재는 주희가 지은 명(銘)이 남아 있다. 《性理大全書 卷70 志道齋銘》 양몽재는 김세렴(金世濂)이 평양(平壤)에 설치하여 학자 양성에 기여했다고 한다. 《국역 기언 별집 제16권 호조 판서 김공(金公) 신도비명》
[주-D113] 이계(李烓)라는 …… 하였다 : 이계는 선천 부사(宣川府使)를 역임했는데, 중국 한인(漢人) 잠상(潛商)과 무역하면서 단속을 소홀히 한 혐의로 정명수(鄭命壽)에게 심문을 받고 심양으로 잡혀갔다. 심문을 받으며 조선의 비밀 사안을 고해 바쳤고 정태화(鄭太和)의 서찰 등을 감추어 두었다가 청나라에 바치는 등 조선의 처지를 곤궁에 빠트렸다. 청나라에서도 이계를 처단하라고 했으므로, 이계는 용만(龍灣)에서 효시되었고 아비 이진영(李晋英)과 그의 숙부 이진익(李晋翼)ㆍ이진현(李晋賢) 및 사촌 이환(李煥) 등은 체포되어 하옥당하였다. 《국역 인조실록 20년 1월 7일, 10월 21일, 11월 12일》
[주-D114] 공이 …… 않으며 : 숭덕은 청 태종의 연호로 1636년부터 1643년까지이다. 이 일과 관련하여 사관(史官)은 “이경여는 정축년 이후로 소장(疏章)이나 부서(簿書) 사이에 숭덕이란 연호를 전혀 쓰지 않았는데, 마침내 역적 이계(李烓)에 의해 그 사실이 청나라에 밀고되어 임오년 겨울에 박씨(博氏) 두 사람이 정명수와 함께 와서 이경여를 심양으로 가자고 다그쳤다. 그러자 이경여는 이를 두려워하여 마침내 이조에 직첩을 고쳐 써내고 숭덕이란 연호를 추서(追書)하여 자신을 변명하는 뒷받침으로 삼았고, 정명수에게 뇌물을 주어 목숨을 구하는 계책으로 삼았으며, 심지어는 음식을 장만하여 그들을 대접하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비록 이경여 혼자서 한 것은 아니었으나 명망이 크게 훼손되었다.” 하였다. 《국역 인조실록 23년 2월 23일》
[주-D115] 남조(南朝) : 청나라에 쫓겨 북경을 빼앗기고 남쪽으로 밀려간 명나라를 가리킨다. 명나라는 복왕(福王), 당왕(唐王), 영명왕(永明王)을 거치고 멸망하였다.
[주-D116] 공은 …… 이르렀다 : 이계의 심문 과정에서 반청(反淸) 인물로 지목되어 심양으로 끌려간 일이다. 이들을 척화 오신(斥和五臣)이라고 부르는데, 신익성(申翊聖)ㆍ신익전(申翊全)ㆍ허계(許啓)ㆍ이명한(李明漢)ㆍ이경여(李敬輿) 등 다섯 사람이다. 앞서 중국 한인의 배를 접대하고 비밀 무역을 하였다는 이유로 청나라 장수 용골대(龍骨大)가 봉성(鳳城)으로 나와서 관련된 사람들을 심문하였는데, 이때 이계가 조선이 명나라와 내통한 사실을 낱낱이 고해 바치면서 이들 오신이 청국을 반대하는 주동자라고 하였기 때문에 청나라에서 이들을 심양으로 잡아갔다. 심양에 당도한 뒤 칼을 쓰고 동관(東館)에 구금되었다. 이경여ㆍ이명한ㆍ허계ㆍ김상헌(金尙憲)은 그대로 동관에 구금하고, 최명길(崔鳴吉)ㆍ심천민(沈天民)ㆍ이지룡(李之龍)은 북관에 구금하였다. 《심양장계(瀋陽狀啓) 임오년 11월 15일 계(啓)》 《국역 인조실록 21년 2월 11일》
[주-D117] 계미년 3월에 귀환하였다 : 1643년(인조21) 3월, 심양으로 압송된 지 약 2달 만에 이경여는 이명한, 허계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다. 《국역 인조실록 21년 3월 26일》
[주-D118] 공은 …… 청하였다 : 이 일은 1643년 11월에 있었다. 《국역 인조실록 21년 11월 16일》 승척은 면포의 새[升]와 길이를 말한다. 새는 면포[木]의 부피 단위이고, 자[尺]는 면포의 길이 단위가 된다. 《대전통편(大典通編)》 〈호전(戶典) 요부(徭賦)〉에 대동목 1필(疋)은 5새 35자로 기준을 삼고, 군포목 1필은 6새 40자로 기준을 삼는다고 하였다. 또 “상납하는 목 1필은 2냥으로 대전(代錢)한다.” 하였고, “목의 품질 및 새와 자는 한결같이 정식을 준수하고, 서울과 지방의 관원 가운데 법을 어겨 가며 검사하여 퇴짜 놓는 자는 적발되는 대로 엄하게 처벌한다.” 하였다. 《대전통편》이 정조(正祖) 때 편찬되지만, 대동목 등의 규정은 대동법 실시가 논의되던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이경여의 말을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된다.
[주-D119] 최복(衰服)을 …… 와중에도 : 최복은 거친 베로 만든 상복으로, 오복(五服) 중 참최(斬衰)와 자최(齊衰)가 해당되는데, 여기서는 부모, 조부모의 상중임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원문의 ‘점괴(苫塊)’는 ‘침점침괴(寢苫枕塊)’의 준말로, 거적으로 자리를 삼고 흙덩이로 베개를 삼는다는 뜻이며 거상(居喪)하는 예를 말한다. 《儀禮 喪服》
[주-D120] 궁가와 …… 청하였다 : 이경여의 논리는 군왕은 토지로 백성을 기르는데 일정한 강토 이외에 어찌 다른 전답이 필요하겠느냐는 것이었다. 아울러 “옛날의 둔전(屯田)이란, 군사를 주둔시킬 때 군사의 힘으로 경작하지 않은 땅을 개간하여 군량을 마련하고 따라서 운송하는 노력을 줄이는 것으로서, 오늘날의 각 아문의 둔전과 같이 나라 안에 둔전을 두고 농민에게 미끼를 설치한 일은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지적하였다. 또한 “역(役)을 피하는 자가 다 모여들고 구실을 내지 않은 자가 앞다투어 달려와서 원결(元結)은 날로 줄어들어 세입이 감소하고 도망한 자들의 안식처가 되어 군액이 축나므로 백성의 전답이 탈취당하고 이웃 농사가 피해를 입습니다.”라고 하였다. 이경여의 정당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인조가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각 궁방의 둔전 점유가 왕실 재정의 밑천이었기 때문이다. 내수사(內需司)와 각 궁방의 공유지(共有地) 침탈에 대한 문제 제기가 끊이지 않았음에도 이런 이유로 개혁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국역 인조실록 21년 11월 16일》
[주-D121] 인조(仁祖)께서 …… 시술하였고 : 이형익은 충청도 대흥(大興) 출신의 침의(鍼醫)였는데, 번침술(燔鍼術)로 이름이 알려져 내의원으로 들어왔고 인조도 침을 맞았다. 1643년(인조21) 무렵부터 인조는 이형익에게 번침을 자주 맞았고, 신료들의 반대가 이어졌다. 《국역 인조실록 11년 1월 17일, 21년 2월 4일ㆍ8월 8일》
[주-D122] 체울(滯鬱)이 …… 상승하고 : 몸에서 기운의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아, 허화(虛火)가 뜨고 울체되는 양상을 말한다. 의가(醫家)에서 물기운이 올라가서 머리를 맑게 하고 불기운은 내려와서 하초를 따뜻하게 하는 수승화강(水升火降), 자음강화(滋陰降火)와 반대되는 불건강 상태를 가리킨다.
[주-D123] 안일하지 …… 말 : 《서경》 〈무일(無逸)〉의 1장과 13장의 말이다.
[주-D124] 홍무적(洪茂績) : 1577~1656.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면숙(勉叔)이고, 호는 백석(白石)이다. 폐모론을 주장하던 정조(鄭造)ㆍ윤인(尹訒) 등을 목 베라고 상소하였다가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 뒤 석방되었다. 이경여와 함께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1646년(인조24)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강빈(姜嬪) 사사(賜死)에 극력 반대하다가 제주로 유배 갔다가 효종 즉위 후 사면되었다. 《宋子大全 卷159 白石洪公神道碑銘, 韓國文集叢刊 113輯》[주-D125] 당시 …… 머물렀다 : 1639년(인조17)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조선에 출병을 요구하자 조정에서는 군대를 보내 청나라를 돕기로 하였다. 김상헌이 이 말을 듣고 “범이 우리를 잡아먹었는데, 우리가 차마 범을 위하여 창귀(倀鬼)가 되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며 원병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말이 청나라 조정에 들어갔고, 1640년 11월에 청나라의 차사(差使)가 의주(義州)까지 나와 김상헌을 심양(瀋陽)으로 압송하였다. 김상헌은 6년 후인 1645년에야 풀려나 귀국하였다. 청나라와 화의를 성립시켰던 최명길도 임경업(林慶業)과 함께 명나라와 내통했다는 혐의를 쓰고 심양으로 호송되었다. 김상헌과 최명길은 비록 병자호란 때 처신이 조금 달랐지만 척화의 대의에 공감하며 같은 심양 감옥에서 시를 나누었다. 이들은 청나라가 북경을 점령한 뒤 사면을 받고 귀국했다. 《국역 청음집 제12 설교후집(雪窖後集)》 《淸陰年譜 규장각 古 4650-154》 《宋子大全 卷182 石室金先生墓誌銘》 《오항녕, 17세기 전반 서인 산림의 사상-김장생ㆍ김상헌을 중심으로, 역사와현실8, 1992》
[주-D126] 7월에 …… 불렀다 : 《인조실록》에는 이 일이 7월이 아니라 윤6월로 나온다. 《국역 인조실록 23년 윤6월 2일》
[주-D127] 강 서인(姜庶人)은 …… 있었고 : 강 서인은 소현세자빈 강씨를 말한다. “심양에서 귀국할 무렵 강빈이 은밀히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하였고, 홍금 적의(紅錦翟衣)를 만들어 놓고 내전(內殿)의 칭호를 외람되이 사용하였다.”라는 혐의를 받았다. 《국역 인조실록 24년 2월 3일》 이듬해인 1646년에 강빈 옥사가 일어나 강씨가 폐서인(廢庶人)되고 사사되었기 때문에 이민서가 여기서 ‘서인’이라고 쓴 것이다. 강빈은 1718년(숙종44) 위호가 회복되었고 시호를 ‘민회(愍懷)’라고 하였다. 《국역 숙종실록 44년 4월 17일》
[주-D128] 상이 …… 하였다 : 이른바 나라에 장성한 군주가 있어야 한다는 인조의 논리이다. 이를 통해서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은 뒤 원손(元孫) 석철(石鐵)을 비롯한 소현세자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국유장군론(國有長君論)’은 송(宋)나라 두 태후(杜太后)는 오대(五代) 시대의 약한 임금의 폐단을 보고서 “나라에 장성한 군주가 있는 것이 사직(社稷)의 복이다.”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국역 인조실록 23년 윤6월 2일》 《續資治通鑑綱目 卷2》
[주-D129] 취부(就傅) : 10살을 말한다. 《예기》 〈내즉(內則)〉에 “10살이 되면 밖에 있는 스승에게 나아가, 밖에서 거처한다.” 하였다.
[주-D130] 이공 식(李公植) : 1584~1647.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고(汝固)이며, 호는 택당(澤堂)이다. 광해군 때 폐모론이 일어나자 낙향하였다. 대제학으로서 《선조실록》의 수정을 거의 완성하였다. 1642년(인조20) 김상헌과 함께 심양에 압송되었다가 풀려났다. 1646년 별시에서 출제한 시제(試題)에 기롱하는 뜻이 있다 하여 파방되면서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국역 인조실록 24년 9월 5일, 25년 6월 13일》 《오항녕, 宣祖實錄 修正攷, 한국사연구123, 2003》[주-D131] 병술년 …… 일어났다 : 인조가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뒤 김자점(金自點), 조 귀인과 함께 강빈이 심양에서 내전(內殿)을 참칭했고 소현세자 사후에 저주 사건을 주동한 역적으로 몰고 간 무고 사건이었다. 청나라의 침략에 저항했던 척화신(斥和臣)을 좋게 보지 않았던 인조가 친청파(親淸派)였던 김자점(金自點), 귀인 조씨(貴人趙氏)의 무함에 따라 진행된 사건으로 보인다. 《오항녕, 朝鮮 孝宗代 政局의 變動과 그 性格, 태동고전연구9, 1993》
[주-D132] 조 서인(趙庶人) : 귀인(貴人) 조씨를 말한다. 인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조 귀인은 소현세자의 죽음과 연관이 있으리라는 혐의를 받고 있었고, 학계에도 그런 의견을 가진 학자가 있다. 김자점은 조 귀인과 함께 친청(親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효종 2년 김자점 옥사가 일어나 처형되었다. 이 행장은 그 뒤에 쓴 것이기 때문에 이민서가 ‘서인(庶人)’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국역 효종실록 2년 12월 17일》 《김용덕, 昭顯世子硏究, 朝鮮後期思想史硏究, 을유문화사, 1977》
[주-D133] 당 태종(唐太宗)이 …… 일 :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폐하여 죽이는 일을 경계한 것이다. 당 태종은 아우 원길(元吉)의 비(妃)를 맞아들였고, 뒤에 열넷째 아들 조왕(曹王) 명(明)을 후사로 삼게 하고 그를 문덕황후(文德皇后)의 뒤를 이어 후(后)로 삼으려 하다가 위징(魏徵)의 간언으로 중지하였다. 형인 은태자(隱太子) 건성(建成)과 아우 제왕(齊王) 원길(元吉)을 죽였으며, 태자 승건(承乾)을 폐하여 죽였다. 소현세자의 세 아들도 제주로 귀양 간 뒤 차례로 죽었다. 《資治通鑑 卷194 唐太宗紀》 《국역 인조실록 24년 2월 4일》
[주-D134] 영의정 …… 떠났고 : 김류가 강빈 옥사를 지나치게 다스리지 말 것을 청하자 인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또 김류를 공박했다가 귀양 간 이중형(李重馨)을 석방하라고 명하여 은연중 김류를 압박함으로써 김류는 두려워 밖으로 나갔다. 또 인조는 강빈이 독을 넣은 일에 대해 약방(藥房) 도제조인 김류가 확인하지 않았다 하여 약방 제조 김육(金堉)과 함께 체차하였다. 《국역 인조실록 24년 2월 4일, 6일》
[주-D135] 이전 …… 명하여 : 인조는 “세자를 가려 정한 것은 사람들이 듣고 즐거워할 일인데도 이경여(李敬輿)는 ‘인심이 뒤숭숭할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라며 절도에 귀양 보냈다. 《국역 승정원일기 인조 24년 2월 18일》
[주-D136] 무자년 …… 옮겼다 : 북쪽으로 유배된 이유는 소현세자의 세 아들이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인조실록》에는 경성이 아니라 회령(會寧)으로 나온다. 《국역 승정원일기 인조 26년 윤3월 17일》 《국역 인조실록 26년 윤3월 17일》
[주-D137] 그 뒤 …… 많았다 : 당시 상언했다가 죄를 얻은 것은 단지 이경여를 구원하였기 때문은 아니다. 강빈 옥사와 관련된 언급은 인조가 금기시하였기 때문에 일반 신료는 물론 대신들도 귀양을 가거나 체직되었다. 《국역 인조실록 24년 10월 13일》
[주-D138] 김 상공 상헌(金相公尙憲) …… 않았다 : 인조는 강빈 옥사 이후 김상헌을 좌의정으로 삼아 여론의 보합을 꾀한 듯하다. 사관은 “대신들이 면직을 청하면 10여 일을 넘기지 않고 면직을 허락하였는데, 상헌에 대해서만은 예모를 제법 중하게 하였다.” 하였다. 김상헌은 양주(楊州)로 내려가 30차례 이상 사직하면서 “오늘날 선비의 기개가 꺾인 것이 꼭 겨울을 지낸 초목과 같습니다.” 하였는데, 이경여를 직접 거론한 자료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국역 인조실록 24년 5월 22일, 6월 10일》
[주-D139] 공은 …… 흘렸다 : 인조를 곁에서 모시기를 희망했는데 갑자기 승하하여 비통하다는 말이다. 선실은 중국 한(漢)나라 미앙궁(未央宮)의 정전(正殿) 이름이다. 원래 임금이 제사 지내기 위하여 재계(齋戒)하는 집이었다. 한 문제(漢文帝)가 제사를 마치고 선실에 앉아 있었는데 가의(賈誼)가 귀신에 대하여 설명하자 문제가 흥미를 느끼고는 자리를 당겨 가의를 앞으로 가까이 오게 하였다. 정호는 중국 하남성(河南省) 형산(荊山) 아래에 있는 지명이다. 황제(黃帝)가 일찍이 형산 아래에서 동(銅)으로 솥을 주조하고는 용(龍)을 타고 승천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전하여 임금의 붕어(崩御)를 뜻한다. 승천할 적에 황제의 활과 검을 떨어뜨렸다. 《史記 卷28 封禪書》 진덕수(1178~1235)의 자는 경원(景元)ㆍ희원(希元)이고, 호는 서산(西山)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복건성(福建省) 건주(建州) 사람이다. 1199년 진사가 되어 호부 상서(戶部尙書),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역임하였다. 주희(朱熹)의 문인 첨체인(詹體仁)에게 수학하였으며, 정주이학(程朱理學)을 계승 발전시키는 데 힘썼다. 저술로 《대학연의(大學衍義)》, 《진문충공집(眞文忠公集)》 등이 있다. 이 말은 예부시랑 겸 동수국사(同修國史)에 임명되었을 때인 남송(南宋) 이종(理宗) 1225년 7월 9일에 올린 〈예부 시랑 사표(禮部侍郞謝表)〉에 나오는데, 자신이 1년 전에 죽은 선제(先帝)인 영종(寧宗) 때 급제하여 관직을 맡았던 일을 상기하며 했던 말이다. 진덕수 문집에는 ‘기(冀)’가 ‘기(期)’로 되어 있다. 《西山文集 卷10 禮部侍郞謝表》
[주-D140] 이공 경석(李公景奭) : 1595~1671.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상보(尙輔)이며, 호는 백헌(白軒)이다. 종실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6대손이다. 김장생의 문인으로, 병자호란 때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지었다. 1649년(효종 즉위년)에 효종의 북벌 계획이 이언표(李彦標) 등의 밀고로 청나라에 알려져 사문(査問)하는 일이 있었다. 청나라의 사문사는 남별궁(南別宮)에서 영의정 이경석 등을 세워 놓고 전말을 조사하였다. 이경석은 청나라 사신들로부터 ‘대국을 기만한 죄’로 몰렸으나, 효종의 구명으로 목숨을 건지고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위리안치되었다. 저서로는 《백헌집(白軒集)》 등이 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西溪集 卷12 領議政白軒李公神道碑銘, 韓國文集叢刊 134輯》
[주-D141] 조공 익(趙公翼) : 1579~1655. 본관은 풍양(豐壤)이고, 자는 비경(飛卿)이며, 호는 포저(浦渚)ㆍ존재(存齋)이다. 대동법 시행 등 경세가로서의 면모만이 아니라, 경학(經學) 연구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다. 《국역 동춘당집 제22권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世子傅) 포저(浦渚) 조공(趙公) 시장》
[주-D142] 처음에 …… 쫓겨났다 : 용사하던 자란 영의정 김자점(金自點, 1588~1651)을 가리킨다. 자는 성지(成之), 호는 낙서(洛西),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인조반정으로 정사 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봉되었다. 1645년(인조23) 숙원 조씨(淑媛趙氏)와 결탁해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죽이는 데 가담한 혐의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세자빈 강씨(姜氏)에게 인조 시해 혐의를 씌워 사사하게 한 뒤,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축출하고 강빈의 형제들을 제거하였다. 또 인조와 조씨의 소생인 효명옹주(孝明翁主)와 김자점의 손자인 김세룡(金世龍)은 혼인하여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 또한 청나라 사신이나 역관 정명수(鄭命壽) 무리들과 결탁해 청나라의 후원을 얻었다. 효종이 즉위한 뒤 탄핵을 받고 1650년(효종1)에 홍천(洪川)으로 유배되었다. 1651년, 효명옹주의 저주 사건이 발각되고, 아들 김익(金釴)이 수어청(守禦廳) 군사와 수원 군대를 동원해 원두표(元斗杓)ㆍ김집ㆍ송시열ㆍ송준길을 제거하고 숭선군(崇善君)을 추대하려는 역모가 폭로되어 아들과 함께 복주당하였다. 《국역 효종실록 즉위년 6월 22일, 2년 12월 17일》
[주-D143] 김공 집(金公集) : 1574~1656.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자는 사강(士剛)이며, 호는 신독재(愼獨齋)이다. 아버지는 김장생(金長生)이다. 예학(禮學)에 밝았으며, 송시열, 송준길의 스승이다. 1643년 가을에 원손 보양관(元孫輔養官)에 임명되었다. 효종이 즉위한 뒤 이조 판서로 김경여(金慶餘), 신천익(愼天翊) 등과 함께 조정에 나왔다가, 김육(金堉)과 대동법 시행을 놓고 정책에 대한 의견 차이가 생겨 낙향하였다. 《국역 동춘당집 제21권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신독재(愼獨齋) 김 선생(金先生) 시장》
[주-D144] 이때에 …… 물러가고 : 효종이 즉위한 뒤 산림(山林) 다섯 신하를 밀지로 불렀다. 이에 김집(金集)ㆍ송시열(宋時烈)ㆍ송준길(宋浚吉)ㆍ이유태(李惟泰)ㆍ유계(兪棨) 등이 조정에 등용되어 북벌론이 대두되자 청나라의 앞잡이인 역관 정명수(鄭命壽) 등이 이런 동향을 청나라에 알렸다. 청나라는 사신을 보내 상황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사은사로 간 영의정 이경석을 백마산성에 위리안치하였고, 김상헌과 조경(趙絅)ㆍ김집(金集)의 이름을 거론하였다. 이 일로 김상헌 등 산림 학자들이 낙향하였다. 《국역 효종실록 1년 3월 1일》
[주-D145] 왕녀(王女)나 …… 하였다 : 중사(中使) 나업(羅嶪)이 사은사로 갔다가 돌아와, 청나라가 조선 국왕과 혼인관계를 맺고자 한다는 의사를 전달하였다. 청나라에서는 국왕의 딸이 몇이며 몇 살인지 등에 대해 물었는데, 며칠 뒤 종실(宗室)의 딸들을 뽑아 데리고 갔다. 《국역 효종실록 1년 3월 5일, 20일》
[주-D146] 호남(湖南)의 …… 혁파하였다 : 임진왜란 이후 조정에서 통영은 수로(水路)의 요충지에 위치했는데도 소속된 수졸(水卒)이 빈약하다는 이유로 호남 연해의 각 읍으로 하여금 수졸을 뽑아 보내게 하여 해변의 방비군을 더 배치하였는데, 바람이 잔잔해지는 봄이 되면 본영(本營)에서 입방(入防)하여 사태에 대비하고 바람이 거세지는 철이 되면 비로소 파하여 내보내되 해마다 이를 상례로 하고 첨방군이라 불렀다. 호남의 백성들이 식량을 싸 가지고 멀리까지 와서 수자리를 살고 항상 본영의 침해를 받아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였으므로 의논하는 자들이 그 일을 혁파해야 한다고 많이 말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방수(防戍)를 이유로 곤란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영의정 김육이 빨리 혁파하여 호남 백성들의 원망을 풀어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여 대신에게 수의할 것을 명하였는데, 영중추부사 이경여가 그 폐해를 극력 주장함으로써 혁파되었다. 《국역 효종실록 2년 2월 23일》
[주-D147] 서옥(庶獄)과 …… 문왕(文王)이었습니다 : 형벌을 담당하는 관리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믿었다는 말이다. 《서경》 〈입정(立政)〉에 나온다.
[주-D148] 선왕의 …… 정치 : 맹자(孟子)가 제시한 인정(仁政)를 가리킨다. 사람이란 누구나 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 것을 보면 불쌍히 여기고 슬퍼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마련인데 이것이 불인지심(不忍之心)이다. 이 마음을 미루어 정치를 한다면 천하를 다스리기는 지극히 쉽다고 말하였다. 《孟子 公孫丑上》
[주-D149] 송(宋)나라에 …… 청하였습니다 : 이경여의 의견은 정해진 부세액 가운데 100%를 다 걷지 말고 10% 정도 덜 걷는다고 생각하고 과세하자는 말이다. 주희는 〈무신봉사(戊申封事)〉에서 “호부의 경비는 날로 부족해지고 세금을 징수하는 감독은 날로 독촉이 심해져 결국 조종조 이후로 전해져 온 파분(破分)이라는 양법(良法)을 폐지하고 반드시 전량을 채우는 것으로 한계를 삼으며, 부족하다고 여기면 또 감사와 군수를 비교하여 전최법(殿最法)으로 유인하고 협박하여……백성의 재물을 닥닥 긁어 위로 바치는 데 능력이 있는 자를 현명하게 여깁니다.……폐하의 내탕고 사재를 꺼내 호부(戶部)에 귀속시킬 수 있고 호부의 재정이 심하게 부족하지 않게 되면 반드시 파분법(破分法)을 복원하십시오.” 하였다. 1188년 송 효종(宋孝宗)에게 올린 〈무신봉사〉는 송나라가 남천한 뒤 첫째가는 상소였으며, 주희가 평생 노력한 송나라 사회에 대한 전면적인 분석의 성격을 지닌다. 《晦庵集 卷11 戊申封事, 卷12 己酉擬上封事》 《수징난 지음, 김태완 옮김, 주자평전 하, 제16장 전통 반성에서 현실 비판으로, 역사비평사, 2015》
[주-D150] 손익(損益)의 의리 : 《주역》 〈익괘(益卦) 단(彖)〉에 “익은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해 주니 백성의 기쁨이 한량없다.[益, 損上益下, 民說无疆.]” 하였다.
[주-D151]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 《국역 효종실록》 1년 5월 21일에 나온다.
[주-D152] 백관들이 서로 본받아 : 원문의 ‘사사(師師)’는 관리들이 서로를 본받는다는 뜻이다. 《서경》 〈고요모(皐陶謨)〉에 “뛰어난 인재들이 관직에 있어, 백관이 서로 본받는다.[俊乂在官, 百僚師師.]” 하였다.
[주-D153] 서경에 …… 하였는데 : 《서경》 〈홍범(洪範)〉에 나온다.
[주-D154] 당시 …… 청하였다 : 문성공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시호이고, 문간공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시호이다. 1649년(효종 즉위년) 11월 태학생 홍위(洪葳)와 이원상(李元相) 등이 이이와 성혼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청했다가 효종이 일단 신중히 처리하자고 반려하였다. 이후 경상도의 진사 유직(柳稷) 등 900여 명이 이이와 성혼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주장은 1623년(인조 원년)부터 각기 제기되었지만 1681년(숙종7)에 가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국역 효종실록 즉위년 11월 23일, 1년 2월 22일》 《국역 인조실록 1년 3월 27일, 3년 2월 22일》 《국역 숙종실록 7년 9월 19일》
[주-D155] 상이 …… 떠났다 : 성균관 유생들이 이이와 성혼을 무함했다는 이유로 유직 등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였다. 태학생 대표 박세채(朴世采), 김수항(金壽恒) 등은 성균관 학생회인 재회(齋會)에서 유적에서 이름을 뺀 유직에 대해 다시 부황(付黃)하는 조치를 내렸다. 효종은 “피차의 유생들이 한결같이 명령을 어기고 있는데, 이들은 유독 나라 안에 살지 않는단 말인가. 내가 알 바가 아니다.” 하며 태학생들의 상소를 다시 내주었다. 유생들은 항의 표시로 권당(捲堂)에 들어갔다. 《국역 효종실록 1년 7월 3일》
[주-D156] 유계(兪棨) …… 때 : 사건은 유계가 인조의 묘호에 ‘인(仁)’ 자를 쓰면 안 된다고 한 데서 시작되었다. 인종(仁宗)의 ‘인’ 자와 겹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효종은 ‘인’ 자를 ‘사욕이 없어야 쓸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유계를 귀양 보냈다. 유계에 앞서 심대부(沈大孚)는 인조가 창업의 군주가 아니고 계승한 군주이기 때문에 ‘조(祖)’가 아니라 ‘종(宗)’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유계의 말에 동조한다는 혐의를 받고 유계와 같은 죄로 중도부처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국역 효종실록 즉위년 5월 23일, 1년 4월》 《오항녕, 朝鮮 孝宗代 政局의 變動과 그 性格, 태동고전연구9, 1993, 18~19쪽》
[주-D157] 대사헌 …… 때 : 1650년(효종1) 대사헌 조석윤(趙錫胤)이 여러 궁가의 염분(鹽盆) 등을 혁파하는 일로 논계하였는데, 효종이 편치 않게 대답하였다. 이 때문에 인피하였는데, 또 경연에서 이목(耳目)이 총명하지 못하다는 전교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 패소(牌召)에 나아가지 않았다가 파직되었다. 이경여가 차자를 올려 조석윤은 마음이 공평한 사람이라고 해명하며, 조석윤이 실록 편찬을 계속하도록 하라고 청하였다. 《국역 효종실록 1년 10월 19일》
[주-D158] 노공(潞公)의 고사 : 노공은 송(宋)나라 명재상 문언박(文彥博)의 봉호(封號)이다. 자는 관부(寬夫),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북송(北宋)의 인종(仁宗), 영종(英宗), 신종(神宗), 철종(哲宗) 등 사대(四代) 50여 년을 재상으로 섬겼다. 재임 기간 동안 공도(公道)에 입각한 정치로 세인들이 현상(賢相)이라 존경하였다. 저서에는 《노공집(潞公集)》이 있다. 노공의 고사란, 그가 태사(太師)의 벼슬로 치사(致仕)하고 낙양(洛陽)에 있었는데, 철종(哲宗) 원우(元祐) 초에 사마광(司馬光)이 숙덕 원로(宿德元老)이니 기용해야 한다고 추천하자, 수렴청정 중인 선인태후(宣仁太后)가 곧 평장군국중사(平章軍國重事)에 제수하고 6일에 한 번 조회하고 한 달에 두 번 경연에 나오도록 한 것을 말한다. 《宋史 卷313 文彥博列傳》
[주-D159] 민공 응형(閔公應亨) : 1578~1662.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자는 가백(嘉伯)이다. 문과 급제 후 광해조 때 관직에 들어갔으나 폐모론이 일어나자 경기도 양평으로 은거하였다. 인조반정 후에 관에 복귀하여 직간(直諫)으로 이름이 났다. 강빈 옥사 때 파직되었다가 효종이 즉위한 뒤 부제학으로 복귀하였다. 《龍洲遺稿 卷20 判書閔公神道碑銘, 韓國文集叢刊 90輯》[주-D160] 이공 후원(李公厚源) : 1598~1660.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사진(士晋)ㆍ사심(士深)이고, 호는 우재(迂齋)이다. 광평대군(廣平大君)의 7세손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홍서봉(洪瑞鳳)에게 글을 배웠고, 김집(金集)ㆍ조속(趙涑)ㆍ송준길(宋浚吉) 등과 교류하였다. 효종이 즉위한 뒤 형조 참판, 도승지를 거쳐 병조 판서가 되어 군사를 정비하였다. 《국역 송자대전 제204권 우재(迂齋) 이공(李公) 시장》
[주-D161] 원공 두표(元公斗杓) : 1593~1664. 자는 자건(子建)이고, 호는 탄수(灘叟)ㆍ탄옹(灘翁)이며,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이민서(李敏敍)의 장인이다.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 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원평부원군(原平府院君)에 봉해졌다. 효종 즉위 후 호조 판서, 병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원당(原黨)의 영수로서 친청 세력인 김자점(金自點)을 중심으로 한 낙당(洛黨)을 견제하여, 청나라의 사문 대상이 되었다. 《국역 도곡집 제9권 흥평위 원공 신도비명》
[주-D162] 이공 시방(李公時昉) : 1594~1660.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는 계명(季明)이며, 호는 서봉(西峯)이다. 아버지는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이며, 영의정 이시백(李時白)의 아우이다. 1644년(인조22) 광주 수어사가 되었으나 심기원(沈器遠)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기도 하였다. 대동법 시행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경세가였다. 《宋子大全 卷161 延城君李公神道碑銘》
[주-D163] 염인(廉藺)의 의리 : 평소 사이가 좋지 못한 두 사람이 국사(國事)를 위해 개인적인 원한을 뒤로하고 화합하는 것을 말한다.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인상여(藺相如)가 화씨벽(和氏璧)과 관련된 외교 문제를 처리하고 진(秦)나라에서 돌아와 상경(上卿)이 되자, 염파가 오랫동안 큰 공을 세운 자기보다 높은 지위에 앉았다고 하여 인상여에게 모욕을 가했다. 그런데도 인상여가 국가의 일을 먼저 생각하고 사적인 감정을 뒤로 돌리자, 염파가 가시나무 매를 지고 인상여의 집에 찾아가서 사과하였다. 그 뒤로 두 사람이 친하게 지내면서 국사를 돌보았다. 《史記 卷81 廉頗藺相如列傳》
[주-D164] 홍공 무적(洪公茂績)은 …… 되었다 : 홍무적이 귀양 가 있는 의관(醫官) 정지문(鄭之問)이 패악하여 광해군 때 차마 듣지 못할 말을 했고 인조가 편찮을 때도 나오지 않았다며 율에 따라 다스리자고 논계하자, 효종이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했다. 이경여는 사건이 있은 지 28년 뒤에 죄를 주면 심하다고 헌의하였다. 홍무적이 이 일로 인피하면서 말이 이경여에게 미쳤는데, 다소 거칠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역 효종실록 1년 12월 1일, 11일》
[주-D165] 당개(唐介) : 1010~1069. 송나라 인종(仁宗) 때의 명신으로, 자는 자방(子方)이며 강릉(江陵) 출신이다. 당개는 북송(北宋) 때의 직신(直臣)으로, 전중시어사 장요좌(張堯佐)와 재상 문언박(文彦博)과 간관 오규(吳奎)를 탄핵하였고, 신종(神宗) 희령(熙寧) 초에는 참지정사에 임명되어 누차 왕안석(王安石)과 더불어 쟁론하였다. 《宋史 卷316 唐介列傳》
[주-D166] 이응시(李應蓍)와 …… 선발하였다 : 극선이란 삼사(三司)나 이조(吏曹) 낭관(郞官)처럼 같은 직급의 관직 중 으뜸으로 치는 자리를 말한다. 이응시는 기개가 볼만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홍문록(弘文錄)에 권점(圈點)을 찍었는데, 이응시는 8점, 장응일은 7점을 받아서 홍문록에 들었던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국역 효종실록 1년 7월 23일, 2년 6월 13일》
[주-D167] 시구(蓍龜)나 주석(柱石) : 시구는 점칠 때 쓰는 시초 풀과 거북, 곧 사표(師表)를 뜻한다. 주석은 기둥과 주춧돌로, 나라의 중임을 진 사람을 비유한 말이다.
[주-D168] 나라가 …… 상황 : 위 문후(魏文侯)가 이극(李克)에게 “선생이 언젠가 과인에게 집안이 가난할 때에는 양처를 생각하고, 나라가 어지러울 때에는 훌륭한 재상을 생각하는 법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하였다. 《史記 卷44 衛世家》
[주-D169] 조공 경(趙公絅) : 1586~1669. 본관은 한양(漢陽)이고, 자는 일장(日章)이며, 호는 용주(龍洲)ㆍ주봉(柱峯)이다.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였으며, 1650년(효종1) 청나라 사문(査問)할 때 영의정 이경석(李景奭)과 함께 의주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안치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국역 기언 제40권 용주(龍洲) 신도비(神道碑)》
[주-D170] 항복한 …… 하였다 : 항복한 포로란 군관(軍官)이었다가 병자호란을 계기로 청나라 역관이 된 이형장(李馨長)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형장은 용골대(龍骨大)의 심복 노릇을 하면서 조선 내정에 간섭하였고, 정명수와 매우 친하였다. 귀인(貴人) 조씨 모녀와 친밀하게 지내며 저주와 흉역의 모의에 동참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김자점의 아들 김식(金鉽)의 옥사에 연루되어 청나라와 내통한 실상이 밝혀져 복주되었다. 《국역 인조실록 20년 10월 16일, 25년 9월 11일》 《국역 효종실록 3년 3월 2일》
[주-D171] 이로 …… 금고(禁錮)시켰다 : 이경여를 영원히 서용하지 말고, 시골에 물러나 살게 하였다. 《국역 효종실록 1년 12월 28일》
[주-D172] 맹자(孟子)가 …… 하였으니 : 장씨는 장창(臧倉)을 가리킨다. 맹자의 제자 악정자(樂正子)가 노 평공(魯平公)에게 맹자를 만나 보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노 평공의 총신(寵臣)이었던 장창(臧倉)이 평공에게 참소하여 못 만나도록 저지하였다. 악정자가 이를 안타깝게 여기자, 맹자가 “시켜서 가기도 하고 말려서 못 가기도 한다. 그러나 가는 것과 못 가는 것은 사람이 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노나라 임금을 만나지 못한 것은 천명이니, 장씨의 아들이 어찌 나를 만나지 못하게 할 수 있겠는가.[行或使之, 止或尼之, 行止非人所能也. 吾之不遇魯侯天也, 臧氏之子, 焉能使予不遇哉?]” 하였다. 《孟子 梁惠王下》
[주-D173] 공사를 …… 언급하였다 : 이경여는 당시 “여러 궁가(宮家)의 권세가 있는 자들이 강상에 사는 거장(鋸匠)과 목수(木手)들을 공공연히 사역시키고 재목(材木)도 위협하여 탈취한다고 했으며, 또 동네에 사는 백성들을 자기 집의 일에 사역시킨다고 했습니다. 백성을 사역시키는 명령이 어찌 사문(私門)에서 나올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비판하였다. 《국역 효종실록 4년 6월 20일》
[주-D174] 한 선제(漢宣帝)는 …… 하였고 : 2천 석은 지방 장관을 가리킨다. 한 선제가 항상 “서민이 전원에서 편안히 살며 탄식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없게 하려면 정치가 공평하고 송사가 잘 다스려져야 하는데, 나와 함께 이 일을 할 자는 바로 2천 석의 우수한 태수들이다.”라고 하였다. 《漢書 卷89 循吏傳》
[주-D175] 당 태종(唐太宗)은 …… 보았으니 : 당 태종은 “짐을 대신하여 백성을 기르는 것은 도독(都督)과 자사(刺史)에게 달려 있으니, 내가 항상 그들의 이름을 병풍에 써서 앉으나 누우나 본다.”라고 하였다. 영장은 현(縣)의 장관(長官)이며, 1만 호(戶) 이상의 현은 영(令)이고, 1만 호 이하의 현은 장(長)이라 하였다. 《成百曉 譯註, 譯註 通鑑節要6, 傳統文化硏究會, 361~362쪽》
[주-D176] 주 문왕(周文王)은 …… 없었고 : 《서경》 〈무일(無逸)〉에 “문왕께서는 검소한 의복으로 백성을 편안히 하는 일과 농사일에 전념하셨습니다. 아름답게 부드럽고 아름답게 공손하시어 소민들을 품어 보호하시며, 홀아비와 과부들에게 은혜를 내려 생기를 북돋아 주시어, 아침부터 해가 중천에 뜰 때와 해가 기울 때에 이르도록 한가히 밥 먹을 겨를도 없으시어 만민들을 모두 화합하게 하셨습니다.[文王卑服, 卽康功田功, 徽柔懿恭, 懷保小民, 惠鮮鰥寡, 自朝至于日中昃, 不遑暇食, 用咸化萬民.]” 하였다.
[주-D177] 상 탕왕(商湯王)은 …… 것 :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에게 선왕인 탕왕이 어떻게 스스로를 수양하고 정사를 펼쳤는지를 일러 주는 말에 나온다. 이윤은 “선왕께서는 새벽에 덕(德)을 크게 밝히고 앉아서 아침을 기다리셨으며, 뛰어난 인재를 사방에서 구하여 후인들을 계도하셨으니, 그 명을 무시하여 스스로를 넘어뜨리지 마십시오.[先王昧爽丕顯, 坐以待旦, 旁求俊彦, 啓迪後人, 無越厥命, 以自覆.]” 하였다. 《書經 太甲上》
[주-D178] 조무(趙武)가 …… 알았습니다 : 조무는 조맹(趙孟)이다. 진(秦)나라의 후자(后子) 침(鍼)이 조맹과 함께 진나라 임금의 무도(無道)함을 이야기할 때에 진나라 임금은 일찍 죽되 5년은 갈 것이라 하니, 조맹이 해 그림자를 보며 “아침저녁이 서로 달라지는데 누가 5년을 기다리겠는가.” 하였다. 후자 침이 나가서 남에게 말하기를 “조맹이 곧 죽을 것이다. 백성을 맡아 다스리는 사람으로서 한 해를 탐하고 하루를 탐하니, 더불어 얼마나 가겠는가.” 하였다. 《春秋左氏傳 昭公 元年》
[주-D179] 예기(禮記)에 …… 하였습니다 : 《예기》 〈표기(表記)〉에서 군자(君子)의 태도를 말한 것이다.
[주-D180] 한 무제(漢武帝)는 …… 소란하였고 : 한 무제 때 법을 매우 각박하게 적용한 인물이었던 장탕(張湯), 조우(趙禹)가 잔혹한 형벌로 악명 높았던 두주(杜周) 같은 혹리를 중용하였다. 《史記 卷122 酷吏列傳》 《漢書 卷68 霍光傳》 《資治通鑑 卷19 漢紀11, 16》
[주-D181] 수 문제(隋文帝)는 …… 어지러워졌습니다 : 수 문제는 도둑이 많아지자 1전(錢) 이상을 훔치면 목을 베어 저자에 버리는 형벌에 처하였고, 세 명이 함께 오이 하나를 훔쳤다가 일이 드러나면 즉시 죽이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태자를 폐위하고 진왕(晉王) 양광(楊廣)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아첨하는 신하들이 늘었고 변방은 시끄러웠다. 수 양제(隋煬帝)로 즉위한 양광은 고구려 침략, 대운하 건설로 민심을 잃어 2대 만에 수나라는 멸망하였다. 《資治通鑑 卷178 隋紀2, 3》
[주-D182] 배도(裴度)가 …… 하였습니다 : 당 헌종이 한홍에게 채주(蔡州)에서 반란을 일으킨 오원제(吳元濟)를 토벌하도록 명하였다. 한홍은 당시 발에 병이 있었으나 병을 무릅쓰고 출정(出征)하여 평정하였다. 당시 왕승종(王承宗)은 상산(常山)을 점거하고 반란을 꾀하였다. 조정에서 백기(柏耆)를 보내어 대의(大義)로 왕승종을 설득하자 이에 감격하여 덕주(德州)와 체주(棣州)를 바치고 복종하였다. 배도가 이 일에 대해 말하기를 “조정의 힘이 그들의 생사를 제어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조정의 처치가 시의에 마땅하여 그 마음을 복종시켰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舊唐書 卷135 皇甫鎛列傳》 《新唐書 卷158 韓弘列傳》
[주-D183] 제갈 무후(諸葛武侯)가 …… 하였는데 : ‘궁중(宮中)’은 왕실 등 내정(內廷)을 가리키고, ‘부중(府中)’은 조정(朝廷), 공식 관료체계로 움직이는 정부를 가리킨다. 제갈량의 말은 〈전출사표(前出師表)〉에 나온다.
[주-D184] 주자(朱子)가 …… 하였습니다 : 주희는 〈무신봉사(戊申封事)〉에서 제갈량의 〈출사표〉를 언급하면서 위와 같이 말하였다. 《晦庵集 卷11 戊申封事》
[주-D185] 기재예장(杞梓豫章) : 기재는 먹구슬나무와 가래나무로, 대표적인 좋은 목재인데 훌륭한 인재라는 뜻이다. 초(楚)나라 영윤(令尹) 자목(子木)이 성자(聲子)에게 묻기를 “진(晉)나라 대부와 초나라 대부를 비교할 경우에는 어느 쪽이 더 훌륭한가?” 하니, 성자가 대답하기를 “진나라의 경(卿)은 초나라 경보다 못하다. 초나라 대부는 훌륭한 재목이 매우 많아 전부가 경의 재목이다. 이는 마치 기재와 피혁(皮革)을 초나라에서 수입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春秋左氏傳 襄公26年》 예장은 녹나무로 좋은 재목이다. 훌륭한 인재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주-D186] 송 태종(宋太宗)은 …… 급제시켰으며 : 송 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이 서경(西京)인 낙양에 행차하였을 때 장제현(張齊賢)이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열 가지 계책을 바쳤다. 태조가 소견(召見)하여 물어보니 장제현이 손으로 땅에 그으며 조목별로 진달하였는데, 태조가 그중에 네 가지 계책이 좋다고 하였다. 그러자 장제현이 나머지도 모두 좋다고 고집부리다가 위사(衛士)에게 끌려 나갔다. 그 뒤 태조가 돌아와서 그의 아우인 태종(太宗)에게 “내가 서경에 가서 오직 장제현 한 사람을 얻었는데, 나는 그에게 관작을 맡기지 않을 것이니, 네가 나중에 재상으로 삼아 너를 보좌하도록 하라.” 하였다. 《宋史 卷265 張齊賢列傳》
[주-D187] 한기(韓琦)는 …… 미루었습니다 : 한기는 송 인종(宋仁宗)ㆍ영종(英宗)ㆍ신종(神宗) 때의 명신이다. 송 인종 때에 고시관이었던 한기(韓琦)가 과거 응시자인 소식(蘇軾)이 병에 걸렸다고 하자 이 일을 아뢰어 시험 날짜를 물려 소식의 형제가 시험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국역 상촌집 제33권 병인년 별시를 파방한 뒤에 논자의 말이 거짓임을 조목조목 진달하는 소[丙寅別試罷榜後條陳論者誣罔疏]》
[주-D188] 이항복(李恒福) : 1556~1618.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자상(子常)이고, 호는 필운(弼雲)ㆍ백사(白沙)이다. 사관(史官)인 검열(檢閱), 봉교(奉敎)를 거쳐 이조 좌랑에 천거되었다. 임진왜란 때 도승지로 선조를 호종했으며, 병조 판서, 이조 판서,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하는 등 주요 관직을 거쳤다. 《국역 계곡집 제15권 추충분의평난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 공신(推忠奮義平難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세자사(世子師)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공(李公) 행장(行狀)》
[주-D189] 이덕형(李德馨) : 1561~1613.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명보(明甫)이고, 호는 한음(漢陰)ㆍ쌍송(雙松)ㆍ포옹산인(抱雍散人)이며,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지중추부사 이민성(李敏聖)의 아들이며,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사위이다. 1580년(선조13)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조 정랑, 대제학, 영의정 등을 지냈다.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폐모론에 반대하였다. 《국역 백사집 제3권 효충분의병기익사 분충병의결기형난 공신(效忠奮義炳幾翼社奮忠秉義決幾亨難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춘추관홍문관예문관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春秋館弘文館藝文館觀象監事世子師)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이공(李公)의 묘지》
[주-D190] 신흠(申欽) : 1566~1628.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자는 경숙(敬叔)이며, 호는 현헌(玄軒)ㆍ상촌(象村)ㆍ현옹(玄翁)ㆍ방옹(放翁)이다. 봉교, 감찰(監察), 병조 좌랑을 역임했다. 계축옥사 때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 이후 대제학, 영의정을 지냈다. 1594년 이조 정랑으로 있을 때, 송유진(宋儒眞) 모반 사건을 선조가 친국하였는데 신흠이 문사낭청(問事郞廳)으로 일을 잘하자 선조가 눈여겨봐 두었다가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으로 발탁하였다. 《국역 월사집 제44권 영의정(領議政) 증시(贈諡) 문정(文貞) 신공(申公) 신도비명》
[주-D191] 이정귀(李廷龜) : 1564~1635.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자는 성징(聖徵)이고, 호는 월사(月沙)ㆍ보만당(保晩堂)ㆍ치암(癡菴)ㆍ추애(秋崖)ㆍ습정(習靜)이다. 세조 때 명신인 이석형(李石亨)의 현손이다. 병조 좌랑, 집의를 거쳤으며, 문장과 외교에 능통하였다. 《국역 계곡집 제16권 좌의정 월사 이공 행장(左議政月沙李公行狀)》
[주-D192] 김우옹(金宇顒) : 1540~1603. 경상북도 성주(星州) 출신이며,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자는 숙부(肅夫)이고, 호는 동강(東岡)ㆍ직봉포의(直峰布衣)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국역 갈암집 제23권 유명 조선국(有明朝鮮國)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 제학 예문관 제학 세자좌부빈객(吏曹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世子左副賓客)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世子左賓客) 시(諡) 문정공(文貞公) 동강(東岡) 김 선생(金先生) 신도비명》
[주-D193] 유성룡(柳成龍) : 1542~1607. 경상도 의성(義城) 출생이다. 본관은 풍산(豐山)이며, 자는 이현(而見)이고, 호는 서애(西厓)이다. 검열을 거쳐 사가독서를 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명나라와 외교를 전담하면서 전란을 수습하였다. 북인들의 탄핵으로 관작을 삭탈당했다가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였다. 《국역 우복집 제20권 조선 나라 수충익모광국 충근정량효절협책호성 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풍원부원군 서애 유 선생 행장[有明朝鮮國輸忠翼謨光國忠勤貞亮効節協策扈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豐原府院君西厓柳先生行狀]》 《오항녕, 유성룡인가 정철인가, 너머북스, 2015》
[주-D194] 박순(朴淳) : 1523~1589. 본관은 충주(忠州)이며, 자는 화숙(和叔)이고, 호는 사암(思菴)이다. 명종 떄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받고 파면되어 향리인 나주(羅州)로 돌아왔다가, 선조가 즉위한 뒤 대사간이 되어 척신을 제거하였다. 《국역 백사집 제4권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박공(朴公)의 행장(行狀)》 《국역 선조수정실록 22년 7월 1일》 《오항녕 역, 율곡 경연일기, 너머북스, 2016》
[주-D195] 정철(鄭澈) : 1536~1593. 본관은 연일(延日)이며, 자는 계함(季涵)이고, 호는 송강(松江)이다. 출생지는 서울 장의동(藏義洞)이다. 을사사화 때 아버지 정유침(鄭惟沈)의 귀양지인 경상도 영일(迎日)로 따라갔다가 유배에서 풀리며 전라도 담양으로 이주하였다. 《국역 사계전서 제9권 송강 정 문청공 행록(松江鄭文淸公行錄)》 《국역 신독재집 제10권 임정 정 상공 행장(臨汀鄭相公行狀)》 《오항녕, 유성룡인가 정철인가, 너머북스, 2015》
[주-D196] 장구령(張九齡)이 …… 못하겠습니까 : 지역에 따라 인재의 우열이 나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소석(韶石)은 장구령(678~740)의 고향이다. 그는 당 현종(唐玄宗) 때의 대신이자 시인으로, 소주(韶州) 곡강(曲江) 사람이다. 우선객(牛仙客)은 당나라 수도인 장안(長安) 사람이다. 당 현종이 이임보(李林甫), 우선객 등을 등용하려고 할 때 장구령이 이를 만류하자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종이 나중에는 이를 뉘우치고, 재상들이 공경(公卿)을 천거할 때면 반드시 ‘풍도가 장구령과 같은 사람을 얻었는가?’라고 물었다. 《舊唐書 卷99 張九齡列傳》
[주-D197] 현명한 …… 않는데 :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탕 임금은 중도를 잡으시며 현명한 자를 등용할 때 부류를 따지지 않았다.[湯執中, 立賢無方.]” 하였다.
[주-D198] 주 세종(周世宗)이 …… 하고 : 후주(後周)의 세종이 시신(侍臣)들에게 한 말이다. 《資治通鑑 卷292 後周紀3》
[주-D199] 속오군(束伍軍) : 1594년(선조27)에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설치하고서 지방에 신역(身役)이나 벼슬이 없는 15세 이상의 양민과 양반을 뽑아서 조직한 군대로 평상시에는 군포(軍布)를 바치고 조련할 때와 유사시에는 군역(軍役)을 치르게 하였다. 효종 때 북벌계획으로 강화되었으나 숙종 이후 폐지되었다. 《김우철, 朝鮮後期 地方軍制史, 경인문화사, 2000》
[주-D200] 무학(武學) : 병법과 무예를 가르치는 학교인 무학당(武學堂)을 말한다.
[주-D201] 보인(保人) : 1464년(세조10)에 보법(保法)에 의하면 1보는 2정(丁)으로 이루어졌으며, 보를 구성하는 정을 보인(保人) 또는 봉족(奉足)이라 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갑사(甲士)ㆍ정병(正兵)ㆍ수군(水軍) 등 병종에 따라 그 수를 각각 다르게 규정하였다. 여기서는 훈련도감을 운영하기 위한 제도로, 네 사람이 1보(保)가 되어 한 사람은 군역에 복무하고 세 사람은 그 보인으로 베나 쌀을 바쳤다. 《김종수, 17세기 訓鍊都監의 軍制와 都監君의 활동, 서울학연구2, 1994》
[주-D202] 종모법(從母法) : 남편이 종이어도 아내가 양인이면 소생을 양인으로 삼는 정책이다. 이경여의 주장은 양인을 늘리고 군역을 확보하는 방안이 될 수 있었다. 송시열(宋時烈)도 노양처종량법(奴良妻從良法)을 주장했으나 시행되지 못하고, 영조 때 이르러 모든 종[奴]의 양처(良妻) 소생은 공천(公賤)ㆍ사천(私賤)을 막론하고 모역(母役)에 따르게 하여 양정(良丁)의 수효를 늘릴 것을 법제화하였다. 《국역 영조실록 6년 12월 26일》 《국역 송자대전 제62권 민지숙(閔持叔)에게 답함 - 기유년(1669) 1월》
[주-D203] 소옹(邵雍)이 …… 하였습니다 : 소옹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관물편오십구(觀物篇五十九)〉에 나오는 말인데, 중국(中國)과 이적(夷狄)의 대비는 빼고 인용한 것이다. 《주역》 〈구괘(姤卦)〉에 “연약한 암퇘지가 뛰어오르려고 한다.[羸豕孚蹢躅]”라고 했는데, 연약한 암퇘지라는 뜻의 이시(羸豕)는 음(陰)을 말하고, 척촉(蹢躅)은 나아가지 않으면서 기회를 보는 것을 의미한다. 초효의 음이 현재는 미미하나, 항상 5효의 양(陽) 전부를 소멸시킬 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周易 姤卦 初六》
[주-D204] 우리나라의 …… 있습니다 : 원문의 ‘유정지공(惟正之供)’은 《서경》 〈무일(無逸)〉의 “문왕이 감히 유람과 사냥에 빠지지 아니하여 각국에서 납부하는 경상 조세로 나라를 운영하였다.[文王不敢盤於遊田, 以庶邦惟正之供.]”라는 말에서 나왔다. 이는 국가의 기본 조세 체계인 전세(田稅)ㆍ군역(軍役)ㆍ공납(貢納)을 모두 가리키는 말인데, 이경여의 말에서는 주로 공납을 가리킨다. 조선 초기부터 공물 수취 운영은 물품의 산지와 공물 분정의 지역적 일치, 즉 임토작공(任土作貢)에 따라 이루어졌다. 또한 군현 단위에서 토지와 민호의 수를 참작한 공물 분정의 권장, 생산뿐 아니라 수송 여건과 같은 입지를 고려한 공물 분정이 그 세부적인 내용을 이루었다. 《소순규, 世宗實錄 地理志를 통해 본 朝鮮初貢物 分定의 실제와 특성-厥貢 土貢 土産 항목의 검토를 중심으로-, 한국사연구161, 2013, 37~39쪽》
[주-D205] 태관(太官)을 설치하는 것 : 태관은 원래 중국에서 황제의 음식을 제공하는 일을 담당하는 관청이다. 이경여가 ‘호서(湖西) 백성들의 힘을 조금이나마 너그럽게 해 주려는 목적’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차자를 올린 무렵 세공(歲貢)이나 삭선(朔膳)에 들어가는 진상(進上)의 개혁 방향의 하나로 태관에 해당하는 사옹원(司饔院)을 활용하는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내용은 미상이다. 아래에서 궁시(宮市)가 언급되는 것으로 미루어, 호서의 어공(御供)을 내관이 서울의 시장에서 사 오게 하는 조치였다고 추정된다. 《국역 효종실록 4년 2월 13일》
[주-D206] 궁시(宮市) : 궁정 내부에 시장을 설치하는 것이다. 당 덕종(唐德宗) 때 궁중에 시장을 열고 환관을 궁시사(宮市使)에 임명하였는데, 민간의 물품을 강제로 매입하는 폐단이 있었다. 《唐書 卷4 中宗紀》
[주-D207] 원(原) 땅의 …… 되었고 : 진 문공(晉文公)이 원 땅의 수령으로 임명할 만한 사람을 발제(勃鞮)에게 묻자 발제가 조최(趙衰)를 천거하며 “전에 그는 밥이 든 항아리를 들고 군주를 따르다가 뒤처지게 되자 곧 지름길로 갔습니다. 그때 배가 고팠지만 그는 그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春秋左氏傳 僖公 25年》
[주-D208] 3품의 …… 이루었습니다 : 위 의공(衛懿公)이 학(鶴)을 좋아하여 학 중에는 대부의 품계인 3품에 제수되어 수레를 타고 다니는 학도 있었는데, 후에 적인(狄人)이 위나라를 침범하자 국민들은 모두 의공에게 학과 함께 싸우라면서 돕지 않아 결국 멸망했다. 《春秋左氏傳 閔公 2年》
[주-D209] 진양(晉陽)의 보장 : 《진어(晉語)》에 “조간자(趙簡子)가 윤탁(尹鐸)에게 진양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윤탁이 ‘견사(繭絲)로 할까요, 아니면 보장(保障)이 되도록 할까요?’ 하니, 간자가 ‘보장이 되도록 하라.’ 하였다.” 하였다. 보장은 인심을 화합하게 하여 번방(藩方)을 견고히 한다는 뜻이고, 견사는 부세를 말한다.
[주-D210] 추쇄(推刷)가 …… 심했는데 : 효종이 군사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추진한 노비 추쇄이다. 추쇄도감(推刷都監)을 설치하여 도망가거나 불분명하게 주인이 바뀌거나 한 노비를 찾는 일이었는데, 공노비를 확보하여 노비로 된 군대인 속오군(束伍軍)을 정비하려는 계획이었지만 민심만 흉흉하게 되었다. 수십 년 전에 변동된 신분을 되돌리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김육(金堉), 김수항(金壽恒) 등이 추쇄를 각박하게 하지 말 것을 청하는 등 안팎의 반발도 있었고, 흉년이 겹치면서 민심만 잃고 별다른 소득 없이 흐지부지되었다. 《국역 효종실록 6년 1월 27일, 7년 2월 27일》
[주-D211] 동생(董生)이 …… 했습니다 : 동생은 동중서(董仲舒)이다. 한 무제 때 동중서가 올린 〈현량대책(賢良對策)〉에 나온다.
[주-D212] 자사(子思)가 …… 것입니다 : 자사가 위나라 임금에게 “왕의 국사가 장차 날로 잘못될 것이다.”라고 하자, 위나라 임금이 그 까닭을 물었다. 자사가 “왕이 한마디 말을 하면서 스스로 옳다고 하면 경(卿)과 대부(大夫)가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경대부가 한마디 말을 하면서 역시 스스로 옳다고 하면 사(士)나 서인(庶人)이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니, 이는 임금과 신하가 모두 혼자 잘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資治通鑑 卷1 周紀 安王25年》
[주-D213] 육지(陸贄)의 …… 하였습니다 : 육지가 당 덕종(唐德宗)에게 한 말이다. 《資治通鑑 卷229 唐紀45 德宗》
[주-D214] 이장(弛張) : 이(弛)는 활줄을 느슨하게 푼다는 뜻이고, 장(張)은 활줄을 팽팽하게 당긴다는 말로, 정책을 탄력 있게 조정한다는 뜻이다. 《예기》 〈잡기(雜記)〉에, “당기기만 하고 풀어 주지 않으면 아무리 문왕ㆍ무왕의 다스림이라 할지라도 백성들이 따를 수가 없고, 풀어 주기만 하고 당기지 않으면 아무리 문왕ㆍ무왕의 다스림이라 할지라도 백성들이 행하지 않으니, 한 번 당기고 한 번 풀어 주는 것이 바로 문왕ㆍ무왕의 도이다.[張而不弛, 文武不能也; 弛而不張, 文武不爲也. 一張一弛, 文武之道也.]” 하였다.
[주-D215] 이포진(李抱眞)이 …… 준수하였으니 : 당(唐)나라 대종(代宗)ㆍ덕종(德宗) 때 사람으로 자(字)는 태현(太玄)이다. 택주(澤州)ㆍ회주(懷州) 등의 자사(刺史)를 지냈는데, 요역(徭役)을 줄이고 군대를 잘 훈련시켜 3년 만에 2만 명이나 되는 정병(精兵)을 길러내고 부고(府庫)를 가득하게 만들었다. 덕종(德宗) 때 소의군(昭義軍)을 거느리고 주도(朱滔)를 격파하였다. 《新唐書 卷138 李抱眞列傳》
[주-D216] 피전(避殿) : 나라에 재이(災異)가 있을 때나 우환이 있을 때 임금이 근심하는 뜻으로, 궁전(宮殿)을 떠나 행궁(行宮)이나 별서(別墅)에 옮겨 거처(居處)하던 일을 말한다.
[주-D217] 감찬(減饌) : 감선(減膳)을 말한다.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에 임금이 몸소 근신하는 뜻으로,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이고 노래와 춤을 가까이하지 않던 것을 말한다.
[주-D218] 부비(浮費) : 어떤 일을 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소요되는 비용이다. 물건이나 우마(牛馬)를 운반하는 데 드는 비용 등이다.
[주-D219] 변폭(邊幅) : 변폭(邊襮) 또는 표폭(表幅)이라고도 쓰는데, 이는 겉을 휘갑쳐서 꾸미는 데 비유하여,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포장한다는 말이다.
[주-D220] 날은 …… 뜻 : 할 일이 많은데 시간이 없다는 말로, 전국 시대 초(楚)나라 사람인 오자서(伍子胥)의 말이다. 오자서는 평왕(平王)이 무고하게 아버지와 형을 죽이자,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나라로 망명하여 재상이 되어 초나라를 정벌하고 아버지의 원수인 평왕의 묘를 파헤치고 시체에 3백 대의 곤장을 가하였다. 친구 신포서(申包胥)가 사람을 보내 이를 비난하자, 오자서는 “내 대신 신포서에게 사죄의 말을 전해 달라.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머니, 내가 어쩔 수 없이 일을 거꾸로 행하며 하늘의 뜻에 반하는 일을 하였다.” 하였다. 《史記 卷66 伍子胥列傳》
[주-D221] 송 정언 몽석(宋正言夢錫) : 송몽석(1595~?)은 이경여의 외종(外從) 동생이다. 1624년(인조2)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지내고 1634년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국역 인조실록 12년 12월 16일》
[주-D222] 광풍제월(光風霽月) : 비가 갠 뒤의 화창한 바람과 밝은 달이라는 뜻으로 온화하고 깨끗한 심성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황정견(黃庭堅)은 “염계(濂溪)의 마음은 깨끗하여 속된 기운이 없는 것이 마치 ‘비가 갠 뒤의 온화한 바람과 밝은 달’과 같다.” 하였다. 염계는 주돈이(周敦頤)이다. 《宋史 卷427 周敦頤列傳》
[주-D223] 공의 동생 생원공(生員公) : 이경여의 동생은 이정여(李正輿)이다. 재주와 행실이 있었고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했으나 아버지 이유록보다 먼저 죽었다. 《국역 청음집 제26권 영의정에 추증된 행 여주 목사(行驪州牧使) 이공 수록(李公綏祿)의 신도비명》
[주-D224] 가난하게 …… 장가보냈다 : 첫째 누이는 일찍 죽었으므로 한무(韓楙)에게 출가한 둘째 누이를 말한다.
[주-D225] 내제(內弟) : 외종(外從) 아우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고모의 아들을 내종(內從), 외숙의 아들을 외종이라 하지만, 예전에는 자기 집에서 밖으로 나간 것을 외(外)라 하여 고모의 아들을 외 또는 표(表)라 하고, 자기 집으로 시집온 어머니의 친정을 내(內)라 하였다. 송몽석은 이경여의 어머니 송씨의 조카이다.
[주-D226] 산마루에 서실을 지었는데 : 이때 지은 서실이 청은당(淸隱堂)이다. 《蘇齋集 卷10 淸隱堂重建記》
[주-D227] 두 번이나 …… 위태로웠고 : 중국 사람과 무역한 혐의로 잡힌 이계(李烓)가 심문 과정에서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는 반청(反淸) 인물로 이경여(李敬輿)를 지목하여, 심양으로 끌려간 일을 말한다. 이경여는 심양에 당도한 뒤 칼을 쓰고 동관(東館)에 구금되었다. 《국역 인조실록 21년 2월 11일》
[주-D228] 남쪽 …… 상황이었다 :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가 저주 혐의로 역옥이 일어나자 너그럽게 처리할 것을 인조에게 청하였다가 노여움을 사서 진도(珍島)로 유배 간 일을 말한다. 이후 다시 함경도 삼수(三水)로 옮겼다. 《국역 인조실록 24년 2월 18일》
[주-D229] 내정(內政)의 …… 구하여 : 1638년(인조16) 4월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을 때 올린 차자에서도 《관자(管子)》 〈소광(小匡)〉에서 관중이 제 환공(齊桓公)에게 “내정을 진작시키고 군령을 붙이십시오.[作內政, 而寓軍令.]”라고 한 말을 인용한 적이 있는데, 본문에서 말하는 ‘내정의 편’은 〈소광〉 편을 가리키는 듯하다.
서하집 제15권 / 행장(行狀) 서하 이민서 선조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