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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판서 무적 에 대한 제문〔祭洪判書 茂績 文〕 부친을 대신하여 짓다.

jookwanlee 2020. 9. 5. 04:03

홍 판서 무적 에 대한 제문祭洪判書 茂績 文부친을 대신하여 짓다.

 

서하집 제11/ 제문(祭文) 서하 이민서 선조

 

/ 嗚呼

벗의 도가 없어진 지 / 友朋道喪

지금 천년이 되었도다 / 蓋今千載

내 머리 희끗희끗하도록 / 我首皤然

갈마들듯 사람 겪었건만 / 閱人如代

지금의 교유하는 이들 중 / 凡今之交

무너지지 않은 이 누구 있던가 / 孰甘不壞

대인이 세상 바로잡아 / 大人矯世

마침내 이 우정 돈독해지니 / 乃敦斯愛

내가 현능한 것이 아니라 / 非我能賢

도가 이에 있는 것이니라 / 道則是在

아 면숙은 / 嗚呼勉叔

실로 보기 드문 사람이로다 / 實罕等輩

지조가 탁월하고 / 卓犖風操

기개가 우뚝하니 / 崢嶸氣槪

호걸스러움 천인 가운데 빼어나 / 豪出千人

많은 이들 보고 좋아하였네 / 衆睹爲快

그 빛이 찬란하고 / 其輝燁然

그 아름다움 내면에 있었으니 / 厥美在內

힘을 다해 효도하여 / 竭力爲孝

게으르지 않았지 / 以及匪懈

의를 구이처럼 좋아하여 / 嗜義如炙

하의 걷고 홀로 가서 / 褰裳獨邁

세상 사람들 목 움츠리는 바에 / 世所縮頸

공은 두려워하지 않았네 / 公不慸薊

곧은 기운으로 소인들 업신여기니 / 直氣乘人

밝은 이는 붙고 어두운 자는 등졌으며 / 明附暗背

마음에 아니라고 여기는 것에는 / 心所否者

독충처럼 여겨 피하였지 / 避猶蜂蠆

동방의 해가 / 東方之日

지난날 어두워졌을 때 / 曩者斯晦

공은 그 말을 떨쳐 / 公奮厥辭

유배 가서도 후회하지 않았지 / 竄殛靡悔

성왕이 즉위하여 / 聖人龍飛

우리 준걸들 등용하시니 / 登我俊乂

공이 죄수 신분에서 일어나 / 公起徒中

작명이 누차 내려졌도다 / 爵命屢拜

조정에 올라서 / 揚于王庭

강개한 기운 토해 내니 / 吐氣慷慨

동렬이라도 견디기 어렵거늘 / 雖敵不堪

성상께서 공의 가르침 받아들이셨네 / 上納爾誨

모든 조정 신하들이 / 凡厥廷臣

사업 비루하고 그르치는데 / 事業卑詿

임금께 법도 따르시게 하니 / 俾后從繩

하나의 신하 있었도다 / 有臣一介

옛사람의 곧은 유풍 구하여 / 求古遺直

더불어 짝하니 / 與之作配

오대의 장관으로 나아가 / 烏臺進長

총애 실로 높았고 / 寵遇實最

쇠퇴한 풍속 써늘해도 / 衰俗凜然

풍모 우러러 사모하였지 / 想望風采

생각건대 나는 / 惟我不佞

출처에 공과 짝이 되어 / 出處公對

나 벼슬하여 조정에 있을 때 / 我官在朝

함께 나래 펼쳤고 / 翺翔聯珮

공이 이역만리 사신 갈 적 / 公使異域

내가 상사 되었으며 / 我爲上价

내가 옛날 남쪽으로 유배 갔을 땐 / 我昔南遷

공보다 먼저 죄를 얻었지 / 先公得罪

공이 와서 나 전송하며 / 公來送我

물가에서 탄식하였는데 / 臨水以喟

얼마 지나지 않아 / 日月間耳

끝내 함께 재앙 입었도다 / 竟同其敗

푸른 바다 가운데 / 碧海中央

큰 자라가 떠받치는 곳 / 巨鼇所戴

신령이 거주하여 / 神靈窟宅

자취 기괴함을 다했도다 / 迹窮詭怪

뒤에 또 얼마 지나지 않아 / 後且未幾

북쪽 변방에 함께 이배되었네 / 同遷北塞

흉년 들고 날도 추우며 / 歲弊寒兇

변방의 음기 낮에도 자욱하였지 / 邊陰晝靄

나의 이 조금씩 빠지니 / 我齒差減

그대는 웃고 나는 고달파 하였네 / 子笑我憊

때때로 말 탄 사람 몇을 따라 / 時從數騎

황야에서 마음껏 사냥하여 / 縱獵荒外

성난 말 타고 홀로 뛰쳐나가 / 怒馬獨出

사람들의 충고 받지 않았지 / 不受人戒

더러 높은 언덕에 올라 / 或升高丘

오랑캐 경계 바라보기도 하고 / 以望胡界

편지를 보내 나를 조롱하며 / 作書嘲我

마주하여 담소 못 나눔을 한스러워했지 / 恨不對話

주상의 은혜 전후로 내려져 / 主恩前後

단 이슬 함께 뿌려졌는데 / 甘露同灑

도성문에서 추곡하니 / 追哭脩門

수염 잡으려 해도 미칠 수 없도다 / 抱髥莫逮

남산의 허름한 오두막에서 / 南山弊廬

옛 탑상을 거듭 내려놓고 / 舊榻重解

흥망성쇠 거듭 변함에 / 起伏屢變

서로 마주하고 탄식하였지 / 相對一嘅

풍상 겪은 뒤에는 / 風霜之後

만물이 쑥대처럼 쓰러지는데 / 物靡蕭艾

오직 소나무 잣나무는 / 惟松與柏

우뚝 서서 변함없구나 / 挺立不改

육십 년간 / 六十年間

시종 한 모습으로 / 終始一態

이 마음 빛나니 / 炯然此心

귀신에게 물어도 부끄러움 없어라 / 神質罔愧

이제 가시니 / 今其逝矣

나는 살아서 누구에게 의지할까 / 我生誰賴

그대 해 넘도록 앓을 적 / 子病經年

나 또한 병 깊어졌다오 / 我亦沈瘵

지난날 나아가서 / 疇昔造焉

가르침 받으려 하였는데 / 擬接警咳

문에 들어 얼굴 보니 / 入門見面

내 마음 아팠지 / 使我心痗

침상에 가서 손을 잡고 / 就牀執手

간곡하게 물러남을 고하니 / 丁寧告退

눈을 뜨고 나를 보는데 / 瞪目視我

슬픈 심정 표현할 수 없었네 / 莫白肝肺

그 정수를 거두고 / 斂其精英

그 강대함을 거두어 / 收其剛大

지금 홀연히 가니 / 今忽已焉

속세의 더러움 싫어하였도다 / 厭世滓穢

부귀는 없어져 / 富貴磨滅

썩은 풀과 흙덩이 되지만 / 腐芥積塊

군자가 세운 이름은 / 君子樹名

백대에도 없어지지 않노라 / 百世不廢

공의 죽음 무얼 슬퍼하리오 / 公死何悲

화산과 태산처럼 우러러보리니 / 有瞻華岱

하지만 사사로운 내 마음은 / 我則懷私

심장이 부서지는 듯하네 / 心膽若碎

누가 나의 슬픔 알리오 / 孰知我悲

하늘을 부르며 원망하도다 / 呼天以懟

원룡의 호걸스러운 기운 / 元龍豪氣

검은 눈썹에 상상되네 / 像想眉黛

병들어 상여 줄은 못 잡지만 / 病阻執紼

운구 행차 막히지 말기를 / 柩行勿礙

닭과 기장 차려 정성 올리노니 / 鷄黍薦誠

부디 길이 없어지지 않길 바라오 / 庶有不沫

 

[-D001] 홍 판서(洪判書) : 홍무적(洪茂績, 1577~1656)으로,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면숙(勉叔), 호는 백석(白石)이다. 벼슬은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이민서의 부친 이경여(李敬輿)와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웠으니, 이경여의 문집인 백강집(白江集)에 홍무적에게 지어 준 시 수 편이 수록되어 있고, 송자대전(宋子大全)159 백석 홍공 신도비명(白石洪公神道碑銘)에도 친분이 두터운 이로는 청음(淸陰), 백강(白江), 계곡(谿谷) 장공 유(張公維), 택당(澤堂) 이공 식(李公植), 미옹(迷翁) 이공 명준(李公命俊)이 있다.” 하였다.

[-D002] ()를 구이처럼 좋아하여 : 구이를 좋아하듯 의를 진실로 좋아함을 말한다. 맹자》 〈고자 상(告子上)의리가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이 마치 고기가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다.[理義之悅我心, 猶芻豢之悅我口.]” 하였다.

[-D003] 하의 걷고 : 노고를 사양하지 않고 힘쓰는 것을 말한다. 서효목집(徐孝穆集)1 산기상시 직을 사양하는 표[讓散騎常侍表]옛날에 묵자(墨子) 제생이 하의를 걷고 초()나라를 구원하였다.”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D004] 독충 : 원문의 봉채(蜂蠆)’는 벌과 전갈로 독이 있는 곤충이다. 춘추 시대 주()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해 왔을 적에 노 희공(魯僖公)이 이를 얕보아 방비를 충분히 하지 않자, 장문중(臧文仲)벌과 전갈에도 독이 있는데, 하물며 하나의 나라는 어떻겠습니까.[蜂蠆有毒, 而況國乎?]” 하고 경계한 고사가 있다. 春秋左氏傳 僖公22

[-D005] 동방의 …… 않았지 : 광해군 때를 가리킨다. 1613(광해군5)에 일명 계축옥사(癸丑獄事)라고 불리는 영창대군(永昌大君) 역모 옥사가 벌어졌는데, 대북(大北)의 이이첨(李爾瞻) 등이 박응서(朴應犀)로 하여금 영창대군 추대 음모를 고변(告變)하도록 꾸며,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강등하여 강화(江華)에 위리안치하고, 김제남(金悌男)은 사형, 기타 소북(小北) 세력을 숙청하였다. 국역 연려실기술 제20권 폐주 광해조 고사본말 박응서의 옥사옥사가 진행되면서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仁穆大妃)에 대한 폐모론(廢母論)이 제기되었다. 정인홍(鄭仁弘)의 문인인 진사 이위경(李偉卿) 등이 제기하고, 조정에서는 장령 정조(鄭造)와 윤인(尹訒)이 가세하였다. 이로 인해 조정에서 폐모론에 대한 찬반 논의가 분분하게 일어났다. 이희환, 광해군대의 정국과 이이첨, 전북사학 38, 2011, 60이때 홍무적은 제생(諸生)을 이끌고 그 불가함을 극언하다가 거제(巨濟)로 유배되어 1623(인조 원년)까지 9년 동안 있었다. 宋子大全 卷159 白石洪公神道碑銘, 韓國文集叢刊 113

[-D006] 성왕이 즉위하여 : 인조반정을 통해 인조가 즉위한 일을 가리킨다. 원문의 용비(龍飛)’주역》 〈건괘(乾卦) 구오(九五)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봄이 이롭다.[飛龍在天, 利見大人.]” 한 데서 유래하였는데, 주희(朱熹)의 본의(本義)성인(聖人)의 덕으로 성인의 지위에 있는 것과 같다.” 하였고, 공영달(孔穎達)의 소()성인이 용의 덕을 가지고 날아올라 천위(天位)에 있는 것과 같다.” 하였다.

[-D007] 공이 …… 내려졌도다 : 인조반정 이후 이조(吏曹)에서 1613(광해군5) 이후로 상소하여 직언한 인사와 지조를 지켜 온 사람들을 찾아내어 6품직에 서용하고, 자리가 비는 대로 주의(注擬)하여 인재 등용의 길을 넓히도록 청하였는데, 이때 홍무적도 6품직에 서용되어 창녕 현감(昌寧縣監)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진천 현감(鎭川縣監)에 제수되었다. 국역 인조실록 14821, 21222

[-D008] 오대(烏臺)의 장관으로 나아가 : 오대는 사헌부를 가리킨다. 한서(漢書)83 주박전(朱博傳)어사부(御史府) 안에 줄지어 서 있는 잣나무 위에 항상 수천 마리의 들까마귀가 모여들어 새벽에 나갔다가 저녁 때 돌아오니, 이를 조석오(朝夕烏)’라 일컬었다.” 하였는데, 이로 인해 어사부를 오부(烏府)’라고도 한다. 한나라 때의 어사부는 조선의 사헌부와 같다. 국역 인조실록21527일 기사에 홍무적이 대사헌에 제수된 일이 보인다.

[-D009] 공이 …… 되었으며 :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장인인 강석기(姜碩期)가 별세하여 심양에 있던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姜氏)가 잠시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이 일에 사례하는 사신단이 1644(인조22)에 꾸려졌다. 이때 당시 우의정 이경여가 사은사(謝恩使), 판결사 홍무적이 부사로 임명되어 함께 갔다. 국역 인조실록 21123, 22116211

[-D010] 옛날 …… 얻었지 : 이경여는 강빈(姜嬪)의 사사(賜死)를 반대하다가 2월에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 국역 인조실록 24218

[-D011] 얼마 …… 입었도다 : 홍무적이 대사헌으로 있을 때 강빈의 사사를 강력하게 반대하며 강빈을 폐할 수는 있어도 결코 죽일 수는 없습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강빈을 죽이고자 하신다면 먼저 신을 죽인 뒤에야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 말로 인조의 노여움을 사서 3월에 제주도의 정의(旌義)로 유배되었다. 국역 인조실록 2427, 31314

[-D012] 푸른 …… : 발해(渤海)의 동쪽에 대여(岱輿)원교(員嶠)방호(方壺)영주(瀛洲)봉래(蓬萊)라는 다섯 개의 신산(神山)이 있었는데, 이 산들이 조수(潮水)를 따라 표류(漂流)하여 정착하지 못하므로, 천제(天帝)가 이 산들이 서극(西極)으로 흘러가 버릴까 염려하여 북방의 신에게 명하여 큰 자라 15마리에게 머리에 이고 있게 함으로써 비로소 정착하게 되었다. 뒤에 용백국(龍伯國)의 거인(巨人)이 자라 6마리를 낚아 가서 대여원교 두 산은 북극(北極)으로 표류해 버리고, 방호영주봉래 세 산만 남았다고 한다. 列子 湯問여기에서는 홍무적이 유배 간 제주도를 표현한 말이다. 삼신산 중 영주산이 한라산(漢拏山)을 가리키므로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D013] 북쪽 …… 이배되었네 : 1648(인조26)에 이경여는 삼수(三水), 홍무적은 갑산(甲山)으로 이배되었다. 국역 인조실록 26년 윤317

[-D014] 주상의 …… 뿌려졌는데 : 홍무적이 갑산으로 이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조가 좀 더 가까운 홍천(洪川)으로 옮기게 하였고, 인조가 승하한 뒤에는 효종이 방귀전리(放歸田里)를 명하여 유배지에서 돌아오게 된 일을 가리킨다. 宋子大全 卷159 白石洪公神道碑銘, 韓國文集叢刊 113이경여는 효종이 즉위하여 울타리를 철거하고, 얼마 후 고향인 아산으로 돌려보냈으며, 이듬해 석방하여 영중추부사에 서용하였다. 국역 효종실록 즉위년 520719, 1211

[-D015] 도성문 : 원문의 수문(脩門)’은 초()나라 수도 영()의 성문으로, 인하여 도성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문선(文選)33 초혼(招魂)넋이여 돌아와 수문으로 들어오라.[魂兮歸來, 入脩門些.]” 하였다.

[-D016] 수염 …… 없도다 : 인조가 승하한 것을 말한다. 황제(黃帝)가 승천할 적에 여러 신하와 후궁들이 따르는 자가 70여 명이었는데, 용이 승천하자 여기에 오르지 못한 나머지 소신(小臣)이 모두 용의 수염을 잡으니, 용의 수염이 뽑혀 모두 떨어지고, 황제의 활도 같이 떨어졌다. 백성들이 이미 승천한 황제를 우러르고, 그 활과 수염을 안고 통곡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후대에 그 활을 오호궁(嗚號弓)’이라 불렀다고 한다. 史記 卷28 封禪書

[-D017] 옛 탑상을 …… 내려놓고 : 이경여가 홍무적을 현사로 대우했음을 말한다. 후한(後漢)의 진번(陳藩)이 남주(南州)의 고사(高士)인 서치(徐穉)가 찾아올 때에만 특별히 그를 위해 의자를 내렸다가, 그가 가고 나면 다시 의자를 올려놓고는 일체 빈객을 사절했던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後漢書 卷83 徐穉列傳

[-D018] 오직 …… 변함없구나 : 홍무적의 굳은 지조를 표현한 말이다. 논어》 〈자한(子罕)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에 시든다는 것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彫也.]” 하였다.

[-D019] 육십 …… 없어라 : 송자대전(宋子大全)159 백석 홍공의 신도비명[白石洪公神道碑銘]에 홍무적이 별세하기 전에 스스로 지은 명()을 기록해 놓았는데, 그 명에 ()에도 무()에도 능하지는 못했지만, 성세를 만나서 지우에 감격하여 품은 생각을 반드시 아뢰고, 평탄할 때나 험할 때나 한결같이 하여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도다.[不文不武, 遭逢聖世, 感激知遇, 有懷必達, 夷險一節, 至死不變.]” 하였으니, 홍무적이 평생 동안 변치 않는 마음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D020] 원룡(元龍) : 삼국 시대 위()나라 진등(陳登)의 자이다. 그의 사후에 당시 국사(國士)로 이름이 높던 허사(許汜)와 유비(劉備)가 형주 목사(荊州牧使) 유표(劉表)와 함께한 자리에서 천하의 인물을 논하였는데, 허사가 진원룡(陳元龍)은 호해(湖海)의 선비라 그 호기가 없어지지 않았다.”며 불평하였다. 이에 유비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자, 허사가 지난날 난리를 만나 하비(下邳)를 지나다가 그를 방문하였는데 손님을 맞는 예()도 갖추지 않고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은 큰 침상 위에 올라가 눕고 손님은 침상 아래에 눕게 하였소.”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유비가 나 같으면 백 척의 누각 위에 자고 그대를 땅에 재울 것이니, 어찌 침상의 위와 아래의 차이뿐이겠는가.” 하여 진등의 호방한 기상을 말한 고사가 있다. 三國志 卷7 魏志 陳登傳

 

서하집 제11/ 제문(祭文) 서하 이민서 선조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전형윤 채현경 장성덕 (공역) | 2018

 

 

祭洪判書 茂績 文 代家大人作

 

嗚呼友朋道喪蓋今千載我首皤然閱人如代凡今之交孰甘不壞大人矯世乃敦斯愛非我能賢道則是在嗚呼勉叔實罕等輩卓犖風操崢嶸氣槩豪出千人衆覩爲快其輝燁然厥美在內竭力爲孝以及匪懈嗜義如炙褰裳獨邁世所縮頸公不慸薊直氣乘人明附暗背心所否者避猶蜂蠆東方之日曩者斯晦公奮厥辭竄殛靡悔聖人龍飛登我俊乂公起徒中爵命屢拜揚于王庭吐氣慷慨雖敵不堪上納爾誨凡厥廷臣事業卑詿俾后從繩有臣一介求古遺直與之作配烏臺進長寵遇實最衰俗凜然想望風采惟我不佞出處公對我官在朝翺翔聯佩公使異域我爲上价我昔南遷先公得罪公來送我臨水以喟日月間耳竟同其敗碧海中央巨鼇所戴神靈窟宅跡窮詭怪後且未幾同遷北塞歲弊寒兇邊陰晝靄我齒差減子笑我憊時從數騎縱獵荒外怒馬獨出不受人戒或升高丘以望胡界作書嘲我恨不對話主恩前後甘露同灑追哭脩門抱髥莫逮南山弊廬舊榻重解起伏屢變相對一嘅風霜之後物靡蕭艾惟松與柏挺立不改六十年間終始一態炯然此心神質罔愧今其逝矣我生誰賴子病經年我亦沈瘵疇昔造焉擬接警咳入門見面使我心痗就床執手丁寧告退瞪目視我莫白肝肺斂其精英收其剛大今忽已焉厭世滓穢富貴磨滅腐芥積塊君子樹名百世不廢公死何悲有瞻華岱我則懷私心膽若碎孰知我悲呼天以懟元龍豪氣像想眉黛病阻執紼柩行勿礙鷄黍薦誠庶有不沫

 

서하집 제11/ 제문(祭文) 서하 이민서 선조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