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 곡직
서하 이민서 선생 말씀, ´국조 인물고´ 에서
을미년(乙未年, 1655년 효종 6년)에 예조 좌랑(禮曹佐郞)에 제수되었다가 정언(正言)으로 옮겨졌는데, 당시 효종 대왕이 큰 뜻을 분발하여 국정 다스리기를 힘쓰자, 공은 임금이 총명하여 신하를 부리고 일을 일으킴에 있어 점진적임이 없는 것을 염려하여 상소(上疏)로 극언을 하였다.
그 상소에서 아뢰기를, “요즘에 시신(侍臣)을 대하시는 예가 너무 야박해서 구속하여 가두고 태장(笞杖)을 치기를 가벼운 법으로 여기시어 차꼬를 지체 높은 선비에까지 두루 사용하며 오랏줄이 지위 높은 근신(近臣)에까지 미치니, 사기가 꺾이고 막혀서 잡류들이 함부로 나다니면서 임금의 마음을 좌지우지합니다. 온갖 풍속이 치닫는 파도와 같아 염치(廉恥)가 모두 없어지고 명절(名節)이 비로 쓴 듯하니, 국사(國事)가 이루어지지 않고 언로(言路)가 통하지 않는 것은 괴이할 것이 못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모든 일은 가(可)가 있고 부(否)가 있은 뒤에 정당한 데로 돌아가는 법이며, 옳다고 하고 그르다고 한 다음에야 여러 선한 사람이 모여드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서 가와 부를 묻지 않고 곡(曲)과 직(直)을 따지지 않고서 성지(聖旨)가 내려지면 한결같이 받들어 순종하고, 대신으로 노성(老成)한 이는 스스로 사체(事體)를 안다고 생각하며 소신으로 소천(疏賤)한 사람은 스스로 직분(職分)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형관(刑官)에 이르러서는 죄의 경중을 평의하여 아뢰는 일에 있어 조종(祖宗)이 정한 삼척법(三尺法)의 떳떳한 형전(刑典)을 쓸데없는 무용지물로 여기고 있으며, 묘당(廟堂)이 하는 사업은 인주(人主)가 생각한 일시적(一時的)으로 사사로운 뜻을 이루게 하는 것에 불과하여 상하가 서로 덮어주면서 겉으로는 옳다 하고 속으로는 그르게 생각하고 있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위에 있는 사람이 자기와 뜻이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자기와 뜻이 같은 사람만을 기뻐한 잘못 때문입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제갈 공명(諸葛孔明)이 촉(蜀)을 다스릴 때에 오(吳)ㆍ위(魏)와 진루(陣壘)를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먼저 권농(勸農)한 뒤에 강무(講武)하였고, 왕맹(王猛)이 진(秦)나라의 정승이 되어서는 조석으로 전쟁을 하였으나 반드시 농사와 잠업을 과목으로 권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거식(去食)이 거병(去兵)의 뒤에 있는 것이며 부국(富國)이 강병(强兵)의 앞에 있는 것으로 그 본말의 형세가 그러한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바야흐로 무익한 일에 성의를 쏟고 계시니, 책임을 독촉하는 자는 그의 잔인하고 혹독함을 제멋대로 부리고, 능력을 자랑하는 자는 이기는 것을 힘쓰고 용납되기를 구하여 아첨을 합니다. 심지어 추쇄(推刷)는 작은 일인데도 거조(擧措)가 너무 무겁고 과조(科條)가 너무 촘촘하며, 자초(煮硝)는 말단의 일인데도 나라 안이 시끄러워 구속된 죄수가 감옥에 가득하니, 이것이 어떤 등속의 정령(政令)입니까? 전하(殿下)께서는 불세출(不世出)의 자질로서 크게 정사를 할 수 있는 때를 만나셨으니 비상(非常)한 공을 세우실 것은 맹세코 저 태양을 두고 기약할 수 있사온데, 지(志)가 기(氣)에게 빼앗기고 의(義)가 이(利)에 가려진 바 되어 지사(志士)로 하여금 해체(解體)되게 하고 생민(生民)으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시니, 그윽이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하고,
상소의 끝에 또 아뢰기를, “나이 젊어 일찍 현달해서 학업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원하옵건대 수년간을 빌려 주시어 글을 읽어 학업을 이룰 수 있게 해주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후한 비답(批答)을 내려 칭찬하고 장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