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관행〔南館行〕 ~ 강한 황경원 선생
남관행〔南館行〕 ~ 강한 황경원 선생
배신이 옥에 갇히니 모두들 기뻐하며 / 陪臣繫獄皆忻忻
원컨대 한 번 죽어 황제의 은덕을 갚고자 하네 / 願得一死酬帝德
황제의 은덕 천지와 같이 크고 넓으니 / 帝德蕩蕩如天地
오직 평생 갚을 수 없을까 두려울 뿐이라네 / 唯懼百年酬不得
이 문정공이 크나큰 절개 있어 / 文貞李公有大節
젊어서 유악에 올라 충직을 다하였네 / 少登帷幄竭忠直
열제께서 사직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후로 / 一自烈帝死社稷
복수 의리 먼저 말해 인륜의 표준을 세웠네 / 首陳復讎立人極
종신토록 풍악 소리를 듣지 않으며 / 終身不聞絲竹聲
오직 서쪽을 향해 길게 탄식하였네 / 唯自西向長歎息
스스로 망국의 외로운 신하라고 일컬으면서 / 自稱亡國一孤臣
전각에 오를 때 눈물 흘리며 옷자락을 적셨네 / 上殿涕淚霑衣裓
심양에서 처음 명나라 유민을 수색할 때 / 瀋陽初括明遺民
영남 관찰사인 공이 홀로 가엽게 여겼네 / 公按嶺南獨悲惻
항의하며 끝내 한 사람도 보내지 않았으니 / 抗言竟不送一人
남은 백성 보호하여 국경을 넘지 않게 하였네 / 保此餘氓不出閾
심양에서 참소하는 이의 말을 그릇되이 듣고 / 瀋陽過聽讒人言
몇 달을 잡아두었다가 고국으로 돌려보냈네 / 囚覊數月還故國
사신 행차 머나먼 길 심양으로 들어가니 / 冠盖迢迢入瀋陽
마음속의 지극한 통한(痛恨) 그 누가 알리오 / 至痛在心人誰識
예로부터 빙문은 곧 빈례이니 / 自古聘問是賓禮
명을 받들고 가며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었다네 / 奉命庶幾無愧色
[주-D001] 이 문정공(李文貞公) : 이경여(李敬輿, 1585~1657)의 시호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세종의 7대손이다. 자는 직부(直夫), 호는 백강(白江) 또는 봉암(鳳巖)이다. 1609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였으나 광해군이 즉위하자 은거하다가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에야 벼슬에 나섰다.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로 왕을 호종(扈從)하였고,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을 사수할 것을 주장하였다. 부제학ㆍ좌승지ㆍ대사성ㆍ형조판서 등을 역임하다가 1642년에 청나라 연호인 숭덕(崇德)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여 심양에 억류되었고, 1644년에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다시 억류되었다. 1645년에 소현세자의 빈(嬪)이 소의 조씨(昭儀趙氏)를 저주했다고 하여 사약을 받게 되었을 때 반대하다가 진도에 유배되었으며, 1648년에는 삼수(三水)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듬해 효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중용되어, 1650년에 영중추부사가 되고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그 후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으나 청나라의 압력으로 영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저서로 《백강집(白江集)》이 있다.
[주-D002] 젊어서 …… 다하였네 : ‘帷幄’은 원래 군대의 장막을 가리키는 말로, 중국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모사(謀士) 장량(張良)이 주로 장막 안에서 계획을 세워 “유악 안에서 산가지를 놓아 천리 밖에서 결승한다.〔運籌策帷幄中, 決勝千里外.〕”라고 한 데서 나왔다. 《한서(漢書) 장량전(張良傳)》 이에 국정(國政) 혹은 군사 기밀을 의논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후에 임금과 가까이 있는 곳을 가리키게 되었다. 여기서는 이경여가 젊은 나이인 25세(1609) 때 증광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해 1611년에 예문관 검열(檢閱)이 된 사실을 가리킨다.
[주-D003] 열제(烈帝) : 중국 명(明)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 의종의 시호가 장렬제(莊烈帝)이다.
[주-D004] 열제께서 …… 이후로 : 중국의 명(明)나라가 멸망한 것을 가리킨다. 1644년 갑신년 3월 명나라 황제 의종(毅宗)이 재위 17년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명나라가 멸망하였다.
[주-D005] 인륜의 표준 : 원문의 ‘人極’은 인류의 지고한 도덕의 표준, 곧 중정(中正) 인의(仁義)를 말한다.
[주-D006] 종신토록 …… 않으며 : 황경원은 《강한집》 제31권 〈명배신전(明陪臣傳) 5 이경여(李敬輿)〉에서 “이경여의 집안은 대대로 명나라의 배신이었으므로 의리상 청나라를 섬기지 않았다. 항상 망국(亡國)의 대부(大夫)라고 자처하며, 죽지 않은 것을 구차하게 여기고 종신토록 음악 소리를 듣지 않았다.〔敬輿家世明陪臣, 義不事淸. 常以爲亡國大夫, 不死苟耳, 終身不聞絲竹之聲.〕”라고 하였다.
[주-D007] 심양에서 …… 하였네 : 《강한집》 권31 〈명배신전(明陪臣傳) 5 이경여(李敬輿)〉에 “이경여는 숭정 10년(1637)에 경상 관찰사가 되었다. 청인(淸人)들이 명나라 유민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자 이경여는 ‘중국의 자제들을 묶어서 오랑캐들에게 보내는 짓을 신은 차마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며 끝내 한 사람의 유민도 보내지 않았다.〔十年爲慶尙觀察使. 淸人大索明遺民, 敬輿言縛中國之子弟以予虜人, 臣不忍也. 卒不遣遺民一人.〕”라고 하였다.
[주-D008] 심양에서 …… 돌려보냈네 : 1642년(인조20)에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던 이계(李烓)가 명(明)나라와 밀무역을 하다가 청(淸)나라에 발각되어 처형당할 위험에 처하였다. 이계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이경여(李敬輿) 등이 명나라 선박과 몰래 무역하는 것을 묵인하고 청나라 연호인 숭덕(崇德)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밀고하였고, 이에 이경여는 김상헌, 최명길 등 조정 대신과 함께 심양에 잡혀가 1년 반 동안 구금되었다. 이듬해 은(銀) 1,000냥을 바치고 풀려나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돌아왔으나, 이후 청(淸)으로부터 기피인물로 지목되었다.[주-D009] 사신 …… 들어가니 : 원문의 ‘冠盖’는 중국과 조선을 왕래하는 사신을 말하는 것으로, 이경여가 1644년에 사은사(謝恩使)로 청(淸)나라에 간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때 청나라 황제가 “경여가 전에 죄가 있는 것을 사면하여 내보내기는 하였으나, 벼슬을 승진시켜 정승을 삼은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여 다시 억류하였다. 1645년에 세자가 청의 황제에게 상소하여 귀국할 수 있었다.
강한집 <황경원(黃景源)의 시문집> 제2권 / 시(詩)
ⓒ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 박재금 이은영 홍학희 (공역) | 2014
* 강한집
32권 18책. 조선 영조(英祖) 때 황경원(黃景源)의 시문집. 그가 죽은 지 3년 뒤인 정조(正祖) 14년(1790)에 간행되었다.
* 黃景源(황경원)
조선(朝鮮) 시대(時代) 22대 정조(正祖) 때의 문신(文臣)ㆍ문장가(文章家). 자는 대경(大卿), 호는 강한(江漢), 본은 장수(長水). 예학(禮學)에 정통(精通)하고 고문(古文)을 잘했으며 글씨에도 능(能)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