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님

중화

jookwanlee 2019. 9. 4. 21:31

중화(中和)의 기상으로 노(怒)하기를 더디하자

 

효종대왕이 선친이신 인조대왕의 일로 유계라는 신하가 선친 인조대왕을 비방하였다는 생각을 품고 노하여 그 신하를 독단으로 유배까지 보내는 일이 벌어진다 (아래 글 참조).

 

이때에 중화(中和)의 기상을 잃지 말라는 백강 이경여 선생의 상차하신 말씀이 깊고 덕(德)이 있는 말씀인데 효종께서 노하여서 이를 따르지 못하는 모습이다.

 

비록 아무리 부친에 관한 일 일지라도 평상심으로 주변의 좋은 의견을 두루 들어 바르고 덕스럽게 판단하고 실천함이 참으로 성인(聖人)다운 모습일 것이다.

 

모든 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대하여 나가면, 노(怒)하기는 절로 더디어지고, 스스로의 덕(德)과 품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며 중화(中和)의 기상이 넘치게 될 것이다.

 

이때의 효종대왕은 춘추가 아직 젊어 혈기가 넘쳐나서 그렇게 된 것 같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에는 일단 세 번을 참고 그 다음에 취할 바를 생각하자.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 잠언 15:18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 잠언 16:32

 

************ 아 래 ***********************************************

 

효종실록 > 효종 1년(1650년) > 효종 1년 4월 3일

 

조익이 유계를 천거하였으나 선왕을 비방하였다 하여 유계의 관작을 삭탈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고, 이르기를,“근래 연일 서리가 내리고 날씨가 추우니 매우 걱정스럽다.”하니,

 

영의정 이경여가 아뢰기를, “절후(節候)가 질서를 잃으면 농사에도 피해가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에 붕당으로 인한 해독이 오래되었다. 심지어 다른 나라 사람들도 우리 나라에 붕당이 있음을 말하니, 역시 부끄럽지 않은가.”하니,

 

경여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붕당으로 말씀하시나, 대체로 우리나라의 편당은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구별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대대로 내려오는 업(業)을 지키다 보니 각자 분열된 것입니다. 임금이 현사(賢邪)를 분별해서 쓴다면, 자연 청탁(淸濁)이 분간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너무 심하게 분별하면 탁한 자가 언제나 청한 자를 이기려 하니, 이 점도 염려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본을 따져서 말한다면 임금 노릇을 제대로 못한 과실이 실로 나에게 있지만, 조신(朝臣)들이 붕당을 지은 병통은 참으로 오늘날의 고질적인 병폐이다.” 하니,

 

경여가 아뢰기를, “신면(申冕)은 명문의 자손이니, 굳이 자점(自點)과 친히 지낼 이유가 없지만 자점이 언제나 명사(名士)와 교류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왕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를 가지고 그의 당이라 지적하여 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지항(李之恒)도 그와 인척관계로 인하여 혹 왕래하기는 하였지만 오래도록 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신은 모두 거두어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우의정 조익이 아뢰기를, “유계(兪棨)는 포의(布衣)일 때 신에게 경서(經書)를 배워서 신은 그의 위인이 범연치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만, 이제 와서 보니 참으로 정직한 선비입니다. 그런데 주의(注擬)할 적에 상께서 낙점을 아끼시니, 무슨 죄가 그에게 있어서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하니,

 

상이 노여워하며 이르기를, “이제 비록 소진(蘇秦)이나 장의(張儀)의 말재주로도 내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다. 유계가 어찌 감히 30년간 섬겼던 임금에게 ‘인(仁)’이라 칭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한단 말인가.” 하였다.

 

부제학 조석윤(趙錫胤)이 아뢰기를, “유계의 마음에 어찌 다른 뜻이 있어서 그랬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계가 당초 심대부(沈大孚)의 상소를 옳다고 하였는데, 나중에는 내가 그 뜻을 모를까봐서 또 ‘인(仁)’ 자의 뜻까지 설명하면서 선왕(先王)의 시호에는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어찌 감히 그럴 수가 있는가.” 하였다.

 

조익이 아뢰기를, “대부(大孚)도 어찌 다른 속셈이 있었겠습니까. 신이 대부를 애석히 여겨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유계도 어찌 대부와 서로 친해서 함께 그런 논의를 드렸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심대부는 속으로 ‘인(仁)’ 자가 합당하지 않다고 여기고서 마침내 ‘종(宗)’과 ‘조(祖)’를 가지고 말하였는데, 이는 ‘조(祖)’라 칭하지 못하면 인종(仁宗)이라고 거듭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자연 ‘인(仁)’ 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의 심술이 바르지 못하다. 그리고 이조는 꼭 유계를 전랑(銓郞)에다 수의(首擬)하였는데, 내가 매우 싫었다. 그러나 분(忿)함을 징계하려는 뜻에서 그만두었다. 또 이조는 정사 때마다 유계를 천거하는데, 이는 무슨 도리인가. 유계가 만일 제갈량의 재지(才智)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결코 쓸 수 없다. 만일 불의(不義)를 행한 것으로 말한다면, 중죄로 다스려도 안 될 것이 없다. 유계가 만일 나를 지탄하였다면 아무리 이보다 심하게 해도 충애(忠愛)라고 하겠다. 그러나 선왕에게 어찌 감히 그렇게 한단 말인가. 그의 관작을 삭탈하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5책 4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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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실록 > 효종 1년(1650년) > 효종 1년 4월 4일

 

영의정 이경여가 유배의 명을 거둘 것을 간하였으나 듣지 않다

 

영의정 이경여가 상차하기를,

 

“어제 탑전에서 삼가 보니, 진노한 기색이 목소리와 용안에 너무 현저하여 성인의 중화(中和)의 기상을 크게 상실하였으므로, 신은 황공하고 의혹스러웠습니다. 신은 성상의 덕이 관대하며 인자하고 성상의 학문이 고명하시니, 궂은 것 미운 것 모두 포용하여 사물에 순응하심에 있어서 필시 생각하지 않더라도 잘 하시고 굳이 힘쓰지 않아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모르는 사이에 천지의 큰 도량에 유감됨이 있었습니다. 의리를 강명(講明)할 적에 혹시라도 성찰하고 보존하는 공력이 부족해서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탕(成湯)과 같이 큰 성인도 과실이 없을 수 없어, 허물 고치는 것을 꺼리지 않은 것으로 후세에 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명(聖明)께서 아무리 좌우의 실대(失對)에 격분하였다 하더라도 깊은 밤 생각하시고 맑은 새벽 한가하실 적에 필시 확연히 깨달으심이 있어 흔쾌히 후회하는 단서를 보여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삼가 유계와 심대부 등을 유배하라는 명이 내렸다는 말을 듣고, 신은 놀라고 실망하였습니다. 성명께서 이런 거조를 하시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인정(人情)이란 그다지 서로 멀지 않은 것입니다. 유계 등도 미쳐서 실성한 사람이 아닙니다. 선조(先朝)를 내리 섬겨 시종(侍從)으로 출입하였으니 후한 은혜와 예우가 소원(疎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 선왕(先王)께서 위에 계신 지 30년에 가까워 깊고 후한 인덕이 사람들의 살과 뼈에 깊이 스몄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승하하시자 궁벽한 산골의 백성들까지도 애통해 하였습니다. 유계 등이 유독 어떤 마음을 가졌기에, 승하하신 초상에 차마 폄하하는 마음을 내어 애통하고 망극한 중에 함부로 말하기까지 하였겠습니까. 생각건대 필시 묘호(廟號)에 ‘조(祖)’ 자를 거듭 사용하는 것을 혐의롭게 여겨서일 것입니다. 그리고 심대부는 필시 선조조(宣祖朝)의 윤근수(尹根壽)와 윤효전(尹孝全)의 일230) 을 본받은 것이니, 어찌 그 사이에 다른 의도가 있었겠습니까.

 

삼가 성자(聖慈)께서는 위엄을 조금 거두시고 슬기로운 성찰을 더 깊이 하시어 내리신 명을 우선 중지하소서. 그리고 정신(廷臣)에게 물으시고 여론을 따르심으로써 중외(中外)의 신하들로 하여금 성상의 새로운 모습을 모두 우러르게 하소서. 신은 편벽되이 뼈에 사무치는 은혜를 입었기에 분골쇄신하여 큰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찌 조정의 서로 아는 한두 사람을 위하여 쓸데없는 말을 하여 우리 임금을 속이겠습니까.”하였는데, 상이 듣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5책 421면

 

[註 230]윤근수(尹根壽)와 윤효전(尹孝全)의 일 : 선조(宣祖)의 묘호를 논의할 때, 모두 종계(宗系)를 개정하고 왜구를 물리친 공이 크다는 이유로 ‘조(祖)’로 칭호할 것을 주장하자 윤근수가 차자를 올려 창업한 임금을 ‘조’로 칭호하고 계통을 이은 임금은 ‘종(宗)’으로 하는 고례를 들어 반대한 일을 말한다. 이로 인하여 당시 묘호를 선종(宣宗)으로 정하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別集) 권1 국조전고(國朝典故). ☞

 

특히 “성탕(成湯)과 같이 큰 성인(聖人)도 과실이 없을 수 없어, 허물 고치는 것을 꺼리지 않은 것으로 후세에 법이 되었습니다”라고 언급하신 백강 이경여 선생의 말씀은 반드시 주목하고 실천해야 할 말씀이다. 죄와 허물이 없는 인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스스로 교만함은 패망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2018. 9. 4. 이 주 관